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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보고
덕수궁 중명전 대한제국 비운의 현장에 내리쬐는 가을햇살
2010년 복원한 덕수궁 중명전

덕수궁 돌담길을 오른편에 두고 정동 쪽으로 발길을 옮기면, 정동극장 골목 안에서 아담한 2층 건물을 만날 수 있다. 덕수궁 중명전이다. 지금은 덕수궁과 따로 떨어져 있지만, 중명전이 지어진 것으로 추정하는 1897년만 해도 이곳은 덕수궁(당시 경운궁) 경내였고, '수옥헌(漱玉軒)'이라 불리던 황실도서관이었다.

수옥헌이 중명전(重明殿)으로 이름이 바뀐 것은 1904년 경운궁에 대화재가 난 후, 고종이 이곳으로 거처를 옮기면서부터였다고 한다. 러시아 건축가 사바찐(A.I. Sabatin)이 설계한 이 건물은 근대 문물을 적극 수용하려고 했던 고종의 의지가 담긴 곳이기도 했다.

그러나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대한제국을 침탈하려는 야욕을 대놓고 드러내기 시작한 1905년, 대한제국에 특사로 온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11월 9일과 15일, 고종을 알현해 보호조약 인허를 강요하기 시작했다. 11월 17일 오후, 일본군이 궁궐 안팎을 에워싼 가운데 중명전에서 어전회의가 열렸고 참정대신 한규설을 비롯해 끝까지 조약에 반대하는 신하들이 끌려 나간 18일 새벽, 결국 을사늑약은 일방적으로 체결되고 말았다.

이날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이 외교권을 빼앗기자, 민영환과 조병세 등 일부 대신들은 자결로 항의를 표시하였고 전국에서 유생과 의병들이 항일운동에 나섰다. 하지만 일제는 이듬해인 1906년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초대 통감으로 이토 히로부미가 부임하면서 대한제국의 국운은 점점 기울었다.

1906년의 중명전 모습 (사진 : 독립기념관 제공)

하지만 고종도 쉽게 포기하지는 않았다. 을사늑약이 부당함을 국제사회에 알리고 잃어버린 주권을 찾기 위해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한 것이다. 1907년 4월, 고종은 비밀리에 특사로 이준과 이상설, 이위종을 임명하고 중명전에서 위임장을 전달했다. 3개월 후 네덜란드 헤이그에 도착한 그들은 끝내 회의장에 들어가지 못했지만, 을사늑약이 얼마나 부당한 것인지 알리려는 외교 노력만큼은 세계 언론이 주목하였다.

헤이그 특사 파견을 빌미로 고종은 끝내 강제 퇴위당하고, 중명전도 화재로 타버렸지만 다시 지어져 여러 용도로 이용되었다. 한때 민간에 매각되기도 했으나 2006년 문화재청이 관리를 맡아 2010년 복원한 건물은 현재 일반인에게 공개하고 있다.

110년 전 암울했던 민족사의 현장, 그리고 잃어버린 주권 회복을 위한 민족적 노력을 고스란히 간직한 중명전. 오늘 청명한 가을햇살이 내려앉은 이곳에서, 우리는 그날의 역사가 주는 교훈을 다시금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이다.

참고 자료 : 문화재청 - 덕수궁 홈페이지
http://www.deoksugung.go.kr/cms/contents/story/story03.asp
독립기념관 《서울 독립운동 사적지》 - 경운궁 중명전
http://sajeok.i815.or.kr/ebook/ebookh01/book.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