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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역사교사 한국사 워크숍
  • 심호성 재단 국제관계연구소 연구위원

몽골 역사교사 한국사 워크숍

 

심호성 재단 국제관계연구소 연구위원

 

 

동북아역사재단(이하 재단)은 지난 528일 몽골의 국제 울란바토르대학에서 ‘2024년도 몽골 역사교사 한국사 워크숍을 개최했다. 몽골 역사교사 한국사 워크숍 사업은 지난 십 년간 몽골 역사·사회과 교사들의 한국사 및 한·몽 관계사 지식을 제고하고, 한국사 관련 교재를 제작 및 보급함으로써 한·몽 양국 간 상호 이해와 우호 증진에 기여해 왔다. 올해는 근현대 한국과 몽골의 역사와 문화교류를 주제로 워크숍을 진행했는데 한·몽 양국의 역사·외교 전문가 여섯 명이 강사로, 울란바토르 시내 현직 중고등학교 교사 35명이 수강자로 참여했다.

 

 

근현대 한국과 몽골의 역사

 

첫 번째 강의를 맡은 전영욱 재단 연구위원은 19세기 중반에서 오늘날에 이르는 한국의 근현대사를 개항·식민지·국가건설·분단·경제발전·민주화 등의 키워드를 중심으로 일목요연하게 설명했다. 한국의 근현대는 역경과 고난의 시기이기도 했지만, 성취와 발전의 시기이기도 했다. 조선에서 대한민국으로 나라 이름이 바뀌는 사이 한국인들은 근대화·자주독립·경제발전·민주화 등을 이루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고 눈부신 성공을 거두었다. 한국 근현대사의 명암, 근현대 한국인의 시련과 성공을 균형 있게 다룬 전영욱 연구위원의 강의는 향후 몽골 역사교사들이 교육 현장에서 한국 근현대사를 가르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사진1_몽골 역사 교사 한국사 워크숍(필자 촬영)

몽골 역사교사 한국사 워크숍

 

두 번째 강의에서는 몽골과학아카데미의 에르덴바트 연구위원이 몽골 근현대사를 총 다섯 시기로 나누어 설명했다. 1911~1921년은 몽골인들이 중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투쟁한 독립 몽골국 시기였다. 1921~1939년은 민족·민주혁명 시기, 이 시기 몽골인들은 소련의 지원을 받아 중국군을 몰아내고 몽골인민공화국을 건설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후반기에는 급진적인 사회주의 정책과 대숙청으로 인한 대혼란을 경험하기도 했다. 1940~1953년에 몽골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소련을 원조했고, 그 결과 종전 후 주권국·독립국의 지위를 강화할 수 있었다. ‘사회주의 건설 시기1954~1980년대에 몽골은 국가 주도의 계획경제 프로그램에 따라 전근대적인 목축 국가에서 현대적인 농··공업 국가로 발전했다. 마지막으로 1990년대 이후에는 고통스러운 체제 전환 과정을 이겨내고 민주주의·시장경제 국가로 변모하는 데 성공했다.

 

 

20세기 한국과 몽골의 상호 인식

 

바트투르 몽골국립대 교수는 세 번째 강의에서 20세기 몽골인들의 한국 인식을 다루었다. 1910~1930년대 몽골의 신문과 도서는 한국인에 대한 일본 제국주의의 억압과 만행을 고발하고, 한국인의 항일 투쟁을 소개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전 세계적으로 냉전 체제가 확립되면서 몽골은 공산 진영에 속한 북한과 외교 관계를 맺고 모든 면에서 북한을 지지했다. 일례로 몽골은 한국전쟁에서 북한에 물자와 가축을 대량으로 지원한 반면, 대한민국에 대해서는 1990년대 체제 전환 전까지 적대적인 태도를 고수했다. 바트투르 교수는 강의를 마치며 20세기 전반의 몽골인들은 항상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어려운 처지에 놓인 한국인을 물심양면으로 도우려 노력했으나, 20세기 중반 이후 전 세계에 불어닥친 냉전의 영향으로 그러한 마음은 한동안 왜곡될 수밖에 없었다고 강조했다.

네 번째 강의는 한국외국어대학 이평래 교수가 맡았다. 이평래 교수는 20세기 전기 한국 지식인들의 몽골 인식을 고찰했다. 1920~1930년대 국내외 매체에 실린 몽골 관련 기사는 몽골 제국과 칭기즈칸의 위업을 강조했다. 이는 부국강병이라는 당시 한국인들의 시대적 염원을 반영한 것이자, 제국주의에 대한 반감과 근대화에 뒤처진 열등감을 몽골의 세계 정복이라는 과거를 통해 해소한 것이었다. 한편 몽골의 미래에 대한 한국 지식인들의 평가는 엇갈렸는데, 특히 1921년 외몽골 인민혁명과 1930년대 내몽골 자치·독립운동을 둘러싸고 이견이 발생했다. 여기에는 한국 지식인들의 정치적 입장의 차이, 일본 제국주의 언론의 영향, 소수민족의 자립을 부정하는 당시 중국 정부의 소수민족관 등이 영향을 주었다.

 

 

20세기 이후 한국과 몽골의 교류

 

다섯 번째 강의는 박장배 재단 연구위원이 독립운동가 이태준을 중심으로 20세기 초반 한국과 몽골의 인적교류를 논하였다. 세브란스 의학교를 졸업한 뒤 의사로 일하던 이태준은 ‘105인 사건을 계기로 중국에 망명했다. 난징에 머물던 중 몽골에 비밀 군관학교를 건설하자는 김규식의 제안을 받은 이태준은 1914년에 몽골의 후레(지금의 울란바토르)로 향했다. 이후 이태준은 후레에 병원을 설립하고 몽골인에게 근대 의술을 베풀었다. 또한 몽골에서 의사로 활동하면서 중국·러시아·몽골을 오가는 독립운동가들에게 숙식과 교통편을 제공하는 등 독립운동의 거점 역할을 수행했다. 19212월 이태준은 소련의 자금을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운송하던 도중 러시아 백군(白軍)에 붙잡혀 살해당했다. 박장배 연구위원은 이태준으로 대표되는 20세기 초반의 한·몽 인적교류에는 제국주의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약소민족의 독립과 자존을 보존하려 한 당시의 시대정신이 반영되어 있다고 평가했다.

 

사진3_애국지사 이태준 선생의 묘(필자 촬영)

애국지사 이태준 선생의 묘

 

마지막 강의에서 우르진훈뎁 전 주한몽골대사는 1990년 수교 이후 한·몽 관계를 회고하고 미래를 전망했다. 우르진훈뎁 대사는 몽골의 대표적인 한국 전문 외교관으로, 남북한 모두에서 대사로 봉직한 매우 특이한 이력을 지녔다. 이번 강의에서 그는 수교 이후 다양한 분야에서 비약적으로 발전한 한·몽 관계를 상세히 설명했다. 한국 정부의 공적 개발 원조와 장기 차관 덕분에 몽골에서 많은 프로젝트가 시행될 수 있었고 몽골 국민이 그 혜택을 입고 있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해외 거주 몽골인이 가장 많이 사는 나라가 한국임을 지적하며, 한국 정부와 국민이 재한 몽골인을 무시하거나 차별하지 않고 친절히 대해 왔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우르진훈뎁 대사는 한반도와 동북아 지역의 평화 체제 구축을 위해 한국과 몽골이 외교 분야에서 더 긴밀히 협력해야 함을 강조하며 강의를 마쳤다.

 

 

성과와 전망

 

강의 후에는 열띤 질의응답이 이어졌다. ‘식민지 수탈론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한 질문이 나오는 등 상당히 수준 높은 질의응답과 토론이 있었는데, 이를 통해 지난 10년간 지속해 온 몽골 역사교사 워크숍 사업의 성과를 직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몽골 역사교사 한국사 워크숍과 여기에 참가한 몽골의 역사·사회과 교사들은 미래 한·몽 관계의 발전을 위한 든든한 초석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