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 고구려비, 그 모습을 드러내다
1979년 4월 8일, 지금의 충주시 중앙탑면 용전리 입석 마을 입구 화단에 서있던 입석(立石)이 충주 고구려비(이하 ‘충주비’로 약칭)로 우리 앞에 성큼 다가왔다. 실로 1,500 여 년이 넘는 세월의 망각을 거쳐, 당시 단국대학 정영호 선생에 의해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러한 충주 비는 1981년 국보 지정 당시 중원 고구려비로 불렸으나, 2012년에 그 명칭을 변경하였다. 그 해 2월 충주 지역 예성동호회지금의 예성문화연구회 회원들이 입석마을 입석에 대한 조사를 하였다. 당시 동호회는 입석에서 글자의 유무를 확인하지 못했으나, 그 중 한 분이 3월 하순에 정영호 선생에게 입석에 대한 제보를 하였다. 이것이 한 마을의 입석이 국보인 충주비로 바뀌는 발단 이 되었다. 4월 5일 현장을 방문한 정영호 선생은 이끼가 많이 낀 입석을 손으로 더듬어 확인하거나, 탁본을 통해 ‘대왕(大王)’·‘국토(國土)’·‘당주(幢主)’·‘신라토내(新羅土內)’·‘사자(使者)’·‘상하(上下)’ 등의 글자를 확인할 수 있었다. 삼국시대의 비석임을 직감한 정영호 선생은 단국대학 사학과 교수진 및 학교 행정 당국에 이 사실을 알리고, 4월 7일과 8일에 걸쳐 조사하기로 결정하였다.
단국대학 조사단은 4월 7일 오후와 8일 오전에 걸쳐 비석의 이끼 제거 작업을 수행하였다. 이후 탁본을 통해 명문銘文을 확인한 결과, ‘전부대사자(前部大使者)’·‘십이월이십삼(十二月卄三)’·‘신라토내당주(新羅土內幢主)’·‘하부발위사자(下部拔位使者)’·‘대왕국토(大王國土)’·‘신라매금토(新羅寐錦土)’·‘고모루성수사(古牟婁城守使)’ 등의 글자가 추가로 드러 났다. 광개토왕릉비에 보이는 ‘고모루성’이나 여러 고구려 관등이 확인됨으로써, 이 비석이 고구려 비석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울러 ‘오월중고려대왕(五月中高麗大王)’이라는 글자를 확인함으로써 충주 고구려비가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
충주 고구려비, 어떻게 연구되어 왔나
1979년 8월까지 충주비에 대한 현지 조사는 단국대학의 주도로 9차에 걸쳐 이루어졌다. 그 과정에서 단국 대학 교수진이나 문화재학·미술사학 연구자를 비롯하여, 한국고대사 연구에 괄목할 업적을 남긴 이병도, 이기백, 변태섭, 김철준, 임창순, 박성봉, 신형식 선생 등이 조사에 참여하였다. 특히 4월 22일에 있었던 3차 조사에서는 충주비를 장수왕 때 비석으로 잠정 결론지은 바 있다. 충주비의 서술 내용이 발생한 시기 또는 비석을 세운 연대 등의 문제는 현재까지도 다양한 견해들이 제기되고 있으나, 대체적으로는 449∼450년 정도로 보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단국대학 박물관은 그 해 6월 9일 충주비 학술대회를 개최하였다. 함께 조사한 결과를 연구자 나름으로 정리한 이 작업은 그 해 11월 『사학지』 13호로 발간되었다. 이때 발견 및 조사 과정 등을 정리한 정영호 선생을 비롯하여, 연구 성과를 논문으로 발표한 연구자는 이병도, 이기백, 변태섭, 임창 순, 신형식, 김정배, 이호영 선생이다. 단기간에 걸쳐 작성된 성과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연구 성과는 그 이후 충주비 연구의 초석이 되었다. 충주비의 판독을 비롯하여, 비의 성격, 형식, 삼국 관계, 건립 연대 등 이때 논의된 주제 및 연구 성과가 아직까지도 학계의 주요 논점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이후 남북한은 물론, 중국이나 일본의 연구자들은 충주비를 주목할 수밖에 없 었다. 삼국 관계를 언급하는 거의 모든 한국고대사 연구 논문에서 충주비는 주요 서술 대상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주비에 대한 직접적이며 개별적인 연구 성과는 그다지 많지 않은 실정이다. 아마도 비문의 판독이나 서술 내용의 배경에 대한 확증이 곤란함에 그 이유가 있어 보인다.
이처럼 충주비는 연구 자료로서의 중요함이나 활용에 비하여, 정작 직접적 연구가 충분하지 못한 상황에서 20여 년이 흘렀다. 그러다 2000년 2월 고구려연구회(지금의 고구려발해학회)가 비문의 판독을 위하여 5일 간 40여 명의 인원을 동원하여 공동 작업을 수행하였다. 아울러 그때의 판독을 바탕으로 그 해 10월 학술대회를 개최하고, 그 결과물을 12월에 『고구려연구』 10호로 간행하였다.
고구려연구회에서는 공동 판독에 의해 합의된 판독문이라는 것을 제시하였지만, 그 작업에 참여했던 연구자들은 나름의 견해를 갖고 연구를 진행하였다. 공동 조사 및 연구 작업을 진행하였으나, 그 결과는 1979년의 상황과 마찬가지로, 합의된 견해는 도출되지 않았다. 역사학 연구에서의 당연한 귀결이라고도 여겨진다.
이처럼 1979년과 2000년의 공동 연구 결과, 충주비 관련 연구 성과는 20여 편의 논문으로 집약되었다. 물론 그 이후로도 간헐적인 연구 결과가 학계에 소개되었으나, 40년이 지난 현재까지 충주비를 직접 대상으로 연구한 성과는 약 40여 편의 논문에 불과하다. 1979년 당시의 한국고대사 연구 인력과 연구 성과에 비하여, 현재의 연구 수준은 양적·질적인 면에서 커다란 성장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주비 연구가 지속적으로 진행되지 않는다거나, 괄목할 만한 성과가 도출되지 않은 것은 학계의 반성이 필요한 부분이라 여겨진다.
충주 고구려비, 고구려사 연구에 어떤 의미를 갖나
충주비의 등장 직후부터 우리 학계에서는 충주비의 의미를 몇 가지로 언급하여 왔다. 그 첫째는, 충주비는 한반도에서 발견된 유일한 고구려비로서 획기적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둘째는 5세기 고구려가 신라를 ‘동이(東夷)’라고 부르면서 종주국의 입장을 갖고 있었으며, 아울러 신라 영토내에 고구려 당주가 주둔하고 있었다는 점을 알려준다는 것이다. 셋째는 고구려의 인명 표기 방식이 직명(職名) – 부명(部名) – 관등명 – 인명 순서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넷째는 비문 중에 보이는 발위사자 등 고구려 관등의 분화와 정비 과정에 대한 이해에 새로운 자료를 제공해준다는 것이다. 다섯째로는 고구려에서의 이두(吏讀) 사용 시기가 5세기 이전으로 소급 가능해졌다는 점 등이다.
이러한 지적은 충주비의 비문 내용을 확인함으로써 상대적으로 그리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는 내용들이다. 즉, 5세기 한국고대사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자료로서의 의미에 한정될 뿐, 고구려사 연구에 있어서 충주비가 갖고 있는 의미 부여로는 다소 미흡한 점이 없지 않다. 충주비가 갖는 고구려사에서의 의미는 당시 고구려가 처해 있었던 정치·군사적 상황에 대한 정확 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
고구려는 광개토왕릉비와 충주비 건립 사이의 시기에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천도하는 커다란 변혁을 경험하였다. 광개토왕의 평양 천도는, 정치적으로는 귀족 세력의 숙청이라는 것과, 군사적으로는 요하(遼河)의 서쪽으로 진출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이러한 때에 충주비는 고구려가 충주를 군사적 거점으로 유지하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며, 아울러 고구려의 입장에서 신라·백제를 견제하기 위한 충주의 중요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충주비가 갖는 고구려사에서의 의미는 연구자마다 다양한 견해가 노정되어 있다. 나는 예전에 다음의 몇 가지로 충주비의 고구려사적 의미를 정리해 본 바 있다.
첫째, 충주비는 광개토왕 때 성립된 고구려의 천하관과 독존 의식이 장수왕 중반인 449년 즈음에는 확고하게 정립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는 충주비가 고구려에서 태왕 개념이 확립되어 있었음과 함께, 태자 책봉 체제 및 수천(守天) 관념의 실체 등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광개토왕릉비에도 ‘세자’라 표현되어 있던 고구려의 왕위계승 대상자가 충주비에서는 ‘태자’로 명기되어 있다. 특히, ‘수천’은 고구려에서 하늘(天)이 국가 사이의 약속을 지키고 수행하여야 할 구체적 인식 대상으로 설정되었다는 것이며, 이를 통해 고구려가 나름의 독자적 천하관을 갖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둘째, 충주비는 최소한 광개토왕 때부터 사용되어 온 고구려의 연호가 450년 이후 개원을 통한 지속적 사용 전통을 갖게 되었음을 알려준다. 광개토왕의 영락(永樂) 연호는 그의 재위 전 기간에 걸쳐 사용되었으며, 생존 시에도 영락대왕이라 불렸다. 현재까지 전하는 자료를 통해 볼 때, 영락 연호 사용 이후 경주 서봉총 은합우에서 확인되는 고구려의 연수(延壽) 연호가 451년에 제정될 때까지, 고구려에서는 별도로 확인되는 연호가 없다. 충주비에는 연호가 보이지 않지만, 장수왕 때에는 연가(延嘉; 473년)·영강(永康: 483년) 등의 연호가 사용되었다는 견해가있다. 이를 참고할 경우, 광개토왕 때 이후 장수왕 중반까지 연호 사용이 불특정하였다면, 장수왕 중반 이후의 고구려에서는 연호가 지속적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있다. 이는 고구려의 천하관이나 독존 의식이 한 단계 더 강화되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셋째, 위와 같은 독존적 천하관에 입각한 고구려의 자기 인식과는 달리, 충주비는 이즈음 고구려의 신라나 백제에 대한 영향력이 이전 단계에 비해 상대적으로 위축되어 가고 있음을 현실적으로 보여준다. 광개토왕릉비는 고구려가 신라를 ‘속민’으로 규정하고, 신라 국왕이 고구려에까지 ‘조공’을 왔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충주비는 고구려와 신라가 ‘형제’ 사이이며, 고구려 국왕이 하사한 의복을 신라 국왕이 고구려의 수도가 아닌 충주 지역에 와서 받아가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아울러 이 시기는 신라가 고구려의 과도한 압력에서 벗어나고자 백제와의 화친을 통한 나제동맹의 결성으로 나아가던 때이다. 따라서 이시기는 신라와의 기존 우호 관계를 유지하려는 고구려 측의 인내와 노력이 교차하던 때라고 보인다.
넷째, 충주비는 평양 천도 이후 고구려가 지속적으로 요하 서쪽으로 진출하고자 하는 군사 행동과 맞물려, 충주를 거점으로 고구려의 남쪽 변경, 즉 신라나 백제 방면의 안정을 유지하고자 하는 고구려 측 노력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충주비에 보이는 ‘신라토내당주(新羅土內幢主)’라는 표현은 신라 영토 안에 고구려 당주가 주둔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아울러 이것이 아마 『삼국사기』 「지리지」가 소백산맥 이남 지금의 경상북도 일부 지역을 고구려 땅이라 기록하게 된 이유라고 여겨진다. 그런데 고구려의 자존(自尊)과는 달리, 충주비 건립 즈음의 시기는, 고구려의 과도한 압력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신라의 자각으로 인하여, 양국 관계의 전환기가 도래하는 시점이다. 고구려는 소백산맥 이남에 주둔하던 당주를 통하여 배후 지역에 대한 안정을 원했으며, 그를 위하여 신라와의 기존 유대를 재강화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시대 상황의 산물이 바로 충주비인 것이다.
다섯째, 충주비는 고구려의 군사 전략이나 내륙 교통에 있어서 충주 지역의 중요성을 웅변해주고 있다. 400년 광개토왕의 남정(南征) 이후, 고구려는 평강 분수령을 넘어 춘천 – 홍천 – 횡성 – 원주를 거쳐, 제천·영월 – 영춘 – 단양 – 충주 방면으로 군사적 진출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신라나 백제에 대한 고구려의 군사적 침공은 두 나라를 동시에 침공하기 보다는 번갈아 교차로 침공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 경우 충주는 신라와 백제를 동시에 견제하기 위해 중요한 지역이다. 실질적으로 소백산맥 이남에 당주를 주둔시키고 있었던 고구려의 입장에서 481년에는 포항 지역까지 손쉽게 침공하기도 하였다. 반면에 6세기 중반 고구려의 충주 지역 상실은 그 이후 신라의 군사적 성장·진출을 제어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점에서 교통로 · 군사작전로로 중요한 충주 지역에 충주비가 위치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충주 고구려비 연구, 앞으로 방향은
필자는 1981년 가을, 대학에 복학하여 한국고대사 수업시간에 충주비와 적성비에 대한 내용을 알게 되었다. 5세기 중엽 고구려의 남하와 6세기 중엽 신라의 북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근 100년의 시차를 두고 있는 두 비석은 그렇게 나의 기억에 남게 되었다. 그 이후 대학원에 진학하여 『삼국사기』 「지리지」를 공부하면서, 지금의 경북 일원에 고구려의 옛 땅이라 기록되어 있는 지명과 충주비의 ‘신라토내당주’ 주둔지를 함께 고려한 것이 나와 충주비의 학문적 인연이다.
물론 이러한 충주비에 대한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비문의 자구(字句)에 대한 판독 작업이다. 충주비 등장 초기 단국대학에 의한 공동 연구와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후 고구려연구회에 의한 공동 연구가 진행된 바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연구자 모두가 공감하는 판독문은 제시되지 않았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더 커 보인다. 고구려연구회의 판독 작업에 동참한 바 있는 나로서는, 도저히 읽혀지지 않은 글자를 몇몇 사람이 너무 잘 읽어내는 데에 대하여 감탄을 했던 기억이 새롭다.
1980년 대 말, 울진 봉평리 신라비와 포항 냉수리 신라비가 잇달아 등장하였다. 당시 한국고대사학회 주관으로 해당 비석에 대한 공동 연구가 진행된 바 있다. 많은 연구자들이 연구 발표 과정에서 비문 중 읽히지 않는 부분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때 안동대학 임세권 선생은 어차피 보이지 않는 부분에 대한 추론보다는 잘 읽히는, 보이는 글자들에 더욱 집중하여 논지를 전개하는 것이 옳은 방향이라 언급하였다. 아직도 잊히지 않는 명쾌한 지적이다.
충주비 등장 40년을 경과하는 이 시점에서, 많은 연구자들은 충주비가 장수왕 때의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아울러 충주비를 세운 시기 또한 5세기 중엽에서 찾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재청의 충주비 해설은 연구 초기의 한 견해를 벗어나지 못한 채, 충주비가 문자왕 때 세워진 것이라 설명하고 있다. 공신력있는 국가 기관의 설명으로는 학계의 연구 동향에서 많이 벗어나 있어 보인다.
충주비는 물론, 금석문 연구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자구에 대한 파악, 즉 글자의 판독이다. 육안이나 탁본은 물론, 특수 사진 촬영이나 여타 과학적인 방법 등 동원 가능한 판독 수단은 모두 동원하여 글자를 판독해 내어야 한다. 그러나 어차피 그러한 방법에 의한 새로운 판독이 불가능한 실정이라면, 읽어낸 글자를 갖고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 파악 가능한 시대상을 도출해 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충주비가 우리에게 모습을 드러낸 지 40년이 되는 2019년 4월 8일, 이 글을 마감하며 새삼 느끼는 소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