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오늘날 발굴된 연해주 지역 발해 성곽에는 고구려, 당, 말갈의 특징이 남아있다고 합니다. 연해주 발해 성곽이 지니고 있는 고구려적 특징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 김민재 님 질문 |
연해주 지역에서 발굴된 발해 시기 유적의 수는 300여 개소(所)가 넘는다. 여기에는 말갈-발해 시기의 것으로 분류된 유적도 포함된다. 상당수 러시아 학자는 발해와 말갈을 문헌상으로는 물론 고고학적으로도 구분하여 분류하는 한편, 한국 학계는 말갈을 발해의 한 부분으로 해석한다. 발굴과 해석을 통해 러시아와 한국 학계의 시각차를 좁히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다. 현재까지 연해주에서 조사된 발해 성터에서 고구려의 전통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 곳은 두만강 위쪽에 위치한 연해주 크라스키노 발해성, 연해주 동북부 발해 석성들이다. 이곳을 중심으로 고구려적인 특징을 살펴보자.
크라스키노성 북서쪽 내벽 축조 모습 (2018년 발굴)
크라스키노성의 고구려적 특징
크라스키노성(Kraskino)은 러시아 연해주 남부 핫산 지역 크라스키노 마을 남쪽 해안가에 위치한 평지성(平地城)이다. 20세기부터 불린 ‘크라스키노’의 이전 이름은 ‘연추’ 혹은 ‘옌츄’ 등으로, 발해(A.D. 698~926)가 설치한 ‘염주(鹽州)’의 근대 명칭이다. 이 성은 재단과 러시아과학원 극동역사학고고학민족학연구소(이하 ‘러시아연구소’)가 공동 발굴하고 그 성과를 통해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하였음이 입증되었다. 또한, ‘발해 조기 문화층’과 고구려 시기의 층위와 유물을 확인함으로써 새로운 염주성 발굴의 전환을 가져오는 큰 성과를 내기도 했다.
특히, 이곳은 평지를 주변으로 산악 지역이 에워싸고 있어 고구려성의 특징 중 하나인 평지성과 산성(山城)의 결합을 충분히 보여준다. 다만, 주변의 산악 지역이 중국과 북한 등의 접경 지역에 위치하여 조사 발굴이 어렵다는 한계가 있다. 이 성은 둘레 1.38km의 말굽형 모양으로, 성벽 안과 밖은 돌로 쌓고, 그 안에 흙을 다진 토석(土石) 혼축의 축조 방식을 취했다. 북벽을 제외하고 동·서·남벽에는 옹성 구조를 지닌 문을 갖추었고, 성벽에는 적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한 돌출부인 ‘치(稚)’를 설치했다. 이는 크라스키노성이 고구려적 특징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크라스키노성 출토 토기와 토층
먼저, 토기는 크라스키노성에서 토기와 토층 가장 많은 수량이 출토된 유물이다. 1980년부터 2018년까지 발굴조사보고서에 보고된 것만 해도 2천 5백 점이 넘는다. 온전한 상태와 편들로 출토되었고 도면상 복원되는 것들도 있다. 토기의 기종과 기형 역시 매우 다양하다.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윤제토기(輪製土器)는 기본적으로 고구려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고, 수제토기(手製土器)는 말갈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다. 그러나 말갈 계통의 토기 중에도 윤제로 성형한 것들이 있는데 이는 발해 시기의 특징적인 현상이다.
다음으로 토층이다. 크라스키노성이 해안에 위치한 관계로 생토 층까지 발굴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러한 한계 보완을 위해 한국과 러시아 양측 발굴단은 확장과 심화 발굴의 이원화를 꾀하여 2015년 발굴 구역의 지표면에서 2m 30cm 깊이까지 심화 발굴을 마칠 수 있었다. 이곳에서는 모두 6개의 생활면이 확인되었고, 발해 이전부터 사람이 생활하고 있었을 가능성을 높여주었다. 토층에서 수습한 목탄의 방사성 연대 측정 결과와, 최하층에서 수습한 고구려계 토기는 크라스키노성의 축조 시기를 고구려로 볼 수 있게 되었다.
고구려 평양성 성곽 축조 공법 ⓒ동북아역사넷
연해주 동북부의 발해 석성(石城)
연해주 동북부의 발해 석성 조사와 연구는 ‘러시아연구소’의 O.V. 디야코바 박사가 주도하고 있다. 조사 지역은 주로 연해주 동북 산악 지역의 미답지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연해주의 고고학자 대부분이 한-러-중 국경 지역인 연해주 남부 지역에 집중하는 데 반해, 디야코바 박사는 접근하기 쉽지 않은 험준한 산악 지대에서 수십 년간을 꾸준히 조사해왔다. 현재 연해주에는 약 40여 개소의 산성이 존재하는데, 특히 동북부에 산재한 발해 석성에서 ‘언덕 위에 자리한 석성-산비탈에 축조한 성터’로 나뉘는 고구려적 축성 양식의 전통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조사 결과는 우리에게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연해주 석성의 건축 기술
발해 시기, 산 정상부에서 비교적 평평한 지역을 골라 돌로 성벽을 쌓은 석성은 별도의 축대를 마련하지 않았다. 석성의 입지로는 산 정상으로 통하는 꼬불꼬불한 비탈길이 있는 곳, 주변의 모든 계곡과 상황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전략적으로 유리한 고지가 선호되었다. 이러한 지형 위에 석성을 쌓기 위해서는 고도의 기술이 필요했다.
석성의 견고함은 돌의 가공 방식에 따라 달라진다. 성을 쌓기 전 2~6m의 기반을 다지고, 그 위에 적절히 가공한 큰 돌들을 쌓았다. 돌의 가장자리에 돌출부를 남겨두고, 위에 얹은 돌이 움직이거나 떨어지지 않도록 계획적으로 설계했다. 돌을 피라미드처럼 쌓아 올려서 위로 갈수록 돌의 크기가 작아지게 했고, 층마다 일정한 규격의 돌을 사용했다. 그래서 하부에는 네모반듯한 방형(方形)의 돌이, 중앙부에는 모서리의 각을 없앤 말각(抹角)된 방형이, 상부에는 얇고 날카로운 돌이 차례로 올라갔다. 석벽의 하부는 내부에서부터 사다리 모양으로 축조되었고, 돌 외에 접착이 될 만한 다른 자재는 전혀 쓰지 않았다. 지리적으로나 보나, 축조 특징으로 보나 연해주의 석성 축조 기술은 고구려와 완전히 일치한다.
이 축성 기술은 고구려 멸망 후, 고구려인이 발해에 유입되던 시기에 도입된 것으로 본다. 디야코바는 ‘산비탈의 성터’에서 ‘고구려의 산성 기술을 그대로 적용’ 했다고 강조한다. 이를 통해 연해주 동북 지역에 산재하는 성터가 고구려의 축성 전통을 충실히 계승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