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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의 지배정책
  • 전상숙 광운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 연구교수

동북아역사재단의 일제침탈사 편찬사업은 일본 제국주의의 한반도 침탈과 식민지 지배 실태를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종합하여 총서로 발간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자료총서, 연구총서, 교양총서로 구성되어 있으며, 정치·경제·사회· 문화 분야로 나누어 학계 전문가들이 집필에 참여하고 있다. 일제침탈사 시리즈에서는 발간된 일제침탈사 총서 가운데 한 권을 선정하여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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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의 지배정책』(동북아역사재단,2022)


실존의 가치 기반인 역사


  에드워드 카(Edward Hallett Carr, 1892~1982)역사란 무엇인가(What is History?)에서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다. 이 말이 회자되는 것은, 역사를 단순히 과거의 성실한 재현으로 보았던 실증주의를 배척하고 역사란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의 문제를 통찰하기 위한 안목이라는 점을 역설했기 때문이다. 그는 같은 책에서 어떤 사회가 어떤 역사를 쓰는가 또는 쓰지 못하는가 만큼 한 사회의 성격을 의미심장하게 가리키는 것은 없다라고도 했다. 이러한 역사와 역사가에 대한 글은 한국·중국·일본 동아시아 삼국 특히 한일 간 역사 문제, 역사 인식 문제를 되돌아보게 한다.

  한국 사회에서 독일의 거듭된 전쟁범죄 반성과 피해자에 대한 위로는 일본의 무도함과 자의적인 시혜적 역사 해석 더 나아가 경제적 보복 도발로까지 전개된 것과 대조되고는 한다. 그렇지만 독일의 반성과 위로가 전후 전승국의 철저한 처벌과 피해 당사자인 유대인과 이스라엘의 끈질긴 사과와 처벌 요구가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간과되기도 한다. 뉘른베르크 전범재판과는 대조적으로 도쿄 전범재판은 전범으로 처벌된 사람이 7명에 그치고, 일왕을 비롯한 지배층이 그대로 군림할 수 있는 형식적인 수준에 그치고 말았다. 이는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 참배문제로 이어지고 있다.


섬나라의 한계를 극복한 강대국이 되려한 초석, 한반도


  메이지 일본은 서양 열강의 한반도 진출에 대항하여 운요호(雲揚號) 사건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른바 주권선일본에 대한 이익선조선(朝鮮)을 국책으로 결정했다. 이익선론의 국가정책 결정은 국가이익과 국력의 관점에서 근대 일본 국가의 발전을 대외적으로 꾀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서양 열강의 동진으로 야기될 것으로 예상되는 일본제국의 국가적 위기(국방)와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 조선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일본은 서양 제국주의와 접하며 종래 반복하던 한반도 침탈을 국방을 명분으로 복속정책으로 결정했다. 국가정책이 된 이익선론의 첫 귀결은 한국병합이었다.

  하지만 이후 이익선은 만주와 중국으로 확장되며 일본 제국주의가 침략적으로 팽창하는 명분이 되었다. 섬나라 일본의 한국 병합은 경제적 이익을 위한 제국주의의 식민지화가 아니라 지리적 한계를 극복하고 대륙으로 연결된 국가, 곧 대륙국가가 되기 위해서 영토를 확장한 것이었다. 한반도는 북진해 열강의 일원이 될 수 있는 국가적 발전을 담보하는 디딤돌이자 토대였다. 특히 한국병합당시 일본 천황의 대권으로 조선 지배에 전권을 부여한 조선총독의 지위는, 초대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가 입증했듯이, 조선지배를 통해 일본제국을 대륙국가로 공고히 하는데 기여함으로써 본국 정치계로 금의환향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드는 데 활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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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총력전체제 구축에 솔선한 무관 총독의 조선 지배정책


  역대 조선총독들은 모두 무관이었다. ‘한국병합을 단행하고 1910년대에 무단적 조선총독 정치체제를 구축한 데라우치는 메이지 일본의 국가체제를 정립하고 이익선론을 국가정책으로 만든 조슈(長州) 군벌이었다. 1920년대에 문화정치라는 미명으로 사실상 무단통치 체제를 정교화한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도 전 해군대신이었고, 조슈 군벌을 대체한 쇼와(昭和) 군벌의 대표하는 이가 1930년대 농공병진정책을 실시한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였다. 뒤이은 총독 모두 우가키 계열로 알려진 무관이었다. 그들은 제1차 세계대전을 치르며 세계적으로 확산된 총력전체제에 대한 관심을 공유하며 다이쇼(大正) 데모크라시의 이면에서 확산된 이른바 거국일치체제와 혁신적인 자급자족적 총력전체제 일본을 만드는 데 솔선하는 조선 지배정책을 실시했다.

  특히 우가키는 일본 총력전 사상의 원형이자 실현자란 평가를 받는다. 그는 총력전체제의 자급적 경제권 구축과 거국일치 체제 구상을 갖고 일본이 영·미와도 필적할 수 있는 대륙의 제국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가키가 총력전체제 구상에 입각해 실시한 농공병진의 조선 산업화는 미나미 지로(南次郞)의 병참기지화를 위한 전시 공업화와 육군특별지원병제 및 1944년 조선인 징병제 시행으로 이어졌다. 고이소 구니아키(小磯國昭)가 조선을 결전체제화하고 총동원에 박차를 가해 아베노부유키(阿部信行)가 일본이 항복할 때까지 조선을 일본 최후의 물동지로 쥐어짜며 남김없이 동원하는 토대가 되었다. 우가키가 조선인의 민족항일을 억압하며 조선 산업화를 통해 자신의 총력전체제 구상을 현재화하기 시작한 것이 우가키 군벌로 알려진 미나미와 고이소, 아베 총독으로 이어지며 조선을 일본총력전 최후의 물동지로 기능할 수 있게 한 토대였다. 조선총독의 전시 일본 총력전체제에 기여하는 총동원의 성과는 내선융화내선일체황국신민화로 이어진 한국인에 대한 일본국민화’, 일본국민의식을 강제하는 민족말살정책 강화와 병행된 것이었다.


국방과 분리될 수 없는 일본제국의 한반도관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 지배에서 국방경제는 분리될 수 없었다. 한반도를 영구히 복속한다는 의미를 내포한 병합이라는 말이 나타내듯이 국방국민화 지배이데올로기또한 분리될 수 없었다. 일본의 총력전체제 구상은 군부의 국방관에 입각한 이익선론의 연장에 있었다. 조선총독들은 총력전체제 구상에는 차이가 있어도 모두 일본이 최소한 한반도를 일본국 영토로 공고히 한 대륙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조선 교두보관을 갖고 있었다. 그 결과 무관 조선총독들은 일본제국생존을 위한 전쟁에 솔선해서 조선을 최후의 물자동원지가 될 때까지 가동했고 조선인을 남김없이 동원하는 수탈 대상으로 삼았다.

  조선총독의 지배정책을 총체적으로 고찰해 보면 식민지기에 일어난 양적 경제지표 변화가 어떻게, 왜 일어났는지, 그 성과가 근원적으로 무엇을,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지, 경제적 성장의 목적과 이익의 주체 문제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식민 지배자의 정책 목표와 이를 이루기 위해 동원, 수탈된 피지배 식민지 조선인일반의 삶과 생활 조건은 극명하게 대조된다.

  결자해지(結者解之)라는 말이 있다. 일을 저지른 사람이 그 일을 해결해야 한다는 말이다. 피해자가 또 유사한 일에 똑같이 묶여서 존엄성을 훼손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피해의 역사와 현실을 정확히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잊지 말고 사과와 재발 방지를 끊임없이 요구해야 한다. 진정한 용서와 화해는 망각이나 왜곡된 역사 인식을 요구하지 않는다. 진실의 인정을 요구할 뿐이다. 일제의 병합과 지배정책의 실상을 알아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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