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uestion
최근 우리나라 대법원에서 일제징용 피해자의 개인청구권을 인정한 대법원의 판결이 나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전후(戰後) 한일관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받는 '대일강화조약 (Treaty of Peace with Japan, San Francisco Peace Treaty)'의 내용은 무엇인가?
Answer
'대일강화조약'이란 제2차 세계대전을 종결하기 위하여 일본과 48개의 연합국간에 서명한 평화조약으로, 1951년 9월 8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서명되었고 1952년 4월 28일 발효되었기에 다른 말로'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한다. '대일강화조약'에는 전문과 본문 27개조 외 두 개의 선언과 하나의 의정서가 부속되어 있다. 이 조약에는 일본의 전후처리를 둘러싼 일반적인 현안, 일본의 영토문제와 청구권의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과 교전관계에 있었던 연합국은 55개 국가였다. 그 중 소련 등 공산권 연합국(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은'대일강화조약'에 참가하였으나 조약의 내용에 반대하여 서명하지 않았다.
'대일강화조약'은 미국과 소련의 대립으로 인한 동서냉전 진영의 분열로 공산권 국가가 불참하면서 전면강화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배상, 어업, 통상 등은 2국간 교섭 및 협정으로 위임되는 등 불확정 요소가 많았다. 한국 또한 당시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이유로 영국과 일본의 반대에 의해 대일강화조약에 초대받지 못하였다. 그 결과, 한국과 일본의 전후 처리는 한일 양국간 14년이라는 장시간의 협상을 통해 1965년 이루어졌다. 일본정부는 전후처리는 현재 교섭이 중단된 북한을 제외하면 대일강화조약과 그 후 양국간 조약을 통해서 적어도 법률적인 면에서는 완전하고도 최종적으로 종결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일본의 전후처리 시비를 둘러싼 문제제기는 대일강화조약 이후에도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특히 일본군'위안부'문제에 대한 보상문제, 강제동원 문제 그리고 영토문제는 아시아 국가들의 불만을 상징하는 사건이 되었다. 어떻게 보면'과거의 문제'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살아있는 미해결 현안이 되었고, 적어도 한일관계에 있어서 이러한 과거사 문제는 중요한 변수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렇게 된 배경에는 세계가 정치적으로 분열된 냉전이라는 요소와 다수의 국가를 대상으로 조약을 체결하는데 한계가 존재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전쟁의 발발로 냉전이 격화되면서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역할강화가 필요한 당시 정치적 상황이 미국으로 하여금 전승국간의 신속한 교섭 및 일본과의 조약 체결을 정책적으로 최우선의 과제로 인식하게 되었다. 그 결과 논란의 여지가 많은 사안들은 조약문 자체에서 명시하지 않는 방향으로 문안을 작성하게 되었다. 결국 이러한 결정들이 전후 여러 가지 문제를 제공하는 단초가 되었다.
과거에 체결된 이러한 조약들이 남긴 문제를 현재에 살고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슬기롭게 해결해 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는 현재 사람들의 몫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