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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벽제관 전투를 통해서 본 조명 군사 협력
  • 이정일(재단 한국고중세사연구소 연구위원)

학술기고



임진왜란 시기 조선과 명의 군사 협력에는 기본적인 입장 차이가 존재했다. 최동단의 대(對)여진 방어선이 구축된 요동반도를 건너 조선으로 들어온 명군에게는 죽음을 무릅쓰고 싸울 이유를 찾기 어려웠다. 명 조정도 여진과의 최전방 접경인 요동반도를 뒤로하고 깊숙이 남진해 들어가는 자국 군대가 필요 이상의 피해를 당하면서까지 남의 땅에서 피 흘려 싸울 이유를 찾기 어려웠다. 명나라에게 출병의 출발점과 궁극점이 자국의 안보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1593년 1월 27일(음력) 벽제관 전투 패퇴 이후 명군은 일본군과 교전을 멈추고 강화교섭을 시작하며 전쟁을 교착 상태로 이끌었다. 명군과의 군사 협력을 멈출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조선은 어떤 노력을 쏟았을까?


 

물러서는 명, 싸우자는 조선

명군은 1593년 1월 9일(음력) 평양성 전투에서 이기고 약 2주 만에 임진강 북단까지 내려오면서 전세의 주도권을 잡았다. 명군의 자신감은 하늘로 치솟아 2월에 한성을 수복할 것이라 자신했고 조선은 피폐한 상황에서 최대한의 후방 지원으로 이에 응답하고자 했다. 하지만 명군의 승승장구는 오래가지 못했다. 1월 27일(음력) 제독 이여송이 이끈 부대가 벽제관(지금의 고양시 인근)에서 일본군의 매복으로 일격을 당한 후 진군을 멈췄기 때문이다. 평양에서 후퇴해 한성에 결집해 있던 일본군의 반격이 만만치 않음을 경험한 명군 지휘부는 한성 진공이 어려움을 깨닫자 군량 운송 지연 등 전선의 교착에 대한 모든 책임을 조선에 돌리기 시작했다. 벽제관 전투가 공식적으로 확인된 2월 5일(음력) 조정에는 조선군의 거짓 보고로 말미암아 벽제관에서 기습 공격을 당한 것이라는 명군의 불평에 대한 보고가 올라왔다. 조선 책임론은 다른 곳에서도 찾을 수 있다. 경략 송응창은 군량 운송의 지연과 관련하여 조선에 대해서 책임자의 처형 등 극강의 처방을 요구하고 조선측의 지연으로 인해 한성 진공이 늦어지고 있다며 비난을 쏟아냈다. 그리고 송응창은 명군이 조선의 책임 방기 속에서도 평양, 개성, 벽제관에서 승리해 평안도, 황해도, 강원도, 경기도 지역을 회복하며 소임을 다했기에 이제 한성을 비롯한 남은 지역의 회복은 조선군이 맡아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이처럼 명군은 한성 진공을 포함한 전투의 열쇠를 조선에 넘겨주고 후방에서 지원하는 위치로 서서히 뒷걸음치기 시작했다.


조선 조정은 명군을 설득하면서 동시에 명 조정을 직접 상대하는 방법을 모색한다. 그중 하나가 평양성 전투에 대한 사은(謝恩)의 명목으로 작성된 주문(奏文)을 통해 서 벽제관 전투 이후의 대책 방안을 제시하는 전략이었다. 주문은 취지에 맞게 평양성에서 거둔 명군의 승리를 생생하게 묘사하는 한편 세 가지 측면에서 우회적으로 명군의 전투 재개를 호소했다.


첫째는 전쟁이 끝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국도인 한성도 아직 회복되지 못한 상황을 가리킨 것으로 명군이 진군해야 하는 시급을 이유를 역설하였다. 둘째는 명군이 회군하였을 때 참전 명군의 아킬레스건인 일본군이 재침하리라는 것을 연계하여 명군의 전투 재개를 주장하였다. 셋째는 절강 포수 5천 명을 파견하여 남해안을 포함한 조선 전역에서의 일본군 격퇴를 강조함으로써 명군이 강화 협상을 통해 부산 등 남해안 일부 지역으로의 일본군 철수를 허용할 틈을 원천적으로 봉쇄한 것이다.


 

순망치한의 역이용

벽제관 전투로부터 약 2주 뒤인 2월 12일(음력) 조선군은 자력으로 행주산성에서 일본군을 격퇴하며 대승을 거뒀다. 임진강 이남에서의 승전이기에 더욱 값진 의미가 있었다. 이제 조명 연합군이 한성 수복을 위해서 일본군에서 결정적인 한 방을 날릴 때가 오지 않았는가?


그러나 상황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행주대첩 이후 명군은 본대를 평양으로 철수시킨다며 요지부동으로 버텼기 때문이다. 조선은 벽제관 전투 이후의 방식, 즉 명 조정을 직접 상대하는 전략을 그대로 유지하며 두 가지 압박 카드를 새로 꺼낸다.


먼저, 일본군의 증파 가능성이었다. 일본군이 물러가기는커녕 병력 증강을 한다면 이는 여태까지 한성 수복을 장담한 명군의 실패로 야기된 상황일 수밖에 없고 따라서 명 조정으로 받을 문책은 불을 보듯 뻔한 것이었다. 또 하나는 일본군의 명 본토 해상 공격설 및 북경 방어론이다. 핵심 요지는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을 그대로 놔두면 황해, 경기 등 서해안에서 수로를 따라 계주, 천진에 어렵지 않게 상륙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일본군이 천진까지 해상 공격을 감행할 수 있다는 소리는 북경도 위험할 수 있다는 뜻이기에 충분히 명 조정을 자극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단순가설이 아니라 조선 서해안의 지리적, 지형적 특성이라는 객관적인 근거가 있었다. 이런 측면에서 일본군의 명 본토 공격설은 참전이 명의 자국 안보를 위함이라는 순망치한(조선이 무너지면 명도 위태롭다)의 논리를 적극적으로 역이용 한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후 압록강이나 임진강이아닌 전라도 해안에서 일본군이 북경을 타격할 경우를 포함, 명의 사활을 위해서 일본군을 조선에서 격퇴해야 한다는 명 조정 내 주전론을 북돋는 데 일조했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학술기고

 

 

명은 임진왜란 참전부터 철저히 순망치한의 시각에서 조선을 바라보았다. 이런 이유로 행주대첩 이후 사기가 높아진 조선군과 힘을 합치면 일본군을 한성에서 쫓아낼 수도 있는 상황이 됐어도 오히려 물러섰던 것이다. 조선은 명의 선택에 따라 전쟁의 승패가 갈릴 수도 있는 어려운 처지였지만 일본군의 완전 구축만이 자국의 안보를 위한 길임을 잊지 않았다. 전선의 교착 상태에서도 재침설 및 본토 공격설 등을 제시하며 명을 상대로 위기감 조성 전략을 구사한 이유는 바로 자국 안보라는 원칙을 지키고자 했기 때문이다. 벽제관 전투는 조선과 명이 같은 전장에서 각자의 안보 수호를 위해 서로 다른 해법을 찾고 있는 모습을 생생하게 비추고 있다. 오늘날 급변하는 동북아 정세를 맞이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