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둥(山東)에서 돌아본 근대 동아시아의 국제전쟁
- ‘지정학의 시야에서 본 근대 동아시아의 국제전쟁과 역사 기억’ 학술회의 참가기
이동욱 재단 한중연구소 연구위원
근대 동아시아의 전쟁, 공동의 역사와 부동(不同)의 기억
올해는 청일전쟁 발발 130년이자 러일전쟁 발발 120년, 제1차 세계대전 발발 110년이 되는 해다. 재단에서는 이들 전쟁이 한국과 동아시아에 미친 장기적인 영향과 그 역사적 의미, 오늘날의 동아시아에 주는 교훈을 되짚어 보기 위한 일련의 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그 일환으로 재단은 5월 22~26일까지 산둥대와 공동으로 ‘지정학적 시야에서 본 근대 동아시아의 국제전쟁과 역사 기억’ 학술회의를 개최하고, 웨이하이 및 칭다오 일대의 청일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 관련 사적지 현지 조사를 수행하였다.
재단-산둥대 공동 학술회의 전경
주지하다시피 이들 전쟁은 우리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건들이었다. 전라북도 고부(현 정읍시 고부면)에서 일어난 동학농민 봉기가 도화선이 되어 일어난 청일전쟁을 통해 조선은 청의 간섭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을미사변과 아관파천을 겪으며 일본과 러시아의 각축장이 되었다. 독립국으로서의 위상을 강화하기 위하여 대한제국 수립을 선포하였으나 5년 만에 일어난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대한제국은 국권 상실의 길로 들어섰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새로운 세계 질서를 제시한 ‘윌슨독트린’의 ‘민족자결주의’는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안겨주며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또한 내년에 80주년이 되는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은 우리에게는 광복을 의미하였다.
이처럼 한국 근현대사의 굴곡은 세계사의 굵직한 전쟁들과 연동하고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 이웃인 중국과 일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중국과 일본은 때로는 전쟁의 당사자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무고한 피해자가 되기도 했다. 물론 이 전쟁이 각 나라에 미친 영향과 그것을 기억하는 동아시아 각국 역사 교육의 인식은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예를 들어 우리에게 청일전쟁은 한반도를 둘러싼 청과 일본의 쟁탈전일 뿐이다. 이 전쟁은 우리 땅에서 일어난 ‘타자의 전쟁’이며, 청과 일본을 모두 가해자로 인식한다. 일본의 역사 교육에서는 청일·러일 전쟁을 통해 일본이 동아시아 근대화의 모범 사례로 발돋움하고, 각국이 일본을 모방하여 근대화 개혁을 추진했다는 점을 부각하는 추세이다. 중국은 청일전쟁을 일본의 침화(侵華: 중국 침략) 전쟁으로 묘사하고, 전쟁 패배로 인한 ‘중화민족의 각성(覺醒)’을 강조한다. 이러한 인식의 차이를 유발하는 것은 서로의 역사에 대한 무관심과 무지, 아전인수격 해석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양국 학계가 더 많은 교류와 소통을 통해 서로의 역사 인식에 대한 간극을 좁히는 작업이 계속되어야 한다.
물론 이러한 작업이 즉각적인 결과를 도출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며, 특히 각국의 역사교육이 역사 연구의 일선에서 진행되고 있는 논의를 곧바로 반영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2000년대 초반 한중일 삼국의 역사학자와 역사교사들이 공동으로 동아시아사 교재를 편찬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동아시아사가 고등학교 교과과정에 포함되었으나 그러한 성과가 현재까지 지속되지 못하고, 특히 한중 학계의 교류와 소통은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와 최근 십수 년간 한중일 삼국의 정치·외교적 문제에 가로막혀 오히려 퇴보한 감이 있다. 이번 산둥 지역 현지조사와 학술회의는 서로에 대한 역사 인식의 간극을 메꾸고, 최근 수년 동안 소원해진 양국 학계의 교류와 소통을 강화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웨이하이에서 가장 가까운 대도시는 베이징도, 상하이도 아닌 서울입니다”
5월 24일 학술회의 전야의 환영 만찬에서 류젠야(劉建亞) 산둥대 웨이하이(威海) 캠퍼스 부총장은 위와 같이 말했다. 황해를 사이에 두고 한반도와 마주보고 있는 산둥반도는 역사적으로 한반도와 많은 교류를 가져왔다. 장보고(張保皐)가 세웠다는 기록이 전해지는 적산법화원(赤山法華院) 유적과 같이 고구려, 백제, 신라, 발해의 사람들이 이 지역에 거점을 마련하고 활동하였으며, 고려와 조선 시대에도 한반도에서 배를 타고 출발하는 사행(使行) 루트가 산둥반도를 거쳐 갔다. 근대에 들어 기선의 시대가 열리고 해금(海禁)이 폐지되면서 산둥반도와 한반도의 거리는 더욱 좁혀졌다. 병인양요 때의 프랑스 함대, 임오군란 때의 우장칭(吳長慶) 부대 역시 산동을 경유하여 한반도로 들어왔다. 1884년 갑신정변 이후 청과 일본이 한반도에서 공동으로 군대를 철수시키기로 협의한 이후에도 청이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당시 동아시아 최강의 함대로 불리던 북양함대가 산둥 또는 뤼순에서 출항하여 신속히 한반도 해역에 군사력을 전개할 수 있다는 전략적 고려가 있었다.
청일전쟁 당시 웨이하이 전투를 묘사한 일본 판화(출처: getarchive.net)
물론 민간 차원에서도 많은 교류가 있었다. 근대 이후 한반도에 건너와 정착한 화교 중 산둥 출신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많은 한국인들이 웨이하이와 칭다오 등지에 건너가 살았다. 그 가운데에는 안중근과 김구의 가족들, 이봉창, 윤봉길 등도 포함된다.
이러한 지리적 관계가 아니더라도 산둥은 세계사와 동아시아사의 맥락 속에서 한국사와 상호 영향을 주고받은 중요한 사건들과 관련된 사적지가 존재하는 곳이다. 웨이하이 앞바다의 류궁다오(劉公島)는 청나라 북양함대의 기지가 건설된 곳으로 청일전쟁의 마지막 장을 장식하는 격전지가 되었다. 칭다오는 1898년 독일이 자오저우만(膠州灣)을 조차(租借)하여 건설한 식민 도시로서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이 이곳을 급습하여 점령함으로써 동아시아에서 유일한 제1차 세계대전 전적지가 되었다. 청일전쟁의 결과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조공체제는 사실상 철저히 와해되었으며, 중국은 독일의 자오저우만 점령과 조차를 시작으로 러시아(뤼순, 다롄), 영국(웨이하이, 홍콩 신계), 프랑스(광저우만) 등을 99년 동안 빌려주어야 했고, 중국은 과분(瓜分)의 공포에 시달려야 했다. 또한 캉유웨이(康有爲)와 량치차오(梁啓超)의 변법자강운동과 쑨원(孫文) 등의 혁명운동 등 정치제도와 사회 체제를 변혁하려는 움직임 역시 청일전쟁 패배의 충격 속에서 시작되었다. 이 모든 일들이 한반도 남부의 동학 농민 봉기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한반도의 정세가 중국사와 동아시아사와 큰 영향을 끼친 사건이었다.
「시국도」,열강이 참외를 썰듯 중국의 영토를 분할할 것이라는 ‘과분(瓜分)’의 공포를 표현한 그림(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제1차 세계대전 당시의 산둥 또한 한국사와 간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주고받았다. 일본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한 뒤 칭다오를 급습하여 독일군을 몰아내고 교주만을 장악하였으며, 당시 중화민국 정부에 산둥에서 독일이 가졌던 권리를 물려받는 것을 골자로 하는 ‘산둥 21개조’를 요구했다. 중국 또한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연합국의 편에 서서 유럽에 15만 명가량의 중국인 노동자를 파견하였는데 그중 대부분이 산둥과 허베이 출신이었으며, 5만여 명이 당시 영국의 조차지였던 웨이하이를 통해 출국했다. 유럽의 전장에 투입된 중국인 노동자 중 8천여 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되었다. 그러나 전쟁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을 때 중국이 전승국의 일원으로 참여할 수 있었던 파리평화회담에서 일본은 산둥 21개조의 승인을 요구하였다. 이 소식이 국내에 전해지자 중국인들의 환희는 절망과 분노로 바뀌었으며, 한국에서 3.1운동이 일어난 지 두 달 뒤인 1919년 5월 4일, 베이징의 학생들의 시위로 5.4운동이 시작되었다. 이후 많은 한국인이 중국의 국민혁명과 항일전쟁에 동참하고 중국인들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같은 독립운동 단체를 지지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 서부전선의 중국인 노동자(출처: getarchive.net)
이처럼, 한국과 중국의 근대사는 세계사의 일부이자 동아시아 지역사로서 서로 동기화되고 있었다. 일견 우리와 무관해 보이는 주변국에서 일어난 사건들이 사실은 서로 밀접하게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오늘날의 한국과 중국, 동아시아를 형성한 것이다. 서로가 공유하고 있는 역사에 대한 교류와 소통, 보다 넓은 시야에서의 상호 이해가 필요한 이유다.
“과거의 전장(戰場)에서 학술 교류의 미래를 꿈꾸다”
학술회의를 진행하면서 중국 학계가 급격한 세대 교체를 겪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학술회의 참가자의 면모를 확인해 보면 1990년대 한중 수교 이래 산둥대학의 한중관계사 연구를 이끌어 왔던 천상성(陳尙勝) 교수와 같은 1세대 연구자는 일선에서 물러나고 있고,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에 태어난 젊은 연구자들의 활약이 돋보였다. 이들 중에는 한국에서 유학하여 박사학위를 받은 연구자들도 있지만, 한국을 한 번도 방문해보지 않은 사람도 많다. 중국 학계의 미래를 책임질 젊은 연구자들과 지속적으로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강화하여 상호 간의 학술적 신뢰를 기반으로 한 이해와 공감대 형성을 확산해 나가야 할 필요를 느꼈다.
재단-산둥대 공동학술회의 ‘지정학의 시야에서 본 동아시아 근대 국제전쟁과 역사기억’
이번 산둥 방문을 통하여 얻어낸 가장 큰 성과는 재단과 산둥대 간 학술 교류를 위한 MOU 체결이었다. 재단과 산둥대는 향후 5년 동안 매년 양국의 학자들을 섭외하여 정기적으로 공동 학술회의를 개최하고, 서로 방문학자를 파견하여 상호 협의를 거쳐 공동 학술 연구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성과물을 공유하기로 합의했다. 향후 과제는 이를 잘 실천하여 한중 학계의 미래를 짊어질 젊은 연구자들의 교류를 활성화하여 학문적 신뢰를 바탕으로 서로에 대한 이해를 넓혀가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산둥이 한반도에서 중국으로 들어가는 지리적 문호로 기능해온 것처럼 재단과 산둥대의 교류 협력이 다소 침체된 한중 학술 교류를 활성화하는 창구로서 기능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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