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한 해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 120주년을 맞이하여 국내외에서 각종 학회와 심포지엄이 여러 차례 열렸다. 특히 재단과 한국사연구회가 공동으로 주최한 "동학과 청일전쟁 120주년 기념 학술회의"는 그동안 국내외 학계의 연구 성과를 총망라하여 100주년 이후 새로 발굴한 청일전쟁 사료를 통해 일본의 침략과 민중의 저항에 관련된 실증적 연구를 심화시키고자 기획하였다. 이는 21세기 동아시아 질서의 재편이라는 시각으로 한·중·일이 각국의 근대사를 재조명하면서 바람직한 동아시아 삼국의 국제관계 해결 방안을 모색하는 소통의 자리를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회의는 신영우 한국사연구회 회장의 개회사, 김학준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의 축사에 이어 한국·대만·일본의 학자 15명이 참여하는 가운데 7개의 발표와 토론으로 진행하였다.
동아시아 각국의 청일전쟁, 동학혁명 연구 성과 공유
제1부에서는 '조청일전쟁의 이해'를 주제로, 대만사범대학 우원싱(吳文星) 교수가 '전후 대만에서 청일전쟁과 대만할양에 관한 연구', 원광대 강효숙 교수는 '동학농민전쟁과 조청일전쟁', 성균관대 배항섭 교수는 '동학농민군의 외세 인식'을 각각 발표하여 일본 제국주의 침략 비판과 한·중·일 세 나라 국제 관계 관점과 역사상을 검토하였다. 특히 우원싱 교수는 '대만민주국'의 대만할양 반대운동을 대상으로 전후 대만사학계의 연구 개황을 소개했는데 일본이 대만을 화남(華南)과 남양(南洋)을 침략하기 위한 근거지로 설정하였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당시 담판대표 이홍장이 중국을 보호하는 데 전력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이 대만 할양을 요구하자 이를 수용했다는 것이다. 대만민주국의 대만할양반대운동은 비록 영도자들이 계속 도망가거나 협력하지 않았고 의군의 전투의지와 전력은 일본군에 뒤떨어졌으며 제때 외부원조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5개월 정도 유지하다가 실패·와해되었지만 대만인의 공동의식을 환기시켰을 뿐만 아니라 총독부 당국이 특수한 통치정책과 제도를 제정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했다.
이어서 제2부와 3부에서는 '동학농민혁명 실증연구 및 새 자료와 조사보고'를 주제로, 홋카이도(北海道)대학 이노우에 가츠오(井上勝生) 교수가 '일본군, 동학농민군 섬멸작전의 사실', 연세대 왕현종 교수가 '1894년 농민전쟁 지도자의 재판투쟁과 정세 인식', 충북대 신영우 교수는 '양호도순무영과 《갑오군정실기(甲午軍政實記)》', 일본 코리아 협회·에히메(愛媛) 야나세 가즈히데(柳瀨一秀) 교수는 '일본군 후비보병 제19대대에 관한 '일본 코리아협회·에히메'의 조사'를 발표하여 농민들의 개혁 요구와 전략과 더불어 청일전쟁을 통한 일본군의 동학농민군 탄압에 대한 실상을 규명하였다.
이 가운데 이노우에 가츠오 교수는 최근 일본 학계에서도 청일전쟁시 군부 독주나 급진책을 지적하고 우려하였음을 당시 문헌 사료 고증으로 밝혔다. 예를 들면 카가와(香川)현의 지방신문, 《카가와신보(香川新報)》는 1894년 12월 19일부터 23일까지 게재된 '조선의 개혁'이라는 사설에는 일본정부와 군부의 동학농민군섬멸작전을 비판하였고, 1894년과 1895년 동학농민군 섬멸작전 중이던 당시 작전상황이 '대본영 게시'로 공시되었으며 신문이나 당시 잡지에도 실렸다는 것을 공개하였다.
최초의 《갑오군정실기》 연구 큰 성과
마지막으로 이번 회의에서 신영우 교수는 《갑오군정실기》를 연구하여 그 성과를 '양호도순무영과 《갑오군정실기》' 논문으로 처음 공개하였다. 신영우 교수는 이 논문에서 양호도순무영은 1894년 9월 조선 정부가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95일간 설치했던 최고 군사지휘부라고 밝혔다. 양호도순무사 신정희와 도순무영 선봉장 이규태는 일본공사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와 일본군 진압군인 후비보병 제19대대 장교들과 협력하지않아 12월 27일 양호도순무영은 갑자기 폐지되었고, 도순무영 활동기록인 《갑오군정실기》는 잔무 정리자가 작성했지만 그 존재조차 알 수 없게 되었다. 즉 일본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조선에서 반출해간 귀중도서 속에 포함된 유일본 중 하나가 《갑오군정실기》 10책이다.
그러다가 2011년 환수한 일본 궁내청 소재 조선왕조 도서에서 이 책을 확인했고, 양호도순무영의 실체를 소개하는 내용을 발표한다. 이를 계기로 신영우 교수는 양호도순무영은 서울시청에 해당하는 한성부에 설치되었고, 도순무영에 소속되어 활동한 인원은 도순무사 신정희를 포함하여 총원이 526명이었음을 실증했다. 양호도순무영은 서울에 병영을 둔 경군(京軍) 전체를 동원해서 도순무영을 설치하고, 통위영, 장위영, 경리청 소속 병사를 출진시켜서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도록 했는데, 출진장졸의 규모는 ①좌선봉인 통위영 영관 이규태가 지휘한 좌선봉 402명, ②우선봉인 장위영 영관 이두황이 지휘한 381명, ③장위영 영관 원세록이 지휘한 351명, ⑤경리청 영관 홍운섭이 지휘한 358명, ⑥경리청 영관 겸 서산군수 성하영이 지휘한 370명, ⑦교도대 영관 이진호가 지휘한 255명, ⑧ 장위영 교장 원봉석이 지휘한 천안방수군 36명, ⑨강화도의 진무영 중군 황헌주가 지휘해 전주성을 수성한 327명 ⑩ 일본군 후비보병 제19대대 파견과 충청도 전라도 파견 등 21명으로 모두 2,501명이 기재되었음을 최초로 공개했다.
이번 회의에서 발표된 논문들은 기존 학계가 실증 연구를 어떻게 심화해 나갈지에 관해 일종의 방향과 기조를 제시하였다. 재단은 21세기 동북아시아의 긴장관계를 해소하고 앞으로 바람직한 동아시아 선린관계를 형성하기 위한 역사적 교훈과 미래적 전망을 창출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