내년은 미국이 오키나와의 시정권(施政權)을 일본에 반환한 지 40년이 되는 해다. 한국에 있어서 오키나와 반환이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한국의 안전보장 문제뿐만 아니라 탈식민지화 과정의 단면과 남북분단의 현실을 드러내는 중요한 계기였다.
알려진 바와 같이 2차세계대전 중 오키나와에서는 수많은 한반도 출신자가 희생되었다. 오키나와 본도 남단에 위치한 마부니(摩文仁)에는 오키나와전투 희생자를 추모하는 평화기념공원이 있다. 공원 내에 있는 '평화의 초석'에는 희생된 한반도 출신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 옆에는 오키나와에서 전사하거나 학살된 '한국 청년 영령들의 명복'을 빌기 위한 '한국인위령탑'이 한국 방향을 향해 건립되어 있다.
하지만 1972년 5월 오키나와 반환이 실현되기까지 한·일 양국 정부는 오키나와에 거주하는 한반도 출신자의 존재에 대해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들의 존재를 충분히 알지 못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74년 3월 주일한국대사관이 외무부장관에게 보낸 보고서에는 '2차대전 당시 징용·징병 당하여 또는 위안부로 강제로 오키나와에 파견된 한국인의 총수와 희생자 수 등은 통계 자료가 없어 정확한 숫자를 알 수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일본 법무성 입국관리국의 한 참사관은 한일협정 체결 당시 오키나와에 거주하는 한반도 출신자의 문제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고 서술했다. 하지만 오키나와 반환 당시 약 1000명(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 발효 이후의 입국자 포함)이 오키나와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은 한·일 양국 정부로부터 잊혀진 존재였다. 한국 정부는 오키나와 반환을 계기로 그(녀)들의 존재를 인식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한일협정에 기초한 영주권(협정영주권)신청문제와 한국인위령탑 건립에 대한 외무부의 움직임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신청기한이 지난 협정영주권
1971년 6월 오키나와 반환협정이 체결되어 오키나와 반환 움직임이 갈수록 커지는 가운데 한국 외무부는 중대한 사실을 깨달았다. 오키나와에 거주하는 한반도 출신자가 오키나와 반환 시점에서 이미 협정영주권을 신청할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1965년 6월 체결된 '재일 한국인의 법적 지위협정'은 협정발효일로부터 5년을 협정영주권 신청기한으로 정하고 있었다. 협정영주권의 신청은 오키나와가 일본의 시정권 하에 들어가기 전인 1971년 1월에 이미 마감되었던 것이다.
외무부는 구제조치로서 일본정부에 대해 협정영주권의 신청기한 연장을 요청했다. 하지만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협정영주권 신청을 단념하고, 일반영주권으로 대응하기로 결정했다. 한국정부는 한반도 출신자의 법적 지위 문제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2차대전 이전부터 오키나와에 거주하고 있는 한반도 출신자를 적어도 2명 확인했다(1971년 3월 : 외무부장관에게 보낸 주일한국대사관 보고서). 그(녀)들은 '평화조약 국적이탈자' 및 '평화조약 국적이탈자의 자손'이며, 협정영주권 신청자격자였다. 협정영주권 신청자격을 갖고 있던 사람은 정말 2명뿐이었던 것일까? 그리고 일반영주권으로 바뀐 대응이 그(녀)들의 권리를 침해하지는 않았던 것일까? 오키나와 반환은 잊혀진 사람들의 존재를 깨닫게 했을 뿐만 아니라 탈 식민지화 과정에서 내던져진 중요한 문제를 드러냈다.
동아시아 냉전의 현실을 투영한 한국인위령탑
오키나와 반환 직후부터 잊혀진 사람들에 대해 갑자기 이목이 집중되었다. 1972년 8월 '2차 대전 당시 오키나와 조선인 강제연행·학살 진상조사단'이 오키나와를 방문하여 종전 이후인 1945년 8월 20일 구메지마(久米島)에서 발생한 일본군 조장(曹長, 한국의 상사 계급)의 조선인 일가 학살사건에 대해 조사했다. 이에 대해 외무부는 이 조사단의 조사가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이하 조선총련)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단정하고, 2차대전 당시 징용·징병되어 희생된 한반도 출신자를 애도하기 위해 위령탑을 건립하려는 '북괴'의 움직임을 감지하면서 위기 의식이 고조되었다.
1974년 3월 주일한국대사관은 '북괴'에 의한 위령탑 건립 움직임에 대응하기 위해 '북괴'보다 먼저 오키나와에 위령탑을 건립해야 한다고 외무부장관에게 건의했다. 외무부장관은 한국인위령탑 건립의 주된 목적을 '(한국인 희생자의)망령을 위로하고 북괴에 기선제압을 하여 아국이 동 지역에 위령탑을 건립함으로써 북괴의 오키나와 침투 여지와 구실을 없애고자 하는 데 있음'(1974년 3월 : 외무부장관이 주일한국대사 앞으로 보낸 전문)이라고 설명했다.
조선총련은 한국인위령탑 건립에 대해 격렬하게 반발했다. '2차대전 시의 희생자는 조선인이지 한국인이 아님', 또한 '조선인의 위령비가 세워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탑을 건립한다는 것은 희생자를 모독하는 것임'이라며 한국인위령탑 건립계획을 규탄했다. 잊혀진 사람들을 위령하기 위한 탑의 건립을 둘러싸고 남북이 격렬하게 대립하는 가운데 1975년 8월 한국정부는 '북괴'의 기도를 저지하고, 한국인위령탑을 완공했다.
한국인위령탑의 건립은 분명 잊혀진 사람들의 존재에 대해 한국정부가 눈을 돌리게 된 움직임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그것은 명백하게 남북분단 상황에서 펼쳐진 체제우월 경쟁의 일익을 담당했다. 한국인위령탑은 잊혀진 사람들의 존재뿐 아니라 탈 식민지화 과정에서 출현한 남북분단,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동아시아 냉전의 냉철한 현실을 투영하는 구조물로서 지금도 여전히 마부니에서 '한국'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오키나와 반환은 미·일 양국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특히 한국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중요한 문제였다. 그것은 20세기에 한국이 겪은 역사적 경험과 직면한 현실의 상징적인 일면을 투영해 냈을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에 잔존하고 있는 식민지주의와 냉전의 잔재를 드러낸 역사적인 사건으로 볼 수 있다.
오키나와 반환은 한국이 안고 있는 과거와 현재의 문제에 대한 생각, 동아시아의 대립을 어떻게 극복하고 평화를 실현해 나갈 것인가의 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한 미래 구상력과 상상력이 시험대에 오르는 하나의 사상적 과제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