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17일 일본 최고재판소(한국의 대법원에 해당)는 2013년 10월 22일 한국인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 27명이 제기했던 야스쿠니신사 합사 철회 소송을 기각했다. 원고가 요구한 것은 무엇이고 일본 재판부는 어떤 논리로 이를 기각한 것일까? 재판부 판결은 역사적 사실과 일치하는가?
원고의 요구
원고는 ❶ 야스쿠니신사가 영새부(靈璽簿) 등 모든 명부에서 합사된 피해자 이름을 삭제할 것, 즉 더 이상 동 신사의 신으로 모시지 말 것, ❷ 일본 정부가 피해자 정보를 야스쿠니신사에 제공하는 등 합사에 협력한 것은 위법임을 인정하고 원고에게 배상(1엔)할 것, ❸ 원고에게 피해자 유골을 인도하고 예의를 갖추어 전사 사실을 알릴 것을 요구했다.
지금까지 ❶과 ❷를 요구하는 소송은 5건 제기되었는데 전부 기각당했다. 2013년 소송은 ❸을 요구한 것이 특징인데, 일본 정부가 유족의 동의도 없이 한국인 피해자 정보를 야스쿠니신사에 제공하면서도, 유족에게는 전사 사실을 알리지 않았고 유골도 제대로 돌려주지 않았다는 부조리한 현실을 고발하는 의미가 있었다.
재판에서 쟁점이 된 것은 일본 헌법에 보장된 신앙의 자유와 정교분리원칙 위반 여부였지만, 한국인 원고가 법정에서 호소한 것은 야스쿠니신사 합사는 피해자와 유족의 명예를 훼손한다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되어 있음을 의미하는 ‘합사제’라는 도장을 본 순간 저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버지는 ‘천황’을 위해 목숨을 바친 것이 아니라 강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동원되어 목숨을 잃은 것입니다. 어린 시절 친구에게 ‘너희 아버지는 일본군이었지?’라는 말을 듣고 괴로워한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된 것은 끝없는 불명예입니다. 가족에게 통지도 하지 않고 애초에 의논도 하지 않고 멋대로 합사한 것은 매우 굴욕적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_원고 고인형 씨가 일본 법원에 제출한 진술서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는 일본군
출처: 靖國神社臨時大祭委員, 『靖國神社臨時大祭記念寫眞帖)』, 1940.4
재판부 판결
최고재판소는 원고의 요구(❶, ❷, ❸) 가운데 일본 정부가 야스쿠니신사에 정보를 제공한 것은 위법이라며 손해 배상을 청구한 부분(❷)만을 수리했다. 1심과 2심에서는 정부가 야스쿠니신사에 피해자 정보를 제공한 것에는 위법성이 없고 정교분리원칙을 위배한 것도 아니라며 소송을 기각했다. 최고재판소는 피해자의 야스쿠니신사 합사가 이루어진 것이 1959년이기 때문에 법적으로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기간(제척기간)은 1979년까지였다며 손해배상청구권이 소멸했다고 판단했다. 다만, 재판관 4명 가운데 1명은 반대의견을 냈다.
미우라 마모루(三浦守) 재판관은 2심에서 유족이 합사에 동의하지 않았음에도 한국과 일본의 역사적 관계, 야스쿠니신사의 역할, 한국인 피해자 전사 경위 등을 포함한 충분한 심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아사히신문도 1월 28일 사설에서 문제의 본질을 회피한 판결이라고 비판했다.
역사적 사실
첫째, 최고재판소는 제척기간을 사유로 내세워 소송을 기각했으나, 야스쿠니신사는 합사 사실을 한국인 유족에게는 알리지 않았고, 일본 정부는 전사 사실조차 통보하지 않았다. 유족은 1990년대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하는 과정에서 피해자가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미우라 재판관은 원고가 합사 사실을 인지했을 때 비로소 평온한 정신 상태를 유지하기 어려운 피해가 발생했다며, 합사 시점이 아니라 원고가 이를 인지한 시점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2024년 7월 3일 일본 최고재판소는 우생보호법에 따라 장애 등을 이유로 강제 불임을 강요당한 피해자가 제소한 재판에서는 국가면책이 현저하게 정의에 반한다며 제척기간을 적용하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번 판결은 법에 보장한 정의와 공평 이념을 현저하게 위반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둘째, 야스쿠니신사 한국인 합사는 일본 정부와 야스쿠니신사가 하나가 되어 범국가적 프로젝트로 추진했다. 1945년 일본 패전 후 야스쿠니신사를 관리했던 육군성과 해군성은 해체되고 동 신사는 1946년 종교법인이 되었다. 새로 만들어진 일본 헌법은 국가가 종교에 관여하는 것을 금지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육군성과 해군성의 업무를 인계받은 후생성 관계자들을 야스쿠니신사 합사 대상을 논의하는 회의에 참석시켜 한국인 합사 문제를 협의하고 개인 자료를 제공했다. 후생성이 제공한 한국인 자료는 20,727명분으로, 연도별로는 1959년 19,650명, 1964년 82명, 1972년 66명, 1973년 385명, 1975년 509명이다.
야스쿠니신사 합사 사무처리요령(안)(1956.1.23) 야스쿠니신사 합사를 위해 지방행정을 담당하는 도도부현과 일본 정부 (후생성 인양원호국), 야스쿠니신사가 역할을 분담해 합사를 추진했음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출처: 国立国会図書館調査及び立法考査局 編, 『新編靖国神社問題資料集』, 2007 | 해군군속신상조사표 합사 관련 내용을 기재하였다. 자료의 동그라미는 ‘야스쿠니신사 1959.7.31 합사 수속 완료’, 네모는 ‘1959년 10월 17일 합사 완료’라고 적혀 있다. 출처: 일제강점하강제동원진상규명위원회 편, 『야스쿠니신사 한국인 합사경위 및 합사자 명부 진상조사』, 2007 |
일본 정부는 재판에서 합사는 야스쿠니신사가 독자적으로 결정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야스쿠니신사는 "전쟁으로 인한 공무사에 해당하는지 아닌지는 야스쿠니신사가 제멋대로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므로 국가의 결정에 따를 것은 당연한 절차"이고 "구 후생성 인양원호국에 협력을 요청하고 그 회답 자료를 토대로 합사했다"고 주장했다.
끝나지 않은 야스쿠니신사 한국인 합사
2013년 소송에서 원고는 "일본의 침략전쟁에 의해 사랑하는 가족을 강제적으로 빼앗겨, 전사를 당한 고통을 맛보며 고통스런 인생을 강요당한 원고들에게 그 침략전쟁의 정신적 지주이자 침략자들이 합사된 야스쿠니신사에 사랑하는 아버지·형제가 합사된 것은 우롱당하고 모욕당하는 것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유족은 합사가 철회되지 않는 한 일본의 식민지 지배는 끝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들의 아픔에 귀를 기울이고 공감할 수 있는 광복 80주년이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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