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역사재단 NORTHEAST ASIAN HISTORY FOUNDATION 로고 동북아역사재단 NORTHEAST ASIAN HISTORY FOUNDATION 로고 뉴스레터

기고
공식 기록에서 사라진 일제 탄압의 실상 우쓰노미야 다로의 일기
  • 글 장세윤 (독도연구소 2팀장)
우쓰노미야 다로

일본은 1910년 8월 대한제국을 강제로 병합한 후 식민지 통치기관으로 조선총독부를 설치하고 이른바 '무단통치'를 실시하며 저항세력을 탄압하고 가혹한 수탈을 자행하였다. 동시에 일본 식민 당국은 자신의 식민지 통치를 선전·미화하고 한국인들의 저항의식을 말살하기 위해 여러 언론기관을 설치하여 운영하였다. 즉 일본어 신문으로 〈경성일보(京城日報)〉, 한국어 신문으로 〈매일신보(每日申報)〉, 영어 신문으로 〈서울 프레스(The Seoul Press)〉를 각각 발행한 것이다. 3개 기관지는 1910년 8월부터 통합과 분리과정을 거쳐 일본의 식민 통치를 선전·홍보하고, 전쟁 동원을 위한 나팔수가 되었으며, 일본의 여러 침략전쟁을 정당화하는 논조를 폈다.

일본 당국이 이처럼 사실을 왜곡하고 그들의 통치를 합법화한 사례는 많다. 따라서 우리가 일본(정부)의 왜곡 주장을 비판반박하기 위해서는 공식 관변자료 외에도 개인의 일기나 편지, 회고록, 증언 등 다양한 자료를 발굴, 활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좋은 사례로 최근 발굴·공개된 '조선군' 사령관 우쓰노미야 다로(宇都宮太郞, 1861~1922)가 남긴 일기를 들 수 있다. '조선군' 이란 일본이 식민지 '조선'지배를 위해 주둔시킨 일본 육군을 말한다.

우쓰노미야 다로는 1861년 일본 규슈 서북단 사가현(佐賀縣)에서 태어났다. 1890년 육군대학을 졸업하고 승승장구한 그는 1894년 청일전쟁 당시에는 일본 대본영 육군 참모로서, 1905년 러일전쟁 무렵에는 육군 대좌로서 참모본부에서 근무하였다. 그 뒤 1918년 7월 '조선군 사령관'으로 영전하게 되었다. 이후 1920년 8월까지 2년 1개월 동안 조선군 사령관으로 식민지 조선에서 조선총독과 함께 막강한 권한을 행사한다. 특히 그는 1919년 3·1운동 탄압 등의 공을 인정받아 그 해 11월 육군대장으로 진급하는 영예를 누렸다. 이듬해 8월 조선군 사령관에서 일본 육군 군사참의관(軍事參議官)으로 전직하여 육군참모총장을 꿈꾸기도 하였으나, 1922년 2월 14일 위병으로 타계하였다.

3·1운동, 독립군 탄압, 한국인 회유공작 사실대로 기록

우쓰노미야 다로는 15권에 달하는 일기를 남겼는데 1900년, 1907~1916년, 1918~1921년까지 모두 15년치에 해당한다. 우쓰노미야는 무장답지 않게 일기 이외에도 서간 5천여 통, 서류 2천여 점 등 방대한 기록을 남겼다. 그의 일기는 일본을 대표하는 출판사인 이와나미 출판사(岩波書店)에서 3권짜리 《일본육군과 아시아정책》이라는 책으로 출판되었다.

그는 1919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전국 각지에서 대규모 시위운동이 일어나자 적극 무력 탄압할 것을 지시하였고, 이 과정에서 악명을 떨친 수원 제암리 학살사건이 일어난 것을 보고 받았다. 육군중위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가 이끄는 일본군이 4월 15일 무고한 한국인 30여 명을 학살하는 만행을 일으켰던 것이다. 우쓰노미야는 1919년 4월 18일자 일기에서 이 사건의 은폐 왜곡사실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예수교도, 천도교도 30여 명을 예수교회당 안에 집결시켜 두세 번 문답 끝에 32명을 죽이고, 교회와 민가 20여 호를 불태워버린 진상을 알게 되다…(중략)사실을 사실로서 처분하면 가장 간단하지만…(중략)…학살 방화를 자인하는 것이 되어, 제국의 입장은 심히 불이익이 되고…(중략)…(학살된 한국인들이) 저항했기 때문에 살육한 것으로 하여 학살 방화 등은 인정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밤12시에 산회(散會)하다."

우쓰노미야는 3·1운동 이후 만주지역, 특히 북간도 지역(현재의 중국 연변지역)에 근거를 둔 독립군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나들며 일본 군경을 습격하는 일이 잦아지자, 이를 방관할 경우 일본의 식민지 지배가 어려워질 것으로 판단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중국 동북의 봉천군벌과 협의하고 일본군을 중국 영토로 출동케 하여 한민족 독립군 부대를 '토벌'하는 계획을 주도하였다. 1920년 6월 초 야쓰가와(安川) 월강(越江) 추격대를 조직하여 홍범도 독립군 부대가 주둔하고 있던 연변의 봉오동에 불법 침입하도록 했는데, 이들은 독립군부대에 대패한다. 바로 그 유명한 봉오동 전투다. 그는 이 사건 관련 내용도 일기에 기록하였다.

사료가치 높아 치밀한 연구 뒤따라야

그가 남긴 방대한 자료가 일본 학계에 알려지고, 본격적으로 조사·연구가 이뤄지기 시작한 것은 2002년 1월이었다. 그의 일기는 한·일관계는 물론, 일본 군부 내 소위 '죠슈벌(長州閥)' 과 '사가벌(佐賀閥)'의 대립, 중·일관계 등 아시아 전반에 관한 다양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료로서 가치가 매우 높다. 따라서 폭넓은 검토와 연구가 필요하다. 특히 우리가 관심을 쏟고 주의 깊게 연구해야 할 부분은 이 일기에 나오는 한국(조선) 관련 내용이다. 실제로 이 일기 가운데는 한국이나 한국인(조선인) 관련 내용이 적지 않다. 그는 일기에 군사 관련 사항은 물론, 친일밀정 이희간(李喜侃) 등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회유 공작의 실상도 숨김없이 기록하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아직까지 한국학계에서 우쓰노미야 다로의 일기를 본격적으로 고찰한 연구 성과는 거의 없는 것으로 파악된다. 한국근대사나 한일 관계사, 혹은 중일 관계사나 국제관계, 정치학이나 군사(軍史) 전공 학자들도 관심을 갖고 치밀한 연구를 진행해야 할 때다.

이와나미 출판사에서 펴낸 《일본육군과 아시아정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