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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동아시아 공동체를 향해
  • 김영호,동북아평화센터 이사장·전 산업자원부 장관

역사 화해와 한일 시민사회의 협력  동아시아 공동체를 향해


김영호, 단국대학교 석좌교수·전 산업자원부 장관


경북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오사카시립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후 경북대, 오사카시립대, 도쿄대 교수로 재직했다. 산업자원부 장관으로 퇴임한 후 유한대 총장직을 맡으면서 ·일 지식인 공동성명을 주도했으며, 단국대 석좌교수 및 한국학중앙연구원 석좌교수로 재직한 바 있다.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회장, 한국CSR표준화포럼 회장,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 이사장, 한일지식인회의 공동대표 등으로 다양한 활동을 담당하였고, 현재는 동북아 평화를 위해 한일 시민사회의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

 

 

올해는 2010·일 지식인 공동성명이 발표된 지 10주년을 맞는 해다. 한국과 일본의 지식인 1천여 명은 한·일 강제병합 100년을 맞아 ‘1910년 한국병합조약은 불법적으로 체결하였으므로 원천 무효라는 성명을 서울과 도쿄에서 동시에 발표했다. 한국 측 발기인이자 주역이었던 김영호 단국대 석좌교수를 만나 ·일 지식인 공동성명’ 10주년을 돌아보고 바람직한 과거사 청산과 한일 시민사회의 협력 방안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대담 | 유하영, 재단 독도연구소 연구위원

 

 

 역사 화해와 한일 시민사회의 협력    

 

Q ·일 지식인 공동성명’(이하 성명’)에서 어떤 역할을 하셨는지, 특히 한일 양국에서 1천 명이 넘는 이들이 참여하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김영호 2010년은 한·일 강제병합 100, 안중근 의사 순국 100년을 맞는 해였습니다. 어느 날 안중근 동양평화론의 재조명이라는 제목의 글을 쓰면서 감동으로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감동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안 의사가 나에게 행동으로 앞장서라며 무슨 일인가를 시키는 것 같아서 감전된 기분으로 일본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먼저 도쿄대 교수인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선생께 선생은 100년 전 한국을 식민지로 만든 한국병합조약이 강압에 의해 체결된 엉터리 조약이라는 것을 잘 알지 않느냐? 조약 책임자인 고종과 순종의 서명도 없었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지 않느냐. 이제라도 지식인들이 모여서 불법 무효 선언을 하고 양국 관계에 새로운 길을 내자.”고 호소했습니다. 일본의 대표 잡지 세카이(世界)의 편집장이자 이와나미 서점의 오카모토 아쓰시(岡本厚) 사장, 아사히 신문의 오다가와 고(小田川興) 편집위원에게도 이 이야기를 한 뒤 이튿날 아침 비행기로 일본에 가서 그분들을 설득했습니다. 결국, 하루키 선생과 제가 초안을 잡기로 한 뒤 한국으로 돌아와 이태진, 정창렬, 이장희 교수, 김경희 사장 등이 함께 본격적으로 추진하게 된 것입니다. 언젠가 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이 개최한 유럽동양학대회에서 기조 강연을 했는데 제목이 안중근 쿠데타였어요. 그리고 그 강연을 청취한 하이델베르크대 일본학연구소장이 이제는 일본의 시각으로 아시아를 보아선 안 되겠다고 말한 뒤 한국학연구소가 생기는 것을 보고, 진정한 의미의 안중근 쿠데타가 일어났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Q. 성명에 참여한 한·일 지식인들이 병합조약의 효력과 해석에 어떤 의견을 냈는지 궁금합니다. 선언문에 대한 합의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선언문 제정 과정을 말씀해주시면 후대에도 귀감이 될 것 같습니다.

 

김영호 성명서를 만드는 것은 처음부터 난산이었습니다. ‘불법이자 무효’, ‘조약 체결 과정에 결함과 오류가 있었다라는 표현을 확실히 하다 보니 의견 합의가 순조롭지 않았습니다. 한일기본조약 제2조는 ‘1910822일 및 그 이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은 이미 무효로 한다고 명시하고 있지만 이미에 대한 양국의 해석은 달랐습니다. 한국은 조약의 성립에서부터 원천 무효(already null and void)라고 해석했고, 일본은 일단 합법적으로 성립했다가 대한민국 정부 수립 혹은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 이후 무효가 되었다고 해석했습니다.

일본의 해석대로라면 식민 지배는 합법이 되고, 일본군위안부나 강제동원 같은 범죄에 책임을 물을 수 없습니다. 하루키 선생 등은 한국에 죄의식을 가지고 있는 양심적인 분들입니다. 저와 그분들과의 개인적 교감, 지식인으로서의 역사적 양심과 의지가 병합조약을 불법이자 무효로 규정하게 한 것이고 성명에 그 단어를 담게 한 것이지요. 이로써 한일관계에서 가장 난해한 문제가 풀리는 역사적 계기가 마련된 것입니다.

 

역사 화해와 한일 시민사회의 협력

 

Q 2010년 성명의 의미를 계승하려는 노력이 어떻게 이어져 왔는지, 그동안 한일 양국에 끼친 사회적·정치적 영향에 대해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김영호 1995년 일본의 무라야마(村山) 총리는 한국에 대한 식민 지배와 침략의 부당성을 반성하고 사죄했습니다만, 한일병합조약 등 한말 제() 조약의 유효성은 인정했습니다. 그런데 성명이 발표된 뒤 서울에서 함께한 어느 조찬 자리에서 무라야마 총리는 제게 우리 성명을 지지한다고 하면서 한일병합조약은 유효하다고 주장한 종전의 입장을 철회했습니다. 총리가 이 정도로 극적인 태도 변화를 보이고 자신의 의견을 선명하게 나타냈다는 것 자체가 상당히 중요한 겁니다. 무엇보다 우리 성명의 가장 큰 성과는 2010년 당시 각의(閣議) 결정을 통과하여 간 나오토(菅直人) 총리가 한국인들은 그 뜻에 반하여 이루어진 식민 지배에 의해 국가와 문화를 빼앗기고 민족의 자긍심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 식민 지배가 야기한 큰 손해와 고통을 통절하게 반성하고 사죄한다.”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하도록 한 것입니다. 이는 역대 일본 총리의 담화 중 한국으로서는 가장 높이 평가할 만한 것이고, 또 일본의 과거사 담화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으로 성명의 내용과도 75% 비슷합니다.

우리 성명은 한국의 법조계에도 큰 영향을 미쳐서 2011년 헌법재판소는 국가가 일본군위안부문제 해결에 나서지 않는 것이 위헌이라 결정했고, 2012년 대법원은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일본의 배상 책임을 인정했습니다. 2018년에는 1인당 1억 원의 위자료를 지불하라는 원심을 확정했고요. 그리고 2019년에는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손해배상을 외면한 미쓰비시와 신일철주금현 일본제철의 한국 내 자산을 동결하라는 판결을 내렸어요. 이는 일본의 식민 지배가 불법이라는 전제하에서 내린 판결입니다.

그런데 이르면 오는 84일부터 이들 자산의 현금화를 위한 절차에 돌입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 아베 정부는 자국 기업의 자산 매각과 현금화가 실행되면 한국에 경제 보복을 하겠다며 크게 반발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태를 막으려면 강제동원 문제에 대한 새로운 해법을 마련해야 합니다. 정면충돌의 관리 정책은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원칙을 어겨가며 안일하게 타협하면 지금까지의 노력이 무위로 그칠 수도 있습니다. 아마도 이번 가을은 뜨거운 가을이 될 것 같습니다.

 

 

Q 2010년 이후 다른 국가에서 이 성명에 얼마나 공감하고 지지를 표했는지, 당시 함께 연대한 지식인들과 계획하고 있는 또다른 프로젝트가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김영호 이 성명이 나오자마자 중국조선사학회 및 중국일본사학회의 역사학자 400명이 지지 선언을 했어요. 2015·일 그리고 세계 지식인 공동성명에서는 노엄 촘스키, 브루스 커밍스, 알렉시스 더든 등 세계적 석학 500여 명의 지지 성명도 받았습니다.

우리는 오랜 한일 갈등의 근원이 된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을 심도 있게 짚어보는 국제 심포지엄을 2015년부터 4년째 개최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우리 한국을 일본과 싸운 연합국의 일원으로 간주했지만, 결국 일본과 영국의 방해와 거부로 조약 체결의 당사국이 되지 못했습니다. 한일청구권협약, 독도 문제 등도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이 만들어낸 하위 조약입니다.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이 담고 있는 문제는 국제성을 띠는 주제이기 때문에 한국과 일본은 물론 중국, 미국, 캐나다, 러시아, 호주 등의 국제 학계가 샌프란시스코 체제를 비판적으로 검토하자는 데 의견을 함께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통렬한 반성으로 역사를 성찰하는 많은 지식인뿐 아니라, 성숙한 의식으로 역사 화해를 이루고자 하는 일반 시민사회의 깊은 공감을 모아서 전범국을 최대 수혜국으로 만든 샌프란시스코 체제를 완전히 해체하기 위해 벼르고 있습니다.

 

역사 화해와 한일 시민사회의 협력

 

Q 한일 양국의 역사 갈등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고 있습니다. 한때는 단단히 결속했던 지식인들의 고리뿐 아니라 시민사회 간 연대도 퇴보한 것은 아닌가 우려됩니다.

    

김영호 역사 갈등은 증폭되었을지언정 시민 연대골이 깊어진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아베는 전쟁 및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행사를 영구히 포기한다라는 내용을 담은 평화헌법(헌법 9)을 개정해 일본을 전쟁 가능국으로 바꾸려 합니다. ‘헌법 9조냐 안보냐하는 양자택일 구도 속에 시민들을 가두고 포퓰리즘으로 자신의 지지율을 끌어올리는 데 악용합니다.

하지만 일본에는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郞)를 중심으로 헌법 9조 개악(改惡)을 저지하기 위한 시민단체 ‘9조의 회(九条)’ 등이 활발히 활동하고 있지요. 일본의 깨어있는 시민들은 자국의 침략 전쟁에 대한 진정성 있는 사과와 해결만이 아시아의 평화를 실현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베의 개헌 음모에 대항하여 헌법 9조를 지켜낸다면 그것은 일본 역사상 최초의 시민혁명으로 기록될 것입니다.

독일의 소설가 귄터 그라스(Günter Grass)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우슈비츠를 해결하지 않는 한 통일 국가를 생각해서는 안 된다. 나치즘을 극복하지 못하고 과거를 반성하지 않는다면 통일할 자격이 없다.”라고요. 오에 겐자부로도 전쟁을 기억하는 우리는 아시아에서 일어난 일을 평생 기억하고 속죄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의 근본이다. 한국과 중국에 진정으로 사과하지 않는다면 일본인은 지구에 살 자격이 없다. 일본의 발전보다 헌법 9조가 더 중요하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동서양을 대표하는 두 양심이 하늘의 천둥소리와 같은 발언을 했다는 점이 정말 놀라웠습니다.

 

 

Q 앞으로 한일 양국의 시민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좋을까요? 각국의 평화와 번영의 질서 구축을 위해 지향해야 할 궁극적 방향을 제시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김영호 2001년 남아공 더반에서 열린 유엔 회의에서는 인도(人道)에 반하는 죄’(crimes against humanity)라는 개념으로 노예제도와 식민 지배를 공개 석상에서 최초로 비판했습니다. 당시에는 법적 책임을 부정하는 식민지 종주국들의 완강한 저항으로 난항을 겪었지만, 우리는 식민 지배를 국제법상 인도에 반하는 죄로 보고 법적, 외교적, 학제적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식민지 범죄에 대한 책임을 묻는 작업은 이미 세계적 흐름이고, 그 결과 식민 지배가 전쟁 범죄와 같은 개념으로 성립되었습니다.

그동안 한일 시민사회의 발전을 위해 양국의 단체를 연결하려고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그 결과 지난 72, 한일 시민단체 500여 개 이상이 원격으로 한 데 모여 한일 화해와 평화 플랫폼발족식을 열었습니다. 조직의 명칭에 플랫폼(Platform)’이라는 단어를 붙인 것은, 시민이 앞장서서 한일관계의 문제점을 풀어보자는 취지입니다. 아시아에서 이미 시민혁명에 성공한 한국과, 시민혁명을 진행 중인 일본이 시민 플랫폼을 만들면 중국과 대만과 홍콩의 잠재적 시민이 연합해서 대단원의 시빌 아시아(Civil Asia)’를 만들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역사 화해와 한일 시민사회의 협력     


Q 식민 지배의 근거가 된 1910년 한·일병합조약이 불의 부당한 것이며 원천 무효라는 의미 있는 문제를 제기한 2010년의 성명은 한일관계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 중 하나였습니다. 정부와 학계는 앞으로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요? 특히, 역사 화해를 통해 동북아 평화를 이룩해야 하는 사명이 있는 재단에도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김영호 2010년의 ·일 지식인 공동성명진행 과정을 돌이켜보면, 폭풍 속에서 기적적으로 한일 간 다리를 건설한 사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한일 지식인 1천여 명이 한일병합의 불법 무효를 공동으로 선언했고, 일본 각의의 결정에 따라 간 나오토 담화가 나왔고, 전 세계의 저명한 지식인 500여 명이 지지 성명을 발표했으며, 일본의 시민사회 대표들은 3·1운동 100주년 범국민대회에서 한일시민사회 공동평화선언을 통해 우리 성명에 대한 지지를 다시 한번 표명했습니다.

더구나 국제법의 건설자 프란시스 레이(), 헨리 허드슨()도 강압에 의한 국제 조약의 대표적인 예로 을사보호조약을 들고 무효를 강조했습니다. 1935년 유엔의 전신인 국제연맹은 역사상 효력이 발생할 수 없는 조약이라 하면서 한일병합을 불법이라고 판단했고, 1963년에는 을사보호조약의 원천 무효를 결의하는 내용의 보고서가 유엔 총회에 제출되어 채택됐습니다.

그런데, 일본 외무성 홈페이지의 주요 문서에는 간 나오토 담화가 빠져있습니다. 이는 아베가 각의의 의결까지 거친 전 정부의 공식 입장을 철저히 무시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더 큰 문제는 한국도 간 나오토 담화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는 거지요. 이 담화의 중요성을 깨달아야 합니다. 무라야마 담화와 함께 간 나오토 담화를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으로 재확인시키려는 노력이 있어야 해요. 1998김대중오부치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에 담긴 내용과 성과를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지금껏 일본은 정치적으로는 사죄를 표명했지만, 법적으로는 식민 지배의 합법성을 전제로 해왔습니다. 그 한계를 돌파해서 극적으로 이룩한 것이 한일 지식인 1천 명의 공동성명이고, 간 나오토 담화입니다. 폭풍 속에서 겨우 만든 이 다리를 무너뜨려도 좋다는 이야기입니까? ‘안중근 쿠데타는 법적 정의와 식민 지배의 불법성에 대해 전 세계인의 무한한 지지와 합의를 끌어냈습니다. 이제 단순한 반일과 반제국주의를 넘어 분쟁을 평화의 축으로 바꾸는 역전의 시대를 열어갈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