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근대'와 '문명'을 앞세운 일제가 동아시아를 침략하고 급기야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하기 직전 안창호와 신민회 회원들은 국외로 망명하였다. 한국민은 압록강 너머 서간도 지역과 두만강 너머 북간도, 그리고 현재의 동북 3성 전역으로 퍼져 나갔고 우수리강 너머 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으로 연해주 전역과 흑룡강 너머의 러시아 오지 깊숙한 곳까지 이주하여 한인촌을 이루었다. 생존을 위해 집단을 이루었던 한인들은 국외 독립운동 기지 개척사업의 기반이 되어 주었다. 서양인들에 의해 '극동'지역으로 일컬어지는 연해주 일대는 강제 병합 이전부터 독립운동의 거점이었다. 그렇기에 1909년 10월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哈爾濱) 의거를 블라디보스토크 대동공보사에서 모의할 수 있었다. 안중근 의거 후 신민회는 긴급 간부회의를 열어 국권회복운동을 접고 독립전쟁론을 최고 구국전략으로 채택했다. 국외에 독립군 기지를 개척하고 무관학교를 설립, 사관을 양성해 일제에 장기적으로 항쟁한다는 것을 골자로 하였다.
북만주 밀산(密山) 지역의 봉밀산(蜂蜜山) 토지개척은 재미한인사회와 재만한인, 그리고 재러한인사회가 참여한 첫 투자 개척사업이었다. 봉밀산 기지의 개척사업에는 500호 정도가 세 곳에 한인촌을 건설해 농토를 개발하고 학교를 세워 개척촌을 이루었으나 농업 투자사업은 여러 가지 장애로 실패하고 말았다.
한인단체부터 회사와 학교까지 설립한 '조직의 달인'
도산 안창호는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여 이곳에서 강제 병합조약 체결 소식을 들었다. 연해주 각지를 돌며 한인의 권익보호와 민족통합을 주선했던 도산은 1911년 2월경, 북만주 밀산의 개척지를 답사하고 목릉에 거주하는 안중근 가족을 돌아본 후 유럽을 경유해 그해 9월 2일에 미국으로 돌아갔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까지 도산은 동아시아, 즉 만주와 중국 관내, 연해주 지역의 한인들과 연락망을 구축하고 조직적인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조직 단체만이 아니라 각종 회사와 학교를 설립해 운영한 조직의 달인이었다. 독립운동의 물적 토대와 인적 토대를 구축하지 않으면 민족의 장래도, 희망도 없다고 보고 인적·물적 실력양성 기반을 다지는 데 소홀하지 않았다. 한국의 근대사에서 많은 결사들이 만들어졌다가 사라졌지만 도산이 조직하거나 관여한 조직은 민주적 운영과 민족전도의 대계를 세우고 추진했기에 그 생명력이 길었다.
제1차 세계대전 끝나자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이던 도산은 변화하는 국제 정세에 신속히 대처하고자 했다. 3·1운동이 일어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소식을 듣고 도산은 독립운동에 직접 투신하고자 중국행을 택하였다. 그의 중국행으로 독립운동의 중심축은 미주에서 상하이로 이동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서리로 취임한 도산은 인구 조사, 국채 발행, 인두세 징수, 구국재정단 조직 등 재정 대책과 군사에 노력할 것과 외교에 힘쓸 것, 그리고 연통제 실시와 교통국 설치를 추진해 연락망을 구축하고 국민적 기반을 마련하는 일, 북간도와 서간도 등지에 선전원과 특파원을 파견해 만주의 독립군 조직을 정부산하로 통합하는 일 등을 정부의 시정방침으로 삼고 추진하였다. 그 외에 한인관계사 조사·편찬, 공립학교 정비, 〈독립신문〉 창간, 대한적십자회 재건 등 국민정부로 위상을 정립해 나갔다.
8월 이후에는 정통성을 가진 민족정권을 수립해 독립운동을 통일적으로 지도하고자 서울과 블라디보스토크, 그리고 상하이에 수립된 3개의 임시정부 통합운동을 주선해 마침내 통일 임시정부를 출범시켰다. 통일정부에서 노동국 총판으로 취임함으로써 정치적 입지가 크게 줄었지만 1920년 임시정부 신년축하회 석상에서 도산은 '우리 국민이 결단코 실행할 6대사'를 주제로 강연하면서 독립운동은 어느 한 부분이 아닌 군사·외교·교육·사법·재정·통일의 6대사업으로 진행할 것과 우리 민족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통일'임을 힘주어 강조하였다.
한쪽 이데올로기를 거부하고 대공주의를 모색하다
국민대표회의가 실패로 돌아간 후 임시정부를 나온 도산은 유일당운동과 이상촌개척운동에 몰두하면서 재정적 파탄에 빠진 임시정부를 구하고자 전력을 다하였다. 유일당운동으로 민족 내부에서 전선통일을 꾀하면서 중국으로 침략해 들어오는 일제에 대항해 한·중이 공동 투쟁하는 기반을 마련하는 일에 동분서주하였다. 그것은 중국인들에게 일제 침략의 첨병으로 오해되어 무자비하게 내몰리던 재만한인들의 비참한 처지를 구할 수 있는 방도이기도 했다. 그러나 1928년 7월 코민테른 제6차 대회가 민족 부르조아지와의 연대 방침을 좌파 중심의 협동전선론으로 바꾸고 헤게모니 전취론을 취하자, 동아시아 좌파세력 중심 연대는 민족적 명분을 압도해 버렸다. 이로써 민족 내 좌우익의 운동세력도 치열한 이데올로기 논쟁에 빠져버렸다. 공산주의냐, 민족주의냐를 선택하라는 강요를 받으며 서로를 적대하는 민족 앞에 도산은 대공주의(大公主義)라는 제3의 길을 제시하였다.
1928년 12월 20일 연희전문축구단이 원정 경기를 위해 상하이를 방문했을 때, 도산은 학생들에게 "개인은 민족에 봉사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의무와 민족에 대한 의무를 완수한다"는 훈화를 한 바 있다. 여기에는 어떤 사상보다도 민족 가치를 우선으로 하는 대공주의의 요지가 담겨있다. 대공주의는 사회전반의 공익을 제일 가치로 하고 독립운동계에 분열을 초래했던 자본주의(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이데올로기 대립을 상대화하여 민족평등·정치평등·경제평등·교육평등의 사회민주주의적 국가를 수립한다는 전도를 제시하고 있다. 또 일본과의 관계는 비타협적 항일투쟁 노선을 견지하지만 민족 내부에서는 이데올로기에서 해방되어 민족 지상을 이념 삼아 민족 우선의 통일주의를 주창한 것이다.
이데올로기 시대 도산은 좌우 양쪽에서 공격을 받으면서도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중도에서 민주주의적 민족국가 수립이라는 비전을 제시하고 갈등과 대립으로 치닫는 민족을 대공주의로 포용하고자 했다. 도산은 당시 누구보다도 중국 관내와 만주, 연해주에서의 동포 사회와 동아시아 세계를 이해했으며 이들과의 교류 연락을 통해 많은 정보를 수집하면서 이데올로기의 허구를 간파할 수 있었기에 최고의 조직 운동가, 지도자로 활약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