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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Q&A
고구려가 속말말갈을 지배한 고고학적 근거가 있을까?
  • 권은주(재단 한국고중세사연구소 연구위원)

역사 궁금증, 답해드립니다

동북아시아 역사와 독도·동해에 관한 독자 여러분의 질문을 받아 재단 소속 연구위원이 알기 쉽고 명쾌하게 설명해드립니다.

 

    

Q. 속말말갈이 고구려에 복속되어 고구려민이 되었는데 고구려가 속말말갈을

통치한 고고학적 증거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김민재님 질문




<속말말갈은 누구인가>


말갈(靺鞨)은 우리 민족의 주류가 되는 예맥(濊貊)과 함께 중국 동북지역(랴오닝성 동부, 지린성, 헤이룽장성)에 오랫동안 거주하던 사람들이다. 5세기경에는 물길(勿吉)로 불리다가 6세기 중반 이후 말갈로 불렸다. 이전에는 비슷한 사람들을 숙신(肅愼), 읍루(挹婁)라고도 불렀다. 문화적으로는 예맥과 달리 조두(俎豆:굽다리 접시 모양)를 사용하지 않았고 언어와 생활풍습 등이 달랐다고 기록에 나온다. 정치적으로는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대군장이 없는 등, 부여와 고구려에 비해 발달이 늦었다.


그러나 물길은 5세기 중후반에 정치군사적으로 상당히 성장하여 494년에는 북부여를 멸망시킬 정도가 된다. 그리고 물길에서 말갈로 넘어갈 무렵 가장 큰 세력으로 7개의 부()가 등장한다. 주 거주 지역에 따라 속말말갈백산말갈흑수말갈 등으로 불리게 되는데, 속말수(지금의 송화강) 유역에 있던 말갈이 바로 속말말갈이다. 북부여를 멸망시킨 세력 역시 속말말갈로 본다. 그런데 이 단계가 되면, 말갈은 하나의 종족 집단이 아니라 상당수의 예맥인들(부여옥저인 등)이 포함된 다종족 집단으로 보아야 한다.

     


     

<속말말갈 문화의 고고학적 특징>


고구려가 속말말갈을 어느 순간부터 지배한 것은 분명하다. 이에 대한 고고학적 근거가 있는지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속말말갈만의 문화적 특징이 고고학으로 구분되는가를 먼저 따져 보아야 한다. 속말말갈의 대표적인 유적은 중국 지린성 유수 노하심(榆樹 老河深) 상층 유적(6~7세기), 영길 양둔 대해맹(永吉 楊屯 大海猛) 3기 유적(6~7세기), 영길 사리파(永吉 査里巴) 유적(6~8세기) 등이 있다.


흔히 말갈 유적으로 인정되는 요소는 반지혈식 주거지와 토광묘 그리고 말갈관이다. 그러나 반지혈식 주거지는 건축 기술이 발달하지 못한 선사시대나 추운 지역에서 흔히 보인다. 토광묘 역시 보편적인 무덤 양식이다. 그러므로 말갈 유적의 가장 대표적인 지표는 말갈관이라고 할 수 있다. 말갈관의 특징은 아가리가 바깥으로 구부러져 있고 깊이가 깊으며 편평한 바닥을 기본으로 한다. 모래가 많이 섞인 점토를 이용하여 손으로 만들었고, 비교적 낮은 온도에서 구워 강도가 약하다. 송화강 유역의 말갈관은 몸체가 날씬한 것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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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parison of the style of Malgalguan(靺鞨罐: Malgal style jar)
Hongjun-eojang Ancient Tombs / the relics of Laoheshen /

the relic of Dahaimeng / the relic of Chariba



<고구려의 속말말갈 지배 방식을 이해해야>


송화강 유역의 속말말갈 문화는 흑룡강 유역에서 확인되는 흑수말갈 문화와는 확실히 구분된다. 부여고구려와 오랫동안 관계를 맺고 인접하거나 섞여 살았기 때문에 부여고구려 문화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속말말갈 무덤에서 토광목관묘와 석축묘(석관묘와 석실묘)는 부여와 고구려 무덤 양식의 영향이다. 속말말갈 유적에서 나온 두 개의 손잡이가 달린 항아리는 부여의 대표적인 토기 양식이고, 고운 점토와 물레를 사용해 토기를 만드는 기술은 고구려의 영향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만으로는 고구려가 속말말갈을 지배했다는 고고학적 증거라고 하기 어렵다. 때문에 중국 학계에서는 속말말갈에 대한 고구려의 지배를 부정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고구려의 속말말갈 지배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사실 이 문제는 고구려의 복속 세력에 대한 지배 방식을 이해하면 쉽게 풀린다. 대외 정복을 통해 국가의 형성과 발전을 이룩한 고구려는 내부에 다양한 문화와 세력이 공존하는 다종족 국가였다. 고구려는 복속 집단의 성격에 따라 지배 방식을 달리했다. 반농반렵과 비정주적인 말갈족의 특성을 고려하여 가장 효율적인 지배 방식을 취했다. 고구려의 성-촌 지방 지배 체제에서, 성과 촌 주변에 기미주 또는 기미부락으로 편제하였다. 그 예로 속말말갈 계통인 이다조(李多祚, 654~707)삼한의 귀한 혈통이라고 할 만큼 고구려와 관련이 있는 인물이었다. 그의 묘지명에는 고구려 개모성(蓋牟城) 지역의 개주(蓋州) 출신으로 증조부터 부친까지 고구려의 기미주인 오몽주(烏蒙州)의 도독을 역임하였다는 사실이 나온다. 이타인(李他仁, 609~675)의 묘지명에도 고구려의 책성인 책주(柵州) 아래에 기미되어 있던 말갈 37 부락이 확인된다.


고구려는 일찍이 부여 방면으로 영역을 확대하고, 길림시 인근에 성을 새로 쌓거나 부여성을 다시 활용하여 속말말갈을 다스렸다. 용담산성은 속말말갈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대표 거점이었다. 고구려는 속말말갈 복속 집단에 정주 농경민보다 낮은 세금을 부담시키고 부락 단위의 반자치를 허용하면서 유사시에 군사적 동원을 강제하였다. 이는 생활 방식과 문화를 강제로 변화시키지 않고 간접지배와 직접지배를 병행하는 특수한 지배 형태였다. 따라서 속말말갈 유적에서 고구려식 유물이 나오지 않는다고 해도, 고구려가 속말말갈을 지배하지 않았다고 단정할 수 없다. 더욱이 제대로 보고된 속말말갈 유적이 얼마 안 되어, 앞으로 고구려식 유물을 발견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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