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에 비친 1953년 7월의 정전협정 「고지전」
-정전협정, 전쟁과 평화의 역설
정대훈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
영화 「고지전」에서 북한군 장교 현정윤(류승룡 분)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 포로로 잡은 남한군 병사들 앞에서 이렇게 말한다.
영화 「고지전」 스틸컷(출처: 쇼박스)
“이 전쟁, 일주일이면 끝난다”
현정윤의 표정에는 여유와 확신이 가득하다. 전쟁 초기 남한군을 연전연파하며 파죽지세로 진군하는 중이었으니 이런 자신감이 아주 근거 없는 것은 아니었다. 현정윤에게 한국전쟁이란 공산군의 승리로 곧 끝날 전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현정윤의 호언장담은 그저 말에 그쳤다는 것을. UN군은 낙동강까지 밀려났지만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역전했고, 이어 중국군이 참전하면서 전세는 또다시 뒤집혔다. 반격과 재반격을 거듭하며 전황이 요동친 끝에 1951년 여름 즈음부터는 전선(戰線)이 교착되면서 일진일퇴의 공방전만이 지루하게 거듭되었다.
정전회담은 이런 상황에서 시작되었다. 1951년 7월 10일 개성에서 시작된 회담은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조인될 때까지 2년 가까이 이어졌다. 애초 회담은 조기에 타결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어느 일방이 다른 일방을 결정적으로 제압할 수 없다는 사실이 명백한 상황에서 지루한 공방전을 계속하는 것은 양쪽 모두에게 소모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포로 교환 문제를 두고 양측이 입장을 좁히지 못하면서 회담은 장기화되었다.
1951년 7월 8일 열린 정전회담 예비회담 -본회담은 7월 10일 시작함
(출처: 미국 국립기록관리청)
밤늦게까지 불이 켜진 회담장(1953.6.23),
(출처: 미국 국립기록관리청)
2011년에 개봉한 「고지전」은 정전회담이 진행되던 당시 전선에서 벌어진 공방전들을 다룬다. ‘애록고지’라는 가상의 공간을 무대로 하여 공산군과 끝없는 공방전을 거듭했던 ‘악어중대’가 주인공이다. 후퇴와 탈환을 수없이 반복하던 악어중대는 우연한 계기로 진지 깊숙한 곳의 숨겨진 공간을 활용하여 물건과 서신을 북한군과 교환하게 된다. 교전 중인 양측이 물건과 서신을 교환한다니,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났다가는 당장에 큰 문제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터무니없는 설정이 영화 속에서 꽤나 핍진하게 느껴지는 것은 당시에 벌어졌던 공방전이 그만큼 지루한 반복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고지전」이 보여주는 전쟁은 그간 영화나 드라마에서 우리가 익숙하게 보아왔던 것과는 다르다. 적국의 침략에 맞서 우리 공동체를 수호하는 숭고한 인간드라마도 아니고 전략과 전술, 화력과 병기가 충돌하는 스펙터클도 아니다. 그런 클리셰 대신 스크린을 채우는 것은 오랜 전쟁이 가져온 피로와 절망, 체념 같은 것들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고지전」에서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김수혁(고수 분)이다. 영화의 서사를 끌고 가는 실질적 주인공인 김수혁은 전쟁을 거치며 가장 크게 변한다. 전쟁 초기 제 몸 하나도 건사하지 못해 어쩔 줄 몰라 했던 그는 오랜 전쟁을 거치며 출중한 지휘관으로 거듭난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전투에 능숙해질수록 피로와 절망도 함께 커진다. 누구보다 전쟁에 능숙한 김수혁이지만 정작 그가 열망한 것은 하루라도 빨리 전쟁이 끝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영화 내내 강은표(신하균 분)에게 묻는다.
“그래서 전쟁은 언제 끝나는데?”
피로와 체념은 북한군도 마찬가지였다. 북한군 장교 현정윤에게도 피로는 가득하다. 전쟁 초기의 현정윤은 말쑥하고 단정한 군복에 자신감 넘치는 표정이었지만 단정한 군복은 어느새 넝마가 되고 자신감 넘쳤던 얼굴에는 흉터가 가득하다. 얼굴의 흉터는 그 역시도 피로와 절망에 짓눌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악어중대 중대원들 역시 피로와 체념에 찌들어 있기는 마찬가지다. 신병이 부르는 유행가를 들으며 가족을 떠올리고, 우연히 얻은 사진 속 이성에게 잠시 연정을 품기도 하며, 누구보다 전쟁이 빨리 끝나기를 기원한다.
부상 포로 송환 협정의 타결을 알리는 존 다니엘(John C. Daniel) 소장 (1953.4.10)
(출처: 미국 국립기록관리청)
개성에서 정전회담이 이뤄지는 와중에 북한군 병사와 미군 병사가 함께 타임(Time)지를 읽는 모습(1951.7.8)
(출처: 미국 국립기록관리청)
하지만 정작 「고지전」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는 정전협정이 조인된 후에 벌어진다. 정전협정은 협정이 조인되고 12시간 후에 발효되는데 그 시간 동안 최대한 많은 영역을 차지하기 위해 총공세를 펼치라는 작전명령이 하달되기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가장 평화가 가까웠을 때 가장 전쟁이 치열해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영화 전체가 거대한 역설처럼 보이기도 한다. 전쟁에 아무리 능숙해지고, 수없는 전장에서 끝끝내 살아남아도 정작 전쟁은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더 많은 무기와 더 강한 전투력을 갖추면 평화가 올 거라는 믿음이 실제 세상에서는 결코 실현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실제 역사 속의 정전협정 역시 역설적이기는 마찬가지다. 정전협정을 통해 전쟁은 ‘일시적이건 영구적이건’ 정지되었고 양 진영 사이에는 ‘비무장지대’가 설정되었지만 일촉즉발의 긴장 상태는 지금까지 수십 년째 이어지는 중이고 비무장지대 역시 점점 ‘무장화’되어 군사적 긴장이 가득한 공간이 되었다. 그러니 「고지전」이 말하고 싶은 것은 이런 역설이 정전협정 이후 한국이 겪었던 일들의 총합이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애록(Aerok)고지는 결국 철자를 뒤집었을 뿐인 한국(Korea)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