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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930년대 항일을 위한 한·중 연대와 독립운동의 현장
  • 글 장세윤 (독도연구소 2팀장)

지난 8월 28일부터 31일까지 중국 상하이(上海) 푸단(復旦)대학 한국연구중심에서 열린 한·중 국제학술회의 "일제의 침략과 한·중의 공동항전"에 참가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관련 유적지를 답사하였다.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한·중의 항일투쟁 노력

이번 학술회의는 단국대 한시준 동양학연구원장과 스위안화(石源華) 푸단대 교수가 기조강연을 하고, 필자를 비롯한 한·중 학자 각 5명이 주제 발표하고 토론하는 일정으로 진행하였다. 중국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한·중 공동 항일투쟁이 세계 반파시스트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중국 역시 항일전쟁에서 일본에 심대한 타격을 주는 등 제2차 세계대전에서 큰 역할을 했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실상이 한국과 일본, 구미학계에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고 아쉬움을 토로하였다.

필자는 '일본의 9·18사변 도발과 중국 동북(만주) 지역에서 한·중 공동항전'을 발표하였다. 1931년 9월 일본이 중국 동북지방(만주)을 침략한 뒤, 그곳에서 활약하던 한국 독립운동 세력이 중국 국민당 계열 중국 의용군, 중국 공산당 계열 항일유격대와 힘을 합쳐 일제 침략세력에 항전하여 중요한 성과를 거두었음을 강조했다. 필자의 발표에 지정 토론을 맡은 푸단대 푸더화(傅德華) 교수는 한국인들의 의미 있는 독립운동이 외국 학계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그는 중국의 항일전쟁도 마찬가지라고 하면서 한·중 양국 학계가 앞으로 더욱 적극적으로 항일전쟁 자료를 발굴하고 연구하여 국내외에 그 실상을 올바로 알려야 한다고 역설했다.

양지선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교수는 '7·7사변과 한중 공동항전의 한 양상'을 발표했는데, 1932년 윤봉길 의거 후 중국이 한국 독립운동을 지원한 것은 일방적 시혜가 아닌 호혜적인 것이었다고 주장하여 주목을 끌었다.

학술회의 전후인 8월 28일과 30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관련 유적지를 답사하였다. 역사 현장 답사는 역사 연구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재개관한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

현재 상하이에 남아있는 푸칭리(普慶里) 4호 임시정부 청사는 임시정부가 상하이에서 1926년부터 1932년 5월 초까지 6년여 동안 사용한 청사였다. 임시정부는 프랑스 조계지 안에 청사를 마련하였으나, 재정난으로 여러 곳을 옮겨 다녀야 했다. 프랑스 조계지는 일본 당국, 특히 상하이 일본 영사관의 감시나 수색을 피해 비교적 안전하게 사무를 보고 독립운동을 지휘할 수 있었다. 임시정부는 1919년 6월 처음으로 상하이 바오창루(寶昌路) 309호에 번듯한 2층 청사를 마련하였으나, 5개월여 만에 떠나야 했다.

당시 임시정부는 현재 청사 건물 3호 공간만 사용하였으나, 2001년 한국 정부와 독립기념관이 주변에 있는 3호와 5호 건물을 매입하여 개수하고 전시 자료도 대폭 교체하였다. 그러나 올해 광복 70주년과 중국의 항일전쟁 '승전' 70주년을 계기로 중국 정부가 직접 나서 7억여 원에 달하는 비용을 부담하여 전시 내용을 교체하기도 했다.

우리가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에 도착했을 때는 재개관을 준비하느라 매우 분주한 모습이었다. 전시 내용은 대체로 전과 유사했으나, 중국의 지원과 역할을 더 강조하는 방향으로 정리된 듯 했다. 현재의 임시정부 청사는 향후 중요한 독립운동의 산 교육장이 될 것이다.

임시정부는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거 직후인 5월 초, 상하이를 떠나 1940년 충칭(重慶)에 정착할 때까지 8년 동안 항저우(杭州)와 난징(南京), 창샤(長沙) 등 여러 곳을 전전해야 했다.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입구 전경. 오른쪽 아래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지'라는 동판이 부착되어 있다.

28일 오후에 간 상하이 훙커우(虹口)공원(현재는 루쉰공원)에는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기념하기 위한 특별 공간으로 매원(梅園)이 조성되어 있었는데, 이곳에 윤 의사의 행적을 전시하는 매헌(梅軒)과 기념비가 잘 정비되어 있었다. 한인애국단원 윤봉길의 특공작전으로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일본군 총사령관 등 중국 침략을 상징하는 인물들이 폭살당한 후 임시정부 국무위원이자 한인애국단 단장이었던 김구는 일본 경찰의 집중 추적을 당하며 생명의 위협을 느껴야하는 어려운 처지에 빠졌다.

이후 그는 상하이 부근인 자싱(嘉興)의 메이완지에(梅灣街)나 하이얀현(海鹽縣) 남북호변(南北湖邊)의 재청별서(載靑別墅)로 피신하는 등 고난이 이어졌다. 다행히 중국 국민정부와 국민당에서 적극적으로 김구를 보호하는 정책을 폈기 때문에 몇 차례나 어려운 위기상황을 벗어날 수 있었다. 우리는 8월 30일 오후 항저우에 있는 임시정부 청사도 방문하여 임시정부 요인들의 고난에 찬 시기의 활동을 조사할 기회도 가졌다.

이번 학술회의와 현장답사를 통해 우리의 독립운동, 특히 중국에서의 독립운동이 현재에도 매우 중요한 세계사적 의의와 교훈을 준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독자 여러분도 중국 각지에 산재한 우리 선열들의 피어린 독립운동 현장을 진지한 자세로 답사해볼 것을 권한다.

윤봉길 의사가 일제 침략자들을 응징하는 특공작전을 펼쳤던 훙커우공원 안에 세워진 매헌(梅軒)과 설명판(왼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