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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일본이여, 이제 그만합시다 : 최근의 독도문제를 보면서
  • 김병렬 | 국방대 교수

지난 8월 10일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방문과 뒤이은 일왕 관련 언급으로 한일관계가 수교 이후 최대 격랑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급기야 일본은 무토 마사토시(武藤正敏) 주한 일본대사를 소환하고, 독도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ICJ, International Court of Justice)에 의뢰하자고 형식적으로 제의하고는 당연한 우리의 거부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단독으로 제소하겠다고 후지무라 오사무(藤村修) 관방장관을 시켜 공식 발표토록 했다. 그리고는 한일 정상간 셔틀외교 및 한일 재무장관회담 중단, 한일 통화교환(스와프) 협정 중단 검토에 이어 우리나라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비상임이사국 출마마저 훼방 놓겠다는 의사를 강력하게 흘리고 있다.
수년전 시마네현에서 2월 22일을 '다케시마의 날'로 정하더니, 서울 한복판에서 다카노 도시유키(高野紀元) 주한 일본대사라는 사람이 독도는 역사적으로나 국제법적으로 일본 땅이라고 하는 망언을 하여 온 국민의 분노를 자아냈는가 하면, 초중고 교과서에 이어 외교청서 및 방위백서에 까지 독도는 일본땅이라고 명기를 한 것만으로도 모자라 이제는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방문을 빌미로 벌떼 같이 들고 일어난 것이다.

독도문제의 어제와 오늘

생각해 보면 독도문제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길게는 극심했던 왜구들의 침탈을 우려하여 울릉도에서 우리 백성들을 육지로 데리고 나온 이후, 빈 섬이 된 울릉도로 일본의 어부들이 몰래 고기를 잡으러 드나들던 17세기에 야기된 문제이니 300년 이상 된 문제이고, 짧게는 일본이 러일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함대를 감시하기 위한 군사적 필요성에 의해 독도를 편입이라는 이름으로 강탈했던 1905년 이후로만 해도 100년 이상 된 문제이다.
이러한 독도문제는 1696년에 있었던 안용복의 도일활동을 계기로 도쿠가와 막부에서 일본 어부들의 울릉도와 독도 주변에서의 어로활동을 금지시키게 된 후, 1877년에 일본의 태정관 우대신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가 이를 다시 확인하고는 “울릉도와 독도에 대하여 일본은 관계가 없다는 것을 명심할 것”이라고 하면서, 차후 일본 정부에서 제작하는 모든 지도에 두 섬을 포함시켜서는 안 된다고 못을 박음으로써 완전히 끝났던 문제이다.
이처럼 완전히 끝났던 문제가 일본의 러일전쟁 도발로 인해 재연된 것이다. 러시아의 강력한 해군력에 일본 해군이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되자 러시아 해군의 움직임을 조기에 파악할 목적으로 울릉도와 독도에 망루를 건설하기 위한 망루터를 징발하게 된다. 이 때 사람이 살고 있었던 울릉도에서는 할 수 없이 망루터 만을 세군데 징발하였지만, 사람이 살고 있지 않았던 독도는 망루터 만이 아니라 섬을 통째로 편입함으로써 다시 문제가 된 것이다.
이 때 일본은 울릉도뿐만 아니라 한반도 내 전체에서 전쟁을 위한 군용지를 무단으로 징발하였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항의를 하거나 순순히 응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무자비하게 학살을 자행했다. 이처럼 알았다고 하더라도 항의를 할수 없는 공포상황을 조성해 놓고도 정작 독도는 편입사실이 외부로 알려지는 것을 우려하여 비밀리에 편입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당시 독도는 군사적인 요충지였던 것이다.
그러고도 항의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들의 편입이 국제법적으로 정당하다는 후안무치한 주장을 해오더니 이제는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방문을 자신들의 영토권 침해라고 적반하장격인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ICJ 단독제소와 야스쿠니신사 참배는 제국주의적 망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행동

이러한 일본의 주장에 대해 이미 많은 양심적인 일본의 학자들이 비난을 한 바 있는데, 나이토 세이츄(內藤正中) 교수 같은 사람은 심지어 “주인이 없는 집에 들어가서 귀중품을 몰래 가지고 나온 후 자기의 것이라고 하는 주장과 같이 부끄러운 짓”이라고 일갈한 바 있다.
혹여 항의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국제사법재판소가 일본의 손을 들어 줄 것이라는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태국의 무항의를 이유로 캄보디아의 손을 들어주었던 '프레아 비헤아사원(Temple of Preah Vihear) 사건'은 사실 여부보다도 제국주의적 법리만을 중시한 잘못된 판결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으며, 그 결과 판결이 내려진지 50년이 가까워 오지만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 더군다나 독도 침탈은 프레아 비헤아사원사건과는 달리 항의를 하지 못하도록 미리 외교권을 빼앗은 이후에야 슬며시 알게 하지 않았는가.
외신에 의하면 이번 사태를 계기로 일본의 각료와 정치인 50여명이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를 참배했다고 한다. 생각해 볼 때, 한국의 국립묘지와 일본의 야스쿠니신사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한국의 국립묘지는 외세가 한국을 침략할 때 이에 맞서 싸우다 순국하신 분들을 모신 곳이고, 일본의 야스쿠니 신사는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 등을 일으켰을 때 이를 기획하고 계획하고 수행했던 전범들을 기리는 곳이다. 이곳을 참배한다는 것은 침략으로 점철된 부끄러운 과거사를 반성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과거 한국을 식민지 지배하던 때를 회상하면서 침략의 의지를 다지자는 의미가 아니고 무엇인가.
결국 국제사법재판소에 단독으로 제소를 하겠다는 것이나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는 것이나 과거의 제국주의적 망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치졸한 행동일 뿐이다.

일본은 스스로 과거를 반성하고 공존공영의 길로 나아가야

이명박 대통령이 독도를 방문한 것은 일본이 힘이 없다고 간주하여 일본 땅인 독도를 침략한 것이 아니다. 한국 땅인 독도를 한국의 국가 원수가 당연히 그리고 단순히 방문한 것이다. 신문에서 대서특필할 필요도 없는 일이고, 힘이 없기 때문에 일본이 당하는 것이라고 스스로 자괴하면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거나 국제사법재판소가 일본의 손을 들어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 속에서 단독으로 제소할 필요는 더더욱 없는 행위이다.
세계는 지금 불행했던 과거와 이념의 족쇄에서 벗어나 공존공영의 길로 달려 나가고 있다.
특히 한국과 일본은 태평양시대의 주역으로서 경제협력은 물론이고 공동의 위협이 되는 북한의 핵개발을 막기 위한 지역 안보협력, 그리고 중국의 패권주의적 경향에 대한 공동대응 등 손잡고 해결해야 할 일들이 많다.
과거사를 슬기롭게 정리하고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피해국보다 가해국의 사실 인정과 반성이 선행돼야 한다. 그런데도 일본은 스스로 과거를 반성하고 이웃에 공존공영의 길로 가자고 손을 내미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과거를 반성한 후 공존공영의 길로 가자고 하는 이웃의 손을 뿌리치려 하고 있다. 일본은 직접 피해 당사국도 아닌 미국이 일본군 '위안부' 결의안을 채택한 이유를 곱씹어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