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4년은 광개토왕비가 건립된 지 1600주년이 되는 해였다. 광개토왕비 비문에는 414년 9월 29일에 산릉을 조성하고 왕의 훈적을 기리는 비를 세워 후세에 전하고자 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2014년은 공교롭게도 9월이 윤달이어서 비가 세워진 날(양력 10월 22일, 11월 21일)이 한 달 차이로 반복되었다. 이에 동북아역사재단은 이를 기념하기 위한 '광개토왕비 건립 1600주년 국제학술회의'를 두 번에 걸쳐 개최하였다.
첫 번째 학술회의는 동북아역사재단과 중국사회과학원이 공동으로 주최하여 10월 20일부터 22일까지 광개토왕비가 있는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集安)에서 개최되었다. 개막식에서 동북아역사재단 김학준 이사장은 한국사에서 고구려사가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하고, 광개토왕 시대에 치른 전쟁과 정복 기사뿐 만 아니라 주변 국가들과 평화와 상생하는 기록이 있는지도 함께 검토할 것을 주문하였다. 중국사회과학원 우인(武寅) 전 부원장은 축사에서 광개토왕비 연구를 심화하기 위하여 각국 학자들 공동으로 노력할 필요가 있고, 그런 의미에서 이번 회의는 매우 의미가 크다고 강조하며 향후 교류와 협력을 위한 좋은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광개토왕비의 다각적 연구 결과 공유
학술회의에는 남·북한, 중국, 일본에서 학자들이 대거 참석하여 논문 30편을 발표하였다. 이틀간 모두 6개 세션으로 나누어 광개토왕비 연구, 고구려의 석각 사료 연구, 고구려 사상의 광개토왕시대 그리고 최근 고구려 고고학 성과와 연구 등에 관한 발표와 토론이 이어졌다.
주요 발표 내용을 보면 광개토왕비문의 쟁점기사, 광개토왕비를 통해 본 고구려의 역사적 지위, 지안고구려비의 관계, 북방 경략 기사, 신래한예, 시조 전설, 건국신화, 황룡과 고구려 초기역사, 광개토왕의 군사 전략 등을 고찰하였다. 또 최근 중국과 일본에서 발견된 탁본 자료, 논란이 일고 있는 글자의 판독, 수묘제도, 지방통치, 평양천도, 삼국관계, 고구려와 후연의 대외관계를 비롯하여 중국과 한반도 지역에서 발견된 고구려 유적들 소개까지 심도 있는 토론이 이루어졌다. 마지막 날에는 참가한 학자들이 함께 광개토왕비를 비롯하여 국내성, 고분 및 벽화, 산성 유적 등을 공동으로 답사하였다.
두 번째 학술회의는 11월 19일부터 21일까지 동북아역사재단 대회의실에서 열렸다. 중국 지안 개최에 이어 재단이 한국고대사학회(회장 임기환), 고구려발해학회(회장 공석구)와 공동으로 주최한 학술대회였다. 모두 4개 세션으로 구성하여 1·2부에서 광개토왕비 탁본 탐색, 3부에서는 광개토왕비의 텍스트 성격 검토, 4부에서는 광개토왕비와 주변 지역 석비와 기념물 비교를 주제로 10편의 논고를 발표하며 중국 지안 학술회의에 이어 다시 한 번 광개토왕비를 다각도로 조명하였다.
첫째 날은 중국 연변대학의 박진석 교수의 기조발표를 시작으로 논문 4편을 발표하였다. 박진석 교수는 후배 학자들에게 엄격한 학문적 태도를 당부하며 100여 년 전 요코이 다다나오(橫井忠直)가 했던 이른바 광개토왕비 신묘년 기사 해석은 당시 일본 군국주의가 한반도와 중국 대륙을 침략하려는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저지른 엄중한 왜곡이었다고 지적하였다. 중국사회과학원의 쉬젠신(徐建新) 교수는 광개토왕비 발견과 초기 탁본 제작에 관한 새로운 자료인 이초경의 《요좌일기(遼左日記)》를 면밀하게 검토하였다. 중국 퉁화(通化)사범학원 겅테화(耿鐵華) 교수는 최근 발견한 퉁화시박물관에 소장 중인 광개토왕비 탁본을 소개하였다. 부산박물관 백승옥 학예실장은 국내에서 최근 발견한 광개토왕비 원석 탁본인 '혜정본'을 소개하였다. 필자는 비문 중에서 이견이 있는 글자들을 중심으로 석문을 검토하고 원석탁본 등을 통하여 새로운 석문을 시도하였다. 종합 토론에서는 서울대 노태돈 교수의 사회로 광개토왕비 연구의 원로 학자들이 참여하여 열띤 토론을 진행하였다. 참가한 학자들은 최근 원석탁본들이 증가하고 있는 상황에서 디지털기술 등을 활용하여 자료를 정리하고 과학적인 현장 조사를 병행한다면 새롭게 판독되는 글자들이 더 늘어날 것이며 재단의 적극적인 역할을 강조하였다.
둘째 날에는 논문 6편이 발표되었다. 이노우에 나오키(井上直樹) 도쿄부립대 교수는 근대 일본의 광개토왕비 해석과 고구려왕계를 주제로 발표하였고, 한성대 정호섭 교수는 광개토왕비와 지안고구려비를 비교·검토하였다. 한국외대 여호규 교수는 광개토왕비의 건국설화와 왕위계승에 관한 기사를 통해 고구려가 구축한 독자적 천하관의 이념적 기반을 구체적으로 파악하였다. 최진열 카톨릭대 교수는 위진남북조의 석비와 기념물과 광개토왕비를 비교하여 광개토왕비만의 특징을 고찰하였다. 우석대 조법종 교수는 주변 유목 국가의 석비·기념물과 비교한 뒤 광개토왕비는 중국적 이면석(二面碑) 형식과는 다른 사면석(四面碑) 전통을 세운 것으로 새로운 입비 문화를 상징한다고 주장하였다. 동북아역사재단 김현숙 연구위원은 김육불(金毓黻)의 광개토태왕비 연구라는 논고에서 고구려사를 포함한 중국 동북지역사에 관한 김육불의 인식은 일본의 만선사관에 대응하려는 목적의식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다고 보았다.
21일에는 고구려 최남단의 아차산 보루 유적, 한성백제박물관, 몽촌토성, 석촌동 고분군 등을 돌아보며 광개토왕비 건립 1600주년을 기념하는 국제학술회의의 대미를 장식하였다.
남·북한, 중국, 일본 학자들과의 교류에 도움
이상 두 번에 걸친 광개토왕비 건립 1600주년 기념 국제학술회의는 광개토왕과 그 시대를 증언하는 기록인 비를 주제로하여 남·북한, 중국, 일본의 전문가들이 공식적으로 처음 모인 자리라는 점에서 학술사적 의의가 크다. 또 국내는 물론 국제 사회에 고구려의 역사와 문화를 환기시키고 동아시아사에서 그 위치를 확고히 하였다. 2008년 이후 중단되었던 중국과 한·중 역사문제를 논의하는 학술교류를 재개하였다는 의미도 있다. 재단은 이러한 학술회의를 계기로 중국과의 역사 갈등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대화와 협력을 적극 추진하고 남·북 역사학계의 교류 협력 방안도 적극 모색해 나갈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