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년 전 청일전쟁, 그리고 조선
김윤미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연구원
2024년은 청일전쟁이 일어난 지 130년이 되는 해다. 10여 년 전 청일전쟁에 대한 연구를 시작해보자는 막연한 결심을 했다. 근대 한국의 운명을 뒤바꾼 전쟁의 가장 앞에 청일전쟁이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근현대사를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도전해 볼 과제였다. 연구성과를 정리하고 사료를 수집하면서 역사적 장소를 답사하기로 했다. 한국, 중국, 일본에 있는 청일전쟁의 현장을 정리하고, 당장 가볼 수 있는 서울과 인천을 다녀왔다. 이후 중국 산둥성을 방문할 기회가 찾아왔다. 동북아역사재단과 산둥대학이 공동 주최하는 학술대회와 현장조사(5월 22~26일)에 참여하는 여정이었다.
외국군 주둔의 시작이 된 청일전쟁
우리에게 청일전쟁은 무엇인가. 일본은 청일전쟁으로 조선을 군사 강점했고, 10년 뒤 일어난 러일전쟁의 기반을 마련했다. 1894년 7월 25일 아산만 풍도해전이 청일전쟁의 시작이라고 하지만, 과연 조선의 입장에서 이것이 청일전쟁의 시작인가. 청일전쟁은 한반도에 외국군이 주둔하고, 군사 강점이 시작된 전쟁이다. 우리의 관점으로 청일전쟁을 재조명하기 위해서는 일본군의 상륙과 주둔지에 더 주목해야 한다. 조선의 요구로 출병한 청군은 아산에 주둔하면서 동학 농민을 진압한다는 목적을 분명히 한 반면, 일본군은 인천에 상륙하여 용산과 경복궁으로 진입했다. 이것이 인천과 용산 일대를 먼저 답사하게 된 배경이다.
제물포항에 상륙하는 일본군(출처: 영국신문 The Illustrated London News, 1894.11.10, 국립중앙박물관 e뮤지엄)
일본은 8,000여 명의 병력을 조선에 파병했다. 제1차 수송부대가 인천에 상륙을 완료한 시점은 6월 17일, 제2차 부대가 인천에 상륙한 것은 6월 28일이었다. 부산에는 군사전신 설치를 목적으로 한 일부 병력이 6월 17일 상륙했다. 조선에 파견된 부대는 청군의 남하와 조선군의 한성 진입을 차단하기 위해 임진강과 동로에 배치됐고, 조선주재 공사관과 부산 영사관을 수비하기 위해 한성과 부산에 배치됐으며, 병참기지를 설치 운용하기 위해 용산과 인천 등에 주둔했다.
청일전쟁은 일본이 처음으로 해외파병을 시행한 전쟁이었다. 군사적 기반이 없는 곳에 군대를 파견한 것이므로 일본은 바다 건너 조선으로 병력과 물자를 수송해야 했다. 병참사령부를 설치하고 병참을 실시했던 중심지는 인천이었다. 일본군이 상륙했던 당시 제물포항 전경은 오늘날 인천에서는 만나볼 수 없다. 대신 인천 개항장의 근대거리를 거닐면 곳곳에서 그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인천박물관에는 청일전쟁과 관련한 작은 상설 전시 공간이 마련되어 있고, 박물관이 해저 발굴 후 청의 군함이었던 ‘고승호’ 특별전을 개최한 바 있어, 그때 제작한 도록이 남아 있다. 용산에 위치한 전쟁기념관에서도 청일전쟁의 일면을 만날 수 있기는 하지만, 일본 시모노세키(下關)의 일청강화기념관, 중국 웨이하이웨이(威海衞)의 중국갑오전쟁박물원과 같이 청일전쟁 역사를 주제로 한 박물관은 한국에 없다.
청일전쟁에 대한 전시와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인천시립박물관(필자 촬영, 2024)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과 용산 일대 주둔
용산은 1945년까지 조선에 주둔했던 일본군의 사령부가 있던 곳이다. 그 출발이 1894년 청일전쟁이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아주 크다. 일본군은 만리창, 아현 등의 용산 일대에 일본군 주둔이 완료되자 일본군 병참의 중심을 인천에서 용산으로 이전했다. 일본군이 용산 일대를 주둔지로 선택한 배경은 무엇보다도 사대문을 둘러싸고 있는 ‘한성’, 특히 조선의 통치 중심인 경복궁에 대한 군사적 위협 때문이었다. 또한 용산 일대는 전통적으로 한강 이남 지역과 연결된 주요 교통로이다.
일본군 병력 주둔과 병참 준비를 완료한 일본은 이와 동시에 7월 20일 조일잠정합동조관(朝日暫定合同條款), 7월 22일 조일동맹조약을 조선 정부에 요구하여 체결했다. 조약은 일본이 조선을 청일전쟁 보급기지이자 배후지로 삼겠다는 내용이었으며 합법적으로 조선 정부와 협조 체제를 구축했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 군사조약이었다. 다음날인 7월 23일 용산에 주둔했던 일본군은 경복궁으로 향했다. 대한제국의 통치 공간인 경복궁을 점령하며 군사 강점을 시작한 것이다.
1894년 8월 5일 용산에서 개선식을 하는 일본군 (출처: The Illustrated London News(1894.11.17), 국립중앙박물관 e뮤지엄)
일본군은 1894년 7월 25일 풍도 해전, 7월 29일 아산 전투 이후, 청일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에 한강을 건너 ‘한양’으로 들어가는 개선식을 거행했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조선의 수도였던 ‘한양’을 점령하는 것에 얼마나 큰 목적을 두었는지 알 수 있다.
청나라 북양함대의 근거지, 산둥성 웨이하이웨이
청은 아편전쟁 이후 해안 방어에 관심을 가지고 해군을 창설했다. 청 해군은 북양함대, 남양함대, 푸젠(福建)함대, 광둥(廣東)함대로 구성되었는데, 청일전쟁에는 북양함대만 참가했다. 유럽, 특히 독일에서 구입한 군함과 대포로 무장한 북양해군은 군비의 규모가 당시 아시아의 1위, 세계 4위에 이르렀다고 한다. 청은 1888년 북양해군을 창설하고 수도 베이징으로 들어가는 관문인 텐진(天津), 요동반도 뤼순(旅順), 산둥반도 웨이하이웨이에 기지를 두었다. 일찍부터 군사기지가 형성되어 있던 웨이하이웨이를 중심으로 산둥성에 남아있는 청일전쟁 관련 답사지는 북양함대의 본거지이자 일본 해군과 전투가 있었던 류공다오(劉公島)가 대표적이다.
중국갑오전쟁박물관 내에 소개된 웨이하이웨이 기지도(필자 촬영, 2024)
중국의 청일전쟁 기억, 중국갑오전쟁박물원
하루에 수만 명이 방문하는 섬인 류공다오는 청의 군사기지였지만, 일본이 잠시 주둔한 뒤 오랫동안 영국해군의 기지로 사용되었다. 방문객들이 가장 먼저 관람하는 곳은 중국갑오전쟁박물원(中國甲午戰爭博物院)이다. 중국은 국가박물관을 선정하고 5개의 등급으로 나누는데, 이곳은 가장 높은 등급인 국가 1급(AAAAA)이다. 주요 박물관으로 중국갑오전쟁박물원이 탄생하게 된 것은 중국 정부에서 1982년 일본의 교과서 사건을 계기로 지역에 항일전쟁과 관련된 박물관을 설립하고 역사 교육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1985년 3월 21일, 북양해군제독서(北洋海軍提督署)에 박물원을 개원한 이후 2009년 현재의 건물을 완성했다.
중국갑오전쟁박물관 전경(필자 촬영, 2024)
박물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청일전쟁 이전 아시아 최고의 해군력이라고 불렸던 탄생을 확인할 수 있다. 강한 군사력을 갖추었으나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청은 다시 항일로 나아갔다는 전시를 끝으로 박물관을 나온다. 승전의 역사를 기록하는 박물관이 아니라 중국의 패배를 기록하고 보존하며 항일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는 박물관이다. 교육의 현장으로서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는 류공다오의 또 다른 장소는 딩루창(丁汝昌)기념관이다. 청이 1887년에 북양수사를 건립하고 제독으로 임명했던 딩루창은 1882년 임오군란 당시 조선에 파견된 바 있던 군인으로 청일전쟁에서 청이 패배하자 자결했다. 중국은 이곳을 딩루창기념관으로 건립했다.
청일전쟁에서 드러나지 않는 조선
청일전쟁이란, 1894년부터 1895년 사이 청과 일본이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둘러싸고 벌인 전쟁이라고 일반적으로 소개된다. 한국에서는 청일전쟁 외에도 갑오농민전쟁, 중국에서는 갑오전쟁, 일본에서는 일청전쟁 등으로 명명한다. 청일전쟁의 목적과 결과를 본다면 다른 용어가 필요하다는 제의가 다수다. 1894년 시작된 청일전쟁을 제1차 중일전쟁, 1937년 중일전쟁을 제2차 중일전쟁으로 명명하기도 한다. 한편으로 청일전쟁을 제1차 조선전쟁, 러일전쟁을 제2차 조선전쟁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청일전쟁이라는 명칭에서는 조선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조선’의 관점에서 다시 논의하자는 연구 또한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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