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20일 때 이르게 밀어닥친 서울의 초여름 더위를 뒤로하고 파리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파리의 샤를르 드골 공항과 지중해 연안의 니스 공항을 거쳐 도착한 모나코의 푸르디 푸른 쪽빛 바다와 시원한 밤공기는 서울의 더위에 찌든 기분을 한껏 상쾌하게 해 주었으나 마음 한켠을 짓누르는 억압감은 어찌할 수 없었다. 금번 국제수로기구(IHO)총회에서는 동해표기가 이루어 질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 속에 전 국민의 시선은 모나코로 쏠리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IHO 총회가 개최되는 동안 국내 방송 3사를 비롯한 우리 언론들은 총회 현장에서 뜨거운 취재 열기를 보여 주었고, 각종 시민 단체와 해외 교민대표들도 직접 현장까지 날아와서 동해표기의 정당성을 홍보하며 많은 성원을 보내주었다.
그 중에서도 인제대 학생들로 구성된 '동해수문장'의 홍보활동은 인상적이었다. 그들은 해외 각국을 돌며 동해병기 지지 서명 운동을 전개하고, 받은 서명 명부를 IHO사무국을 비롯하여 각국 대표단에게 송부하였다. 또한 이들은 조선시대 수문장 복장을 하고서 회의장 입구에서 단정하면서도 절제된 자세로 각국 대표단들에게 깍듯이 고개 숙여 인사하는 무언의 시위를 벌임으로써 그 어떤 강력한 구호보다 더 강한 메시지를 전달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관심과 성원은 또 한편으로는 우리 대표단들에게는 엄청난 압박감으로 작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 IHO총회의 중요한 의미
총회장 바깥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러한 성원과 지지, 그리고 온 국민의 뜨거운 관심에도 불구, 이번 IHO총회에서도 동해병기를 이루지 못한데 대한 아쉬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물론 IHO의 독특한 의사결정 방식1)을 감안할 때, 이해 당사국의 합의 없이는 사실상 어떤 새로운 결정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미리 알고는 있었지만, 그간 온갖 어려움을 다 겪으며 추구해 왔던 우리의 꿈을 다음 총회로 연기시켜야 한다는 현실에 막상 직면했을 때 엄습해오는 허무감은 정말 컸다. 그러나 이러한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이번 IHO총회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첫째, 이번 총회를 통해 IHO해도(海圖, S-23)에서'일본해'단독표기는 그 정당성을 상실케 되었다는 것이다. 일본은 동해 표기문제로 S-23 신판 발간이 지연되고 있는 만큼, 신판 발간을 서두르기 위하여 IHO가 지난 1953년 발간한 S-23 3판을 기준으로 하여 합의되는 부분부터 부분적으로 수정해 나가자는 안을 제안하였다. 일본의 이 제안은 한·일간 합의가 안 되는'동해'부분은 3판에 표시된 '일본해'를 그대로 사용하자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의장은 이 일본측 제안을 논의할 것인지 여부를 표결에 부쳤으나 일본 이외에는 단 한 나라의 지지도 받지 못함에 따라 이 안은 논의조차 되지 못하고 폐기되었다. 이는 IHO회원국들이 동해표기를 논의하는데 '일본해'가 단독 표기된 S-23 3판을 더 이상 기준으로 삼을 수 없다는 점을 명백히 한 것으로 해석된다. 따라서 일본은 '일본해'가 유일하게 IHO에서 승인받은 이름이라고 주장할 근거를 상실케 되었을 뿐 아니라, 이제 S-23 3판을 논의의 기초로 삼자고 주장할 수도 없게 되었다.
둘째, 단일 명칭 사용이라는 국내정책상 이유를 들어'동해'병기에 소극적 입장을 보여 왔던 미국과 영국이 일본의 제안을 지지하지 않은 것도 성과라면 성과라 할 수 있겠다. 미국과 영국은 IHO 내에 설치한 실무작업반 (Working Group)에서의 논의 과정에서, 동해병기에 소극적 입장을 보인 바 있으나, 이번 총회에서 일본측 제안을 지지하지 않음으로써 최소한 중립적 입장으로 선회하였다고 볼 수 있다. 미국도 회의 초반 1953년의 3판을 기준으로 합의되는 부분부터 고쳐 나가는 방안을 검토하였으나, 우리 대표단과의 사전 협의를 거쳐 한ㆍ일 양측간 합의를 촉구하는 선으로 입장을 정리하였다. 이는 그동안 동해병기의 정당성에 대한 우리 측의 지속적 설득이 있었던 데다 재미동포를 중심으로 최근 전개된 동해병기 노력이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셋째, 전자해도가 급격히 발전하는 현 상황을 감안해 S-23을 폐기하고 전자해도로 대체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물론 이러한 주장은 S-23 4판 발행이 계속 지연됨에 따른 불만감 표출의 일환인 면도 있지만, 전자해도의 보급이 활발해 지면서 종이해도의 비중이 그만큼 떨어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일면도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회의장 복도에서는 총회 개최기간 내내 각국의 홍보부스에서 해도전시회가 개최되었는데, 회의 마지막 날 해도전시회 평가에서 우리 해양조사원이 설치한 최첨단 전자해도 관리시스템이 당당히 최우수상을 차지하는 영광을 누렸다 (2위는 일본이, 3위는 프랑스가 차지). 물론 이 전시회 결과만 갖고 우리의 전자해도 기술이 최고라고 할 수는 없지만, 종이해도와 달리 전자해도는 정보기술(IT) 수준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만큼, 우리의 전자해도 관리시스템이 해도전시회에서 각국 대표단과 전문가의 주목을 받으며 최고상을 받은 것은 상당히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된다. 이를 계기로 전자해도 분야에서 우리나라가 국제수로기구를 선도해 나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
넷째, 최근 북한의 미사일 발사 이후 남북간 조성되고 있는 긴장관계에도 불구하고 동해표기 문제에 관한 한 IHO총회장 내에서는 남북 공조가 확실히 이루어 졌다는 점이다. 한국 대표단은 북한 대표단을 총회 개최 전에 만나 공조방안을 협의하였을 뿐 아니라, 회의기간 내내 긴밀한 협조관계를 유지함으로써, 동해병기의 정당성을 과시하며 일본을 압박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마지막으로, 이번 회의는 국제회의 의사규칙의 숙지 및 기민한 대응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다시 한 번 일깨워 준 회의였다. 일본이 IHO총회 의사규칙상 기권이 사실상 반대와 같은 효과를 가져 온다는 것을 알았다면, 한국 측의 반대와 다수의 기권이 예상되는 그러한 제안을 정식 안건으로 상정하였다가 논의조차 되지 못하고 폐기되는 수모를 겪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약 일본 측이 표결을 의도한 것이 아니었다면, 보다 적극적으로 표결 반대의사를 표명하든지, 아니면 표결을 연기한 후 자신의 제안을 철회하든지, 어떻게든 의사규칙을 잘 활용하여 보다 기민한 대응을 하였더라면 그와 같은 수모는 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조만간 다가올 전자해도 시대에도 철저히 대비하는 지혜를 발휘해야
많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제 18차 IHO총회는 막을 내렸다. 이번 IHO총회는 동해병기를 실현하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아쉬움이 있지만, 일본해가 단독 표기된 S-23 3판의 정당성을 상실토록 만들었을 뿐 아니라, 더 이상 일본해를 단독 표기한 S-23 발간을 못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다수 국가들이 한ㆍ일 간의 외교적 분란에 말려들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서 회의장내에서는 적극적 의사표현을 자제한 면이 있지만, 필자가 개별적으로 접촉한 대다수 외국 대표들은 일본의 완고한 태도에 답답해하면서 동해병기의 정당성에 아낌없는 지지를 표명하여 주었다. IHO내에서의 동해병기 실현은 다음 총회의 과제로 넘겨야겠지만, 우리는 국내외 시민단체 및 교민단체들과의 긴밀한 협조 하에 국제사회에서의 병기 노력을 지속적으로 추진하는 한편, 조만간 다가올 전자해도 시대에도 철저히대비하는 지혜를 발휘해야 할 것이다.
1) 국제회의에서 표결은 일반적으로'참석하여 투표한 (present and voting) 국가 수'를 기준으로 사안에 따라 단순 과반수 혹은 절대 과반수를 요하는데 반하여, IHO 총회는'참석(present)국가 수' 혹은 '회원국 수'를 기준으로 과반수 혹은 2/3의 찬성을 요함에 따라 기권은 반대와 동일한 효과를 가져 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