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호태
울산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문학석사 및 박사를 취득하였다. 1988년~1993년까지 국립중앙박물관 미술부 학예연구사를 역임하였고, 이후 울산대학교 교수로 재직중이다. 미국 UC버클리대학 동아시아연구소 및 하버드대학교 한국학연구소 방문교수, 문화재청 문화재감정 및 전문위원, 한국암각화학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논문으로 「고구려 고분벽화 연구 : 내세관 표현을 중심으로」, 저서로 『고구려 고분벽화의 세계』, 『고구려생활문화사 연구』, 『비밀의문 환문총』, 『고구려 사람들은 왜 벽화를 그렸나요』, 『고구려 고분벽화와 만나다』 외 다수가 있다.
고구려사 연구의 가장 큰 난점은 그들 스스로가 남긴 문자 자료가 적다는 것이다. 때문에 당시의 일상생활이나 사후 세계에 대한 관념 등 시대상을 보여주는 고구려 고분벽화는 고구려사 연구에 있어 더없이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최근 동북아역사재단에서 교양서 『고구려 고분벽화와 만나다』를 펴낸 전호태 교수는 30년간 고구려 고분벽화를 연구해 온 고분벽화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다. 올해 초에는 ‘고구려인의 미의식과 고분벽화 연구’로 고구려발해학회 제5회 학술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재단에서 고구려 고분벽화 디지털 복원 사업 및 연구를 담당해 온 고광의 연구위원이 전 교수를 만나 신간에 대한 소개와 더불어 고구려 고분벽화 연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았다.
Q
교수님께서는 오랫동안 고구려 고분벽화에 대한 연구를 해오셨습니다. 어떤 이유로 고구려 고분벽화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셨나요?
A
저는 원래 그림에 관심이 많아 고고미술사학과에 진학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당시 해당 학과에 학생이 한 명 있을까, 말까였죠. 그래서 고민하다가 국사학과로 진학해 부전공으로 고고미술사를 하게 됐습니다. 벽화에 관심을 갖게 된 건 부전공을 하면서부터였어요. 제 첫 직장이 국립중앙박물관 미술부였는데 덕분에 ‘그림 읽는 법’도 배우고 벽화도 제대로 공부하게 됐죠. 저는 학예사가 됐기 때문에 고분벽화에 대해 깊게 공부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일반인은 볼 수 없는 중국과 북한의 학술잡지를 볼 수 있었어요.
Q
고구려 고분벽화가 남아있는 지역은 북한과 중국이지 않습니까? 처음 공부를 시작할 당시에는 고구려 고분벽화를 연구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요. 연구를 하면서 고분벽화를 실제로 본 건 언제인지요?
A
1988년에 첫 번째 논문을 썼는데 그땐 고분을 실제로 보지 못했을 때에요. 고분벽화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면서도 실물을 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죠. 이건 여담인데 제가 고구려 고분벽화 연구를 한다고 하니까 제 스승도, 선배들도 모두 말렸어요. 그땐 남북 분단에 동서 대립이 심할 때 잖아요. 그런데 철의 장막, 죽(竹)의 장막이 걷히면서 1991년 4월 아시아사학회가 중국 장춘에서 열리게 된 거예요. 남북한과 중국, 일본 등 아시아 4개국 학자들이 한데 모이는 그 자리에 운 좋게도 제가 참석하게 됐죠. 당시 제가 중앙박물관 학예사고, 고구려 고분벽화를 연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회가 주어진 거죠. 그때 처음으로 고구려 고분벽화를 봤어요. 내가 살아서 고구려 고분벽화를 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 때니까 무척 설렜죠. 그런데 막상 집안 국내성 지역에 가서 각저총, 오회분5호묘 같은 고분에 들어가니까 마음이 편해지더라고요. 아마도 머릿속으로 오랫동안 상상해 왔기에 그랬던 것 같아요. 다른 분들은 대여섯 분씩 교대로 4번인가 고분에 들어갔는데 저는 내내 고분 안에 있었어요. 그리고 그 안에서 벽화들을 모두 눈에 담고 돌아왔죠. 이후 2004년, 2005년에는 남북공동학술조사단의 일원으로 강서대묘, 덕흥리벽화분, 안악3호분도 직접 가봤는데 벽화를 마주할 때마다 느껴지는 전율은 뭐라 말할 수 없어요. 평양에 갔을 때 일인데 그쪽 안내원들은 무덤에 대한 선입견 때문에 몇 분만 지나면 나가버려요. 고분 안은 선선하기도 하고 또 굉장히 습하거든요. 2분이면 카메라가 젖어서 촬영하기 힘들 정도에요. 온몸은 땀으로 다 젖고요. 그런데도 전 고분 안에서 벽화를 보는 게 그렇게 좋더라고요.
Q
고분벽화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얼마나 큰지 알 것 같습니다. 그런데 교수님, 무덤은 일반적으로 죽은 자를 위한 구조물로 인식되는데 왜 고구려 사람들이 무덤에 그려진 벽화에 그렇게도 많은 공을 들였을까요? 그리고 시기에 따라 고구려 고분벽화에도 변화가 있었나요?
A
장의(葬儀) 미술을 포함한 장례의 모든 과정과 결과물은 반드시 피장자만을 위한 건 아니에요. 이집트의 피라미드가 파라오를 포함한 지배층의 권위와 권력을 보여주고 또한 백성들에게 위대한 나라의 국민이라는 자부심을 심어주는 것과 같은 이치랄까요? 고구려도 마찬가지죠. 게다가 고대로 올라갈수록 산 자와 죽은 자의 관계는 깊어요. 서로 연결되어 영향을 주고받는다고 믿었으니까요. 덕흥리벽화분 묘지명을 보면 ‘좋은 날을 택해 정성 들여 장례를 치렀으니 부는 7세에 미쳐 자손이 번창하고 관직도 날마다 올라 자리는 왕과 제후에 이르기를’ 기원하는 문구가 있어요. 후손들이 장례에 정성을 기울이는 이유가 있는 거죠. 게다가 불교가 들어오기 전에는 귀족은 죽어서 저승에 가도 귀족이니까 그에 걸맞게 무덤도 만들고 벽화도 그려야 했어요.
고구려 고분벽화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면 불교를 먼저 언급해야 할 것 같네요. 불교는 동아시아인의 내세관에 큰 변화를 가져왔어요. 이승과 저승의 인간관계와 사회질서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믿던 사람들이 내세의 삶을 신경 쓰게 만들었거든요. 불교의 윤회설과 인연설에 따르면 이 세상에서 쌓은 선업이 내세 삶의 형태를 결정짓는 요인이 될 거라니 긴장할 수밖에 없죠. 고구려 중기 고분벽화에 일상생활이 아닌 여래에게 공양하는 장면이나, 연꽃 장식이 주제로 등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에요. 후기 고분이 사신(四神)이 지키는 공간으로 바뀌고, 무덤 칸 천장이 불사약을 든 신선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장면으로 장식되는 건 불로장생의 신선 신앙이 크게 유행하면서 나타난 현상으로 해석할 수 있죠.
Q
고구려 고분벽화를 이야기하면서 북한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남북한의 공통된 관심과 노력으로 고구려 고분벽화가 200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는 쾌거를 이뤘습니다. 또한 이를 계기로 남북 공동조사단이 꾸려지기도 했는데요. 그렇다면 최근 북한에서 발굴된 고구려 고분벽화에 대한 연구와 보존 활동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습니까?
A
최근 수년 동안 북한에서 발견된 고분벽화만10기가 넘습니다. 아마 앞으로도 계속 평양, 남포, 안악 등지에서 고분벽화가 새로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들어올거예요. 2004년과 2005년 현장 조사를 갔을 때 평양과 남포, 평양과 안악 사이 도로 주변에서도 고구려 고분이라고 생각되는 유적들이 여럿 보였거든요. 그런데 문제는 ‘연구와 보존이 어떻게 병행되어야 하는가?’에요. 남북한 모두 이 분야 전문 연구자들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거든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유적은 지속적으로 보존 상태가 나빠지고 있는 상황이고요.
이 문제는 재단을 넘어 국가 차원에서 심각하게 고민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남북공동 연구조사와 보존 활동을 보다 적극적으로 진행할 필요가 있으니까요. 또한 이를 전담할 연구기관도 별도로 만들어져야 하고요. 상당수 고구려 유적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지만 보존과 연구는 턱없이 미진하고 부족한 상태라고 생각합니다.
Q
‘연구와 보존이 어떻게 병행되어야 하는가?’, 쉽지 않은 문제인데요. 앞서 연구자들이 눈에 띄게 적다고 하셨는데 고구려 고분벽화를 연구하는 연구자는 유독 없는 것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A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저도 참 답답합니다. 역사 연구에 있어서 우리나라는 단기성과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고구려는 단기성과와는 거리가 좀 있죠. 단기성과가 제일 쉬운 분야가 신라이다 보니 신라 연구자는 계속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하지만 고구려의 경우는 단기성과를 낼 수 있는 분야가 아니거든요. 특히 벽화는 고고미술사학, 문헌사학, 종교학, 민속학 등 적어도 네 가지 분야를 충분히 알고 있어야 연구가 가능해요. 그런데 학문 생태계가 그런 교육 자체를 막아버리거나 분과 학문 위주라 문제가 되고 있는 거죠. 중국의 동북공정만큼은 아니더라도 학문 연구에 대한 다변화와 올바른 학문 생태계 구성이 필요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Q
그동안 재단에서는 고구려 고분벽화를 비롯해 우즈베키스탄 아프로시압 궁전 벽화에 대한 디지털 복원 사업을 진행해 왔습니다. 이를 어떻게 보셨는지 그 성과와 보완점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A
벽화와 같은 민감한 유적들은 인멸되기 쉽고, 시간이 지날수록 보존 상태가 어떤 형태로든 나빠집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모든 유적을 디지털화 시키는 게 필요해요. 특히 그림 같은 경우에는 디지털 작업이 반드시 필요하죠. 1935년 발견된 각저총이나 무용총 같은 경우 발견 당시에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장면이 다 남아있었어요. 그런데 1990년에 촬영된 사진을 봤더니 보존됐던 부분에서 한 40% 이상이 없어졌더군요. 그 이후로 보존을 위해 코팅을 하는 등 다양한 방법을 썼겠지만 아마도 지금의 보존 상태는 그보다 더 안 좋아졌을 겁니다. 아프로시압 궁전 벽화 디지털 복원작업은 의미 있는 일이지만 사업 기간이 너무 짧아서 개인적으로는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1년 단위의 사업을 수행하게 되었을 때 실 작업 기간은 6개월 전후밖에 되지 않거든요. 그 6개월 동안 무엇을 얼마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사업 기간이 짧다는 건 세심한 작업들을 하지 못한다는 이야기에요. 그래서 저는 조금더 많은 시간과 비용을 들여서 고화질 작업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무한 확장성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거죠. 그렇게 하면 1:1 복원이 아니라 원래의 공간보다 더 넓게 경험할 수 있게 만들 수 있거든요.
Q
최근 재단에서 출판하고 교수님께서 집필한 『고구려 고분벽화와 만나다』에 대해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합니다. 어떤 책인지, 기존의 저서와 어떻게 다른지 궁금하고요. 책을 집필하면서 어떤 부분을 가장 신경 쓰셨는지도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A
재단에서 포켓북 형태의 교양서 시리즈를 내기로 했다면서 의뢰를 해왔어요. 문고본이기 때문에 전문적인 설명은 가능한 생략하되 내용을 충실하게 담아내는 게 중요하다 생각했어요. 그래서 고분벽화 재발견의 과정, 내용 전개 과정, 벽화가 지니는 역사·문화적 의미와 가치, 주요한 벽화의 사례, 고분벽화 조사 경험 등을 쉬운 문장으로 전달하려고 노력했는데 독자의 입장에서는 어떨지 모르겠네요. 집필할 때 가장 신경을 쓴 건 이 책이 대중용 문고본이기 때문에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한 거죠. 풀어쓰기는 오랫동안 시도한 일이지만 결코 쉽 지 않은 일이에요. 그리고 그 간 출판했던 책들과는 달리 중국과 북한에 있는 고구려 고분 벽화를 탐사했던 개인적 경험을 회고 형식의 부록으로 끝부분에 담았습니다. 일반적으로 연구자들의 글에는 현장 경험이 들어가지 않지만 이 또한 독자가 알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 거죠.
Q
마지막으로 고구려 고분벽화의 연구자로서 앞으로 어떤 계획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A
벽화고분 자료집이 아직 제대로 출판된 게 없어요. 연구자들이 도구서라고 부르는 기초연구 자료라고 할 수 있는데 그걸 아무래도 제가 정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내년쯤 출판할 수 있기를 희망하고 있어요. 무용총의 사냥 장면에서 읽어낼 수 있는 것들을 책 한권 분량으로 엮어 놓은 것도 있는데 그건 가을쯤이면 출간을 할 수 있을 것 같고요. 이것 외에도 대중과 호흡할 수 있는 스토리텔링 방식의 글쓰기를 계속해 나가려고 합니다. 저는 역사학자도 대중과 호흡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처음 낸 책이 유치원 어린이를 위한 고구려 벽화 그림 역사책이고, 두 번째 낸 책은 제 딸아이 초등학교 1학년 어린이날 선물로 쓴 고구려 벽화 안내서였습니다. 연구논문도 열심히 썼지만 정작 책은 어린이와 일반인을 위한 교양서의 형태로 먼저 냈어요. 연구서는 그 다음이었죠. 이전에는 벽화 한 장면을 깊이 있게 해설하는 작업들을 시도했는데 이제는 공감, 공유에 초점을 둔 글을 조금 더 많이 쓰려고 노력합니다. 상상력을 곁들인 고분벽화 이야기, 고구려 이야기 같은 것이죠. 에세이나 시화집 스타일로도 써볼까 생각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