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역사재단 NORTHEAST ASIAN HISTORY FOUNDATION 로고 동북아역사재단 NORTHEAST ASIAN HISTORY FOUNDATION 로고 뉴스레터

역사인물
이승휴의 역사의식과 역사관
  • 정구복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제왕운기》 목판본(삼성출판박물관 소장,
보물 제 1091-1호)

이승휴(1224~1300년)는 고려 무신집권기 말기에 태어나 왕정체제가 복구된 원종(1260~1274년)과 원나라의 첫 부마가 된 충렬왕(1274~1308년) 시기에 활동한 문신관료다. 29세에 과거에 합격하였으나 관직을 받은 것은 41세 때였다. 이후 10여 년 간강직한 성품으로 비리를 척결하다가 모함을 받아 좌천되기도 하였고, 때로는 왕의 뜻에 거슬리는 정책을 진언하였다가 파면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가 관직에 처음 나갈 때는 무신집권 말기여서 행정이 부패하였고, 몽골족이 침입하여 국토가 유린당하고 민생이 도탄에 빠진 상황이었다. 강화도에서 무신정권이 대몽항전을 포기하고 개경으로 환도한 원종 대에는 삼별초가 반란을 일으켜 이를 진압하는 전투를 몽골군과 함께 14년 동안이나 치렀다. 원종은 몽골과 화해하였으나 고려에서는 많은 조공과 여자를 바쳐야했고, 전국의 중요한 도시에 원나라가 임명한 다루가치를 보내 내정을 간섭하고 수탈을 자행하였다.

원의 부마국이 된 고려의 현실

원나라는 일본을 정벌한다는 명분으로 원종 15년 고려에서 대소 선박 900척을 5개월 안에 만들게 했다. 1차 일본 원정 때는 몽한군(蒙漢軍) 2만 5천 명이 고려에 몰려오고 고려에서도 1만 5천 명의 군대를 동원해야 했다. 원나라는 고려에 정동행성을 설치하여 고려를 직속령으로 만들 계획을 세우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일본 원정은 두 차례 행해졌으나 모두 태풍으로 실패했다. 이를 위해 설치한 정동행성은 고려의 국정을 간섭하는 기구로 잔존했다. 당시 국가의 운명을 예측하기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부원세력배의 전횡으로 문신들이 제대로 역할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 시기 원나라 군대와 사신이 고려에 자주 왕래하였고, 고려측에서도 사신 파견이 잦았다. 시를 잘 짓기로 명성이 난 이승휴는 서장관이 되어 육로를 통해 두 차례 원나라 수도인 베이징(北京)에 다녀왔다. 이는 국제 감각을 넓히는 계기였다. 서장관은 현지에서 정사가 외교적으로 대응하는 글을 짓고 문사(文士) 참모 임무를 수행하는 중요한 직책이었다. 한번은 1273년(원종 14) 2월에 원나라 세조의 황후와 황태자 책봉을 축하하기 위해 파견된 사신을 따라갔다 왔고, 또 한 번은 원종이 죽자 이를 원나라에 알리는 사신의 서장관으로 갔다 왔다.

원종의 태자인, 후일 충렬왕은 2년 간 원나라에 가 있었고 원종 15년에 원세조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였다. 이승휴는 원나라에서 충렬왕의 장례를 고려식으로 거행할 것을 제의하여 이를 주도하였고, 원나라 수도에서 왕위에 오른 충렬왕을 모시고 돌아왔다. 그는 충렬왕을 중흥의 군주로 만드려는 강렬한 의지가 있었으나 왕은 문신을 좋아하지 않아 그의 뜻을 충실하게 따르지 않았다.

《제왕운기》를 지어 고려왕조의 앞날을 모색하다

이승휴는 관직을 포기하고 고향인 삼척 두타산으로 들어가 칩거하면서 문신으로서 왕과 국가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우리나라와 중국의 역사를 쓰는 것이라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유명한 《제왕운기(帝王韻紀)》를 지어 충렬왕에게 바쳤다. 그가 이를 세번이나 교정한 끝에 간행한 점으로 보아 가장 심혈을 기울인 저서였음을 알 수 있다. 《제왕운기》에서 '제(帝)'는 중원의 지배자이고 '왕(王)'은 우리나라의 통치자를 칭한다.

《제왕운기》는 두 권짜리 시로 지어졌으니 오늘날로 치면 노래 가사인 셈이다. 상권은 중원에 세워진 국가들의 역사를 지구의 형성부터 역대제왕이 이어져 온 과정을 2,370자로 지었고, 하권은 우리나라의 역사와 고려왕조의 역사를 읊은 노래로 2,170 글자로 구성되어 있다. 시를 운에 맞춰 지은 것은 리듬을 따라 많은 사람들이 부르기 쉽게 한 것이다.

그는 왕에게 왕조를 지켜야할 정신적 힘을 실어주기 위해 우리나라의 지리적 특성, 역사적 특성을 노래했다. 지리적 특성으로는 그 첫 머리에 요하 이동은 중원과 구별되는 다른 하나의 천하이고 우뚝 서서 중조국가와 구별됨을 선언했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이고 한쪽이 대륙에 맞닿아 있다고 했다. 바다는 거센 파도가 친다고 하여 해외로 진출하기에 유리한 이점보다는 외적을 막아주는 자연적 요새로 이해했다. 조선은 사방이 천리에 달하는 국가로, 하늘이 준 강산의 형세가 이름난 곳이며, 경제 자립을 해왔고 집집마다 예의를 닦아 중국인이 소중화라고 칭한다고 했다.

역사적 특성으로 우리나라 여러 왕조는 하늘에서 내려온 천손족의 후예가 세운 것이라는 점과 장구한 역사를 가졌다는 점을 들었다. 우리나라의 개국시조는 제석천황의 손자인 단군이 중국 요임금 원년에 개국하였고 이후 환인의 후손은 164명이나 되는 어진 부자로 이어져 왔다고 했다. 부여와 고구려, 신라의 건국자가 모두 천손족으로 단군의 후손이라고 강조했다. 그가 보기에 오랫동안 이어진 역사는 원나라와 비교해볼 때 매우 자랑스러운 것이었다. 우리나라 각국의 시조가 천손족이라는 것은 고대 천도(天道)사상의 부활을 의미한다.

우리나라 역사의 계승관계를 밝히면서 당시 원나라와 공존해야 하는 상황에서 중원 국가의 역사를 서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요컨대 그의 역사의식은 원나라와 공존하면서 고려왕조를 유지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하여 지리적, 역사적 특성과 줄거리를 노래로 지어 나타냈다. 그에게 자주성을 운위하는 것은 당시의 상황을 경시한 판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는 가사 중간에 주를 달아 역사적 내용을 보충하였다. 그의 역사관은 교훈을 주려고 한 실용적인 유교사관이면서도 전통적 역사관을 지니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제왕운기》에서 단군의 개국연대는 일연의 《삼국유사》와 다르다. 조선왕조가 편찬한 《동국통감》, 《동사강목》 등에서 《제왕운기》의 설을 채택하였다. 또 이 자료는 19세기 말 근대민족주의를 거치면서 우리민족이 단군의 후손인 배달민족이라는 설을 제기하고, 광복 후에 단기를 설정하는 근거가 되었다. 여기에 옛 국가의 시조가 천손족이라는 설은 애국가에 '하느님이 보우하사'로 반영되는 데 일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