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침략전쟁에 강제로 동원되었다가 희생된 한국인 약 2만 1천 명이 침략전쟁을 미화하는 야스쿠니신사에 무단으로 합사되었다. 유족들은 아버지를, 형을, 오빠를 더는 모욕하지 말라며 2001년부터 세 차례에 걸쳐서 합사 철폐를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현재 2013년 제소한 소송이 진행 중이다.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에서 제공한 원고 여섯 명의 진술서와 사진을 6회에 걸쳐 연재한다. 지면의 제약으로 진술서 일부만 실었다. 진술서 전체는 재단이 발간한 『식민 청산과 야스쿠니』에 실려 있다.
정리 | 남상구, 재단 한일역사문제연구소 소장 |
재한 군인·군속 재판 항소심 제1회 구두 변론 (2007. 9. 25)
고몽찬의 아들 고인형의 진술서
“고인형 원고의 아버지 고몽찬은 1920년 6월 22일생으로 1942년 3월 육군군속으로 강제동원되었다가 1944년 9월 뉴기니아에서 사망했다. 유족에게 통보도 없이 1959년 4월 일방적으로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되었다.” (2009. 1. 10.)
제 아버지는 1920년 6월 22일 당시 전라남도 제주군 성산읍에서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에 대해서는 이모에게 자주 얘기를 들었습니다. ‘잘생겼고 지혜롭고 훌륭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마을에서도 평판 있는 사람이었다’라고 했습니다. 아버지께서 징집당할 때 저희 집안은 농사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가정은 매우 가난했고 실질적으로 아버지께서 가장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결혼해서 3형제를 낳았습니다. 아버지는 1942년 3월 혹은 4월경에 영장을 받고 징집당했습니다. 제가 2살 때였습니다. 징집 후 가끔 서신을 주고받으며 군사우편저금통장을 보내왔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1945년 8월, 조선은 해방되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아무 연락도 없었습니다. 계속 기다렸지만 결국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어중간한 상태로 둘 수 없었기 때문에 1969년경에 면장을 통해 수소문하여 일본 후생성에 요청해서 아버지의 전사 사실을 확인했고, 사망 신고서를 제출했습니다. 징집된 지 20년 이상 지난 시점이었습니다. 후생성에도 직접 찾아갔는데 ‘지금 유골은 찾을 수 없다’는 대답을 듣고 실망했었습니다. 아버지의 귀환을 마음속 깊이 기다렸지만 포기하는 마음이 없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것을 확인하고는 ‘아… 역시’라는 슬픔과 동시에 ‘나는 천애의 고아구나’라는 기분이 죄어들었습니다. 저는 어머니, 형과도 일찍 사별했기 때문에 혼자서 살아왔습니다. 다시 고독감에 빠져 ‘아버지가 그립다’고 생각했습니다. (…중략…)
힘든 시기를 거쳐 어느덧 아이들을 낳아 기르는 처지가 되어 보니, 부모님에 대한 생각이 더욱 커졌습니다. 일제에 의해 강제로 끌려갔던 아버지, 그리고 남편 없이 우리를 위해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적어도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진상을 명확히 밝히는 것이 효도라고 생각하며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몇 년 전 겨우 정부기록보존소(현 ‘국가기록원’)에서 유수명부(留守名簿)와 피징용자 명부를 발견했습니다. 거기에는 아버지가 보병 제78연대에서 근무했고, 동부 뉴기니아에서 1944년 9월 3일에 전쟁 중 병사(病死) 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되어 있음을 의미하는 ‘합사제’라는 도장을 본 순간 저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버지는 ‘천황’을 위해 목숨을 바친 것이 아니라 강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동원되어 목숨을 잃은 것입니다. 어린 시절 친구에게 ‘너희 아버지는 일본군이었지?’라는 말을 듣고 괴로워한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된 것은 끝없는 불명예입니다. 가족에게 통지도 하지 않고, 애초에 의논도 하지 않고 멋대로 합사한 것은 매우 굴욕적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너무 억울합니다.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된 지금 상태라면 제 아버지는 일본군에 지원한 것이 되고, 또 전범으로 모셔지고 있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모셔달라고 유족이 부탁한 것처럼 오해를 살 수 있습니다. 이는 유족으로서 참을 수 없는 것이고, 우리 가족 모두가 마찬가지로 함께 느끼는 것입니다.
일본 정부는 희생자의 유족에게 보상은커녕 원호도 하지 않았습니다. 강제로 시킨 군사우편저금도 지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유족의 승낙도 없이, 통지도 하지 않았으면서 야스쿠니신사에 모시고 있었습니다. 이런 기회주의가 어디 있습니까. 유족으로서 도저히 용서할 수 없습니다. 야스쿠니신사는 한국에 대한 식민 지배도 긍정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일제의 야망에 의해 원통하게 희생된 분들이, 그 희생의 원인이 된 식민 지배를 긍정하는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되었다는 것은 또 한 번 희생당하는 것입니다. 암울한 역사가 두 번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희생자 유족에게 진심으로 반성하고 사죄해야 합니다. 무단으로 합사한 희생자의 이름을 삭제할 것을 강력히 요구합니다. (…중략…)
제 아버지는 자원해서 전쟁에 참여한 것도 아니고, 불행하게 전사했습니다. 게다가 한국은 독립했습니다. 일본과는 관계없는 외국입니다. 외국인이기 때문에 야스쿠니신사 합사는 당연히 취소될 수 있는 것입니다. 유일한 유족인 제가 이렇게까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새부(靈璽簿, 신으로 모시는 사람들의 명부)에 남기는 것에 반대하고 있는데도 굳이 이름을 남긴다는 것은 야스쿠니신사가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고 아직도 식민지로 생각하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중략…)
‘야스쿠니신사 합사가 취소되었을 때 하고 싶은 것’을 묻는다면, 저는 아버지를 어머니와 함께 모시고 싶습니다. 가족이 모두 모여 지금까지의 한을 풀고 싶습니다. 아버지의 영혼과 어머니의 영혼을 서로 마주하게 하는 것입니다. 굿을 해서 제사를 지내고 싶습니다. 지금은 제사의 의미가 없습니다. 야스쿠니신사가 아버지를 포로로 가둬두고 있기 때문에 영혼이 자유롭게 올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완전한 제사를 지내지 못했던 것이 저에게는 계속 마음에 걸리는 일입니다. 만약 제가 그것을 이루지 못하고 이대로 죽는다면 제 자식들이 이어서 이 싸움을 이어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