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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Q&A
왕릉을 지키는 사람들, 고구려 수묘인
  • 김현숙 동북아·독도 교육연수원 책임연구위원
태왕릉 전경

보수묘인(守墓人)은 한자 뜻 그대로 묘지기를 말한다. 죽은 이의 유택인 묘를 지키고 관리하고, 청소와 제사준비도 맡아 했던 사람들을 가리킨다. 역대 왕들의 왕릉에 인력을 배치하여 관리하는 제도는 대부분의 나라에 있었다. 고구려나 신라의 경우, 왕이나 고위 귀족이 죽은 후 그 무덤에 수묘인을 배치하였다는 기사가 《삼국사기》에 나온다. 또 이 일을 관장했던 관청으로 짐작되는 '능색전(陵色典)'도 나온다. 하지만 왕릉 관리의 실제 내용이나 법령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사료는 없다.

이에 대한 내용은 광개토왕비와 지안(集安)고구려비에 나온다. 두 비석에는 고구려 왕릉 수묘인의 구성, 성격, 인원, 차출지역, 광개토왕과 장수왕대 왕릉 수묘에 발생한 문제점과 그것을 고쳐 안전하게 왕릉관리를 하고자 했던 두 왕의 노력, 관련 법령 제정과 시행 등 다양한 내용이 담겨 있다. 또, 고구려 최전성기에 해당하는 당시에도 왕릉 수묘에 문제가 발생했고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어느 사료에도 나오지 않는 당대의 사회사·정치사의 숨겨진 부분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추측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왜 수릉인(守陵人)이 아니고 수묘인인가?

왕릉을 지키는 사람들은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도 있었다. 조선시대 능참봉(陵參奉)에 관해서는 사도세자 무덤을 지키던 능참봉 설화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다. 품계가 종9품인 능참봉은 여러 수릉인을 거느리고 그들을 지휘하여 능을 관리하는 책임을 졌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의문점이 떠오른다. 조선시대에는 선대왕과 왕비의 능은 '수릉군'이라 했고, 왕비 부모의 묘를 지키는 수묘군(守墓軍)이라고 했다. 일반인들의 무덤을 지키는 사람들은 '묘지기', 즉 수묘인이라고 했다. 그런데 왜 고구려 왕릉을 지킨 사람들은 '수릉인'이라 하지 않고 '수묘인'이라고 했을까? 고구려왕의 존엄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무덤을 능이 아닌, 묘라고 했던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4〜5세기 당시 고구려왕들은 자신들이 하늘의 자손이라 자부했다. 태왕, 호태왕, 성태왕(聖太王), 호태성왕이란 극존칭을 사용하고 독자 연호를 사용한 시기였다. 따라서 이들이 선조 왕들의 무덤을 낮춰서 묘라 하고, 그곳을 지키는 사람들을 수묘인이라 칭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때에는 능과 묘를 구분하지 않았다. 광개토왕비와 근접한 곳에 있어 많은 학자들이 광개토왕릉이라 보고 있는 대형 적석총인 태왕릉에서는 "원태왕릉안여산고여악(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전돌이 여러 장 나왔다. 여기에는 '태왕묘'가 아닌 '태왕릉'이라 새겨져 있다. 전돌에는 '왕릉'이라 쓰고, 광개토왕비와 집안고구려비에는 '수묘'라고 한 것을 보면, 능과 묘를 엄격하게 구분해서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광개토왕비에 나오는 수묘인들은 어디에서 왔나?

'광개토왕비'에 따르면, 5세기 당시 고구려 수묘인은 구민(舊民)과 신래한예(新來韓穢)라 불린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이 비에는 이들이 어느 지역에서 몇 집이 차출되었는지까지 일일이 적혀 있다. 그 지역을 분석해보면 구민은 광개토왕 이전 대에 고구려에 편입된 변경 지역 출신이고, 신래한예는 대부분 광개토왕이 정복한 한강 이북 백제 지역에서 차출해온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신구 수묘인 모두 고구려의 복속민 출신인것이다.

수묘인은 연호(烟戶), 호(戶), 가(家)라는 단위로 헤아려졌다. 이는 수묘인이 가족 단위로 차출되고 운영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고대시기에 1호 평균 인원을 5명으로 보고 있으므로 광개토왕비에 나오는 330가의 수묘연호는 1,500명이 넘는다. 고구려 왕릉 수묘인은 시간이 흐를수록 증가했을 것이다. 따라서 이들에 대한 관리문제는 이후에도 계속 관심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수묘인과 수묘제를 둘러싼 학계의 논란

태왕릉과 천추총의 무너진 돌무지에서 발견된
전돌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고구려의 수묘인과 수묘제에 관해서는 지안고구려비 발견 이후 학계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광개토왕비에 의하면 장수왕은 구민과 신래한예 수묘인을 1:2의 비율로 차출했다. 총 330가인 수묘인의 내부 구성을 보면, 국연이 30가, 간연이 300가로서 1:10의 비율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구성을 통해 아마도 국연이 주가 되어 수묘를 책임졌고, 간연이 그를 보좌하여 청소 등을 담당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국연은 근교를 포함한 도시와 도읍에 거주하는 사람들로 주로 수공업생산과 가공에 종사하던 자들이고 간연은 심산유곡에 거주하는, 농업과 어렵생산을 영위하던 자들이라고 보거나, 국연은 부유하여 수묘역 한 몫을 감당할 수 있는 자들이고 간연은 10인이 합쳐 한 몫을 하는 자들이라고 보는 학자도 있다. 또 국연은 국강상(國罡上)에서 수묘역을 수행했고 간연은 제3지역이나 원거주지에서 수묘역 수행에 필요한 제반 경비를 조달했다고 보는 연구자도 있고, 국연은 광개토왕릉에 배치된 연호이고, 간연은 다른 왕릉들에 배치된 연호였다고 보는 설도 있다. 직접 왕릉에 와서 왕릉을 지키는 수묘인은 국연, 예비수묘인은 간연으로 보는 설도 있다.

한편 지안고구려비에서는 연호두(烟戶頭)가 처음으로 나온다. 이에 대해서는 개별 왕릉에 배치된 수묘연호 20가의 호주, 혹은 장(長), 대표자로 보는 설, 국연의 호주라고 보는 설, 기층관리자이면서 동시에 일상적인 제사와 청소 활동의 조직자였다고 본설로 나누어져 있다.

이 외에 수묘연호의 노역조 편성과 수묘역의 수행방식, 330가의 수묘연호가 관리한 능, 수묘인의 신분, 수묘제의 제도적 정비, 광개토왕비문에 나오는 매매의 대상 등에 대해서도 학계에서 논쟁이 되고 있다. 수묘인을 둘러싼 논의는 정설을 확정해줄 제3의 자료가 출현하거나 지금까지의 논란을 잠재울 정도의 완벽한 논증이 제시되지 않는 한 앞으로도 한동안 계속 활발하게 진행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