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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로 읽는 발해사
발해인은 산과 바다를 넘어 무엇을 찾고자 했을까?
  • 임상선 재단 한국고중세사연구소 연구위원

7세기말~10세기초 신라와 함께 남북국을 이루어 200년간 존속했던 고대국가 발해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발해와 관련된 1차 사료와 새로 발견된 자료를 중심으로 역사 여행을 떠나 보자. 해석의 다양성, 사료의 중요성과 함께 발해사의 감춰진 이야기들을 들춰보는 재미를 선사할 것이다.


8세기부터 9세기 후반까지 동아시아는 이전의 여느 시기보다 평화로웠고 발해는 남쪽의 신라, 서쪽의 거란, 남서쪽의 당 그리고 동해 건너 편의 일본과도 활발히 교류했다. 발해인 중에 공식적인 국가 사절이 아니면서도 산과 바다를 넘어 저편의 세계를 방문한 이들이 있었다. 이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찾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청암사

발해 승려 정소가 827년 세웠다고 하는 청암사(青岩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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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요녕성 북진시 의무려산 소재

청암사 안내문에는 최근의 자료를 참조하여 정소가 세운 천추만고사(千秋萬古寺)의 후신이라 함




 

발해 구도인(求道人)관련 자료

        

자료1 나 또한 승려 되기를 기약하고 책 보따리를 매고 와서 패업을 우러렀다. --- 장경 5년에 일본 대왕이 멀리서 백금을 하사하여 멀리 장안에 이르렀다. 소자는 금과 서신을 전해 받아 철륵(암자)까지 가지고 가서 전달했다. 영선대사는 금을 받고서 1만 개의 사리, 새로 번역한 경전 2, 조칙 5통 등을 가지고 와 소자에게 맡기며 일본에 가서 나라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을 전해주길 청하였다. --- 돌아오는 날에 임박하여 또 금 백냥을 부쳤다. 태화 247일에 영경사에 돌아와 영선대사를 찾았으나 세상을 떠난 지 오래되었다. 나는 피눈물을 흘리고 비통함이 산이 무너지는 듯했다.

余亦身期降物負笈來宗覇業 --- 長慶五年日本大王遠賜百金達至長安 小子轉領金書送到䥫懃仙大師領金訖 將一万粒舎利新經兩部·造勅五通亦囑附小子 請到日本答謝國恩 --- 臨迴之日又附百金 以太和二年四月七日却到靈境寺求訪仙大師亡來日久 位我之血崩我之痛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3, 개성 5840 73일조

 

자료2 옛날 이광현은 발해인이다. 어려서 고아로 살며 하인이 몇 명이고, 집안의 재산이 아주 많았다. 광현의 나이 바야흐로 약관에 고향 사람의 배를 따라 청사, 회수와 절강 사이를 왕래하며 교역하였다. 두루 돌아다닌 후 바다를 건너다가 한 도인을 만났다. 함께 배에서 아침 저녁으로 광현과 신라, 발해, 일본 등 여러 나라를 두루 돌아다닌 것을 이야기하였다. --- 뒤에 동쪽 해안에 이르러 내리며, 도인은 스스로 신라와 발해를 떠돌겠다 하며 광현에게 이별을 고하였다.

昔李光玄者 渤海人也 少孤連氣 僮僕數人 家積珠金巨萬 光玄年方弱冠 乃逐鄉人舟船 往來於青社淮浙之間貨易 巡歷後卻過海 遇一道人 同在舟中 朝夕與光玄言話 巡歷新羅渤海日本諸國 --- 後至東岸下船 道人自欲遊新羅渤海 告別光玄

정통도장(正統道藏),금액환단백문결(金液還丹百問訣)



발해의 승려 정소


자료1은 발해의 승려 정소(貞素)에 대한 내용이다. 정소는 당에 들어가 구법활동 중 응공(應公)을 스승으로 삼았는데, 영선은 바로 응공의 스승이었다. 825년 일본 대왕의 백금과 서신을 장안에서 받아 오대산에 이르러 영선에게 전했고, 영선의 부탁으로 사리와 경전 등을 일본 대왕에게 전하였다. 다시 일본 대왕의 금 백 냥을 전하기 위해 828년 영경사에 왔지만 영선은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정소는 영선과 일본 조정을 위해 다섯 번에 걸쳐 여행을 하고, 이 가운데는 네 번을 당 발해 일본 발해 당에 이르는 큰 바다를 건넜다. 정소는 영선의 죽음을 애통해 하며 글을 남겼다. 그 후 신라 장보고의 도움을 받은 일본의 엔닌이 중국 오대산을 방문해 정소의 글을 보고 자신의 책에 기록한 것이 바로 위의 자료다.

    

외교사절로서 정소의 행적


정소가 영선을 위해 물건을 전하고 받은 것은 일본의 다른 기록에도 있다. 826년 고승조(高承祖)를 대사로 하는 발해 사절이 일본을 방문해 영선의 글과 물건을 전하였는데, 일행 중에 정소가 있었다.1 고승조가 돌아갈 때 천황이 영선에게 황금 백량을 전하도록 맡겼고, 발해 선왕宣王이 당에 들어가는 사절에게 그것을 전하게 했다. 오대산에 갔으나 영선은 이미 죽어 전하지 못하고, 사절단은 백금을 가지고 바다로 돌아오던 중 도리포(塗里浦, 오늘날 중국 요녕성 대련 부근)에서 폭풍을 만나 모두 빠져 죽었다. 일본은 이러한 소식을 842년 하복연(賀福延)이 가져온 발해국왕 대이진(大彜震)의 글을 통해 알게 되었다.2 정소는 승려이면서 외교사절의 일원이었다.

    

발해의 도사이며 무역상이었던 이광현


자료2는 명나라 정통 시기에 도교 관련 저술을 집대성한 도장(道藏)에 있는 발해 도가 수련인 이광현에 대한 내용이다. 이광현은 어려서 부유했지만 부모를 잃고 형제와 하인 몇 명과 살다가, 구도에 뜻을 두고 20세에 집을 나와 순력에 나섰다. 24세경 귀향길에 백세가 넘는 도인을 만나 장수 비법을 전수받고 수련한다. 하지만 이광현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또 다른 도교 수련법을 익히기 위하여 여행을 하다 889(혹은 909) 숭고산(嵩高山, 오늘날 하남성 등봉시의 숭산)에서 현수선생(玄壽先生)이라는 도인을 만나 원하던 바를 이루게 된다. 이광현의 순력은 상업 활동을 하던 고향 사람들과 함께 했고, 해객론(海客論)3에서는 이광현을 상고(商賈, 장사꾼)’라 기록한 것으로 보아 무역상으로 볼 여지도 있다.


발해의 무역상들


이광현의 저술에는 발해국 상인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요동 혹은 그 남단의 발해국 서쪽 해안 출신이고, 중국 동해안의 산동반도와 양자강 사이를 왕래하며 연안 무역에 종사했다. 혹은 해안을 떠나 서해를 횡단하며 신라 서쪽 해안에 도착해 무역 활동을 하고, 이곳에서 다시 발해 땅으로 이동하는 등 당, 신라, 발해 모두를 자유롭게 방문했다. 왕래하는 중 이광현과 같은 종교인을 목적지에 하선시켜 주는 등 인적 교류도 했다. 이광현의 집안을 비롯해 같은 고향 마을의 발해 상인들은 단기간이 아니라 수십 년 동안 해상무역활동을 했고, 그 결과 상당한 정도의 부를 축적하는 등 당시 동아시아의 유력한 해상 세력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정소와 이광현을 통해본 동아시아 세계


9세기 동아시아는 장보고나 엔닌의 활동을 통해 알 수 있듯 입출국이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지만, 교류 자체가 불가능한 시기는 아니었다. 당나라의 입출항인 등주(登州)에 신라관(新羅關)과 발해관(渤海關)이 함께 설치되어 있었다. 정소는 승려의 신분이면서 외교 사절의 일원으로서 당, 발해, 일본을 방문했고, 이광현과 무역상은 당, 신라, 발해를 자유롭게 왕래했다. 당과 일본에는 발해도(혹은 발해로), 발해에는 신라도(新羅道), 거란도, 영주도·조공도(唐道, 당나라로 가는 길), 일본도가 있었다. 당시 동아시아는 국경을 넘지 못하는 불통의 시대가 아니라, 거친 파도의 위험을 무릅쓰며 서로를 찾아가던 교류의 세계였다. 발해와 신라는 적대 관계여서 교류가 없었으니 남북국으로서 일체감이 없고, 나아가 한국사가 아니라는 중국의 주장이 역사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을 바로 이 대목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각주

1 일본후기(日本後紀)34, 천장 35

2 속일본후기(續日本後紀)권제11, 승화 93

3 해객론금액환단백문결의 또 다른 판본. 여기서는 피휘(避諱)로 인하여 이광현을 이광원(李光元), 현수선생을 원수선생(元壽先生)이라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