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三國史(원본(原本)에는 분명히 삼국사(三國史)로 되어있음-한국학중앙연구원(韓國學中央硏究院))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 확인(確認)가능(可能))의 한 내용(內容)을 소개(紹介)합니다. 얼마전에 원로사학자(元老史學者)의 글을 국한문혼용(國漢文混用)으로 올렸더니 한자사용(漢字使用)에 대해 언짢아하시는 분이 계셨는데 우리의 역사서(歷史書)는 대부분이 한자(漢字)로 쓰여져 있고 한자(漢字)를 중국글자라고 오해(誤解)하고 도외(度外)시 했기에 우리의 역사(歷史)를 잃어버리는데 일조(一助)했고, 또한 심각(深刻)한 위기(危機)에 처해 있는것입니다. 그 이유(理由)는 지면(紙面)상 한계(限界)가 있어 다음으로 미루도록 하지요. 이글은 대한히 중요(重要)한 글입니다. 일단 삼국사 신라본기 지증마립간 13년 서기512년에 우산국에 관한 원문(原文)을 가지고 설명(說明)하지요.
과연 아래 원문(原文)을 보시고 해석(解釋)이 가능한 분이 대한민국(大韓民國)의 국민(國民)중 몇분이나 계실까요? 물론 저도 마찬가지이고 대부분(大部分)의 한국인(韓國人)의 한문(漢文)해석능력(解釋能力)은 한문(漢文)을 전문적(專門的)으로 공부하신분 이외는 힘들다고 생각됩니다. 그것이 우리의 현실(現實)입니다
신라지증 마립간(13년-서기 512년)
(三年 夏六月 于山國歸服 歲以土宜爲貢 于山國在溟州正東海島
或名鬱陵島 地方一百里 恃嶮不服 伊湌異斯夫爲何瑟羅州軍主 謂
“于山人愚悍 難以威來 可以計服” 乃多造木偶師子 分載戰船
抵[주석6]其國海岸 誑告曰 “汝若不服 則放此猛獸踏殺之” 國人恐懼 則降 )
[번역문]
13년(512) 여름 6월에 우산국(于山國)이 항복하여 해마다 토산물을
바쳤다. 우산국은 명주(溟州)의 정동쪽 바다에 있는 섬으로 혹은
울릉도(鬱陵島)라고도 한다. 땅은 사방 100리인데, 지세가 험한 것을
믿고 항복(降伏)하지 않았다. 이찬 이사부(異斯夫)가 하슬라주(何瑟羅州)
군주가 되어 말하기를 “우산국 사람은 어리석고도 사나워서 힘으로
복속시키기는 어려우나 꾀로는 복속(復屬)시킬 수 있다.”하고, 이에 나무
사자를 많이 만들어 전함(戰艦)에 나누어 싣고 그 나라 해안(海岸)에 이르러
거짓으로 “너희가 만약 항복하지 않으면 이 사나운 짐승을 풀어 밟아
죽이겠다.”고 말하자 그 나라 사람들이 두려워 곧 항복(降伏)하였다. )
위 글에서 보다시피 번역본(飜譯本)이 없으면 원문(原文)을 이해(理解)할 수 없을뿐더러 잘못번역(飜譯)되어 있더라도 한문(漢文)의 해석능력(解釋能力)이 없으면 잘못된 부분(部分)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가 없지요. 그리고 해석(解釋)된 그대로 이해(理解)를 하지요. 삼국사(三國史)의 해석(解釋)을 처음에 어느분이 해놓으셨는지는 모르겠으나, 현재 시중(市中)에 나와있는 삼국사(三國史)를 보면 번역(飜譯)이 대등소이 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봅시다. 과연 1,500년전에 동해안(東海岸)에서 최단거리(最短距離)로 130km이상 떨어져 있는 울릉도(鬱陵島)라 일컫는 우산국(于山國)을 이사부(異斯夫)장군(將軍)의 지휘(指揮)하에 나무로 만든 사자(獅子)상으로 겁을 주니 항복(降伏)하였다고 하는데 한마디로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현대(現代)의 선박(船舶)으로도 꽤여러 시간이 걸린다고 하는데 그당시의 목선(木船)으로 병력(兵力)을 싣고 우산국(于山國)을 토벌(討伐)할려고 했다는 것은 잠꼬대에 불과합니다. 신라(新羅)지증왕대의 기록(記錄)대로 신라(新羅)가 한반도(韓半島)에 존재(存在)했다면, 130km이상 떨어져 있어 보이지도 않는 우산국(于山國)이 무슨 위험(危險)한 존재(存在)가 되겠습니까.물론 우산국(于山國)이는것이 존재(存在)는 했겠지만 현재(現在)의 울릉도(鬱陵島)가 우산국(于山國)은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위 문장(文章)에서도 이야기 하듯 땅의 넓이가 사방(四方) 100리하고 하는데 울릉도(鬱陵島)에 대해서 확인(確認)해보니 울릉도(鬱陵島)는 개략적(槪略的)으로(7300만㎡ 가로세로가 8.5km가 약간 넘더군요. 위 문장에서와 같이 사방100리정도는 되어야 한나라(國)라고 나와있는데 우산국(雨傘國)이라고 하는 현재(現在)의 울릉도(鬱陵島)의 면적(面積)은 너무나도 작더군요. 그리고 이사부(異斯夫)의 우산국(于山國))토벌(討伐)이 있은지 905년이 지난 조선태종(朝鮮太宗)13년(서기1,417년도 의 울릉도(鬱陵島) 인구(人口)가 15세대 86명으로 나와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지금으로 부터 1,500년전의 우산국(于山國)이라고 하는 울릉도(鬱陵島)에는 사람이 살지않았다는 반증(反證)입니다. 사람이 살지않는 머나먼 무인도(無人島)를 토벌(討伐)했다는 것은 이제 더이상 믿어서도 안됩니다. 이러한 것들이 일제시대(日帝時代) 일본(日本)의 어용사학자(御用史學者)들이 찬란(燦爛)한 한국(韓國)의 역사(歷史)를 잘라내고 편집(編輯)된 한국사(韓國史)를 해방(解放)된지 60년이 지난 지금도 교육(敎育)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번에 올린 글에서 밝혔듯이 열도인(列島人)이 한반도를 식민지화(植民地化)한 이후 한민족말살정책(韓民族抹殺政策)의 일환(一環)으로 한민족(韓民族)의 역사(歷史)를 거짓으로 꾸며 강제(强制)로 교육(敎育)시켜서 유구(遺構)한 한민족(韓民族)의 상고사(上古史)를 절반을 잘라내고 방대(尨大)한 한민족(韓民族) 역사 무대의 강역(疆域)을 왜소(矮小)하게 축소(縮小)하는 등 「이 지구상(地球上)에 한번도 있지 않았던 행위(行爲)를」 하여 지금에 와 있는 것이다 라고 어느 사학자(史學者)는 는 말했습니다.
그 사학자(史學者)의 이름은 밝히지 않겠지만, 한국역사학계(韓國歷史學界) 에서는 太斗로서 무소불위(無所不爲)의 위치에 있던 사람입니다.일제(日帝)의 식민사관(植民史觀)에 한국(韓國)의 어용사학자(御用史學者)로 참여(參與)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니 그 양반으로서는 일본인(日本人)의 행위(行爲)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새로운 삼국사(三國史)의 재해석(再解釋)이 필요(必要)하다고 봅니다. 재해석(再解釋)의 전제조건(前提條件)은 현 삼국사(三國史)의 무대(舞臺)는 대륙(大陸)이라는 것입니다. 삼국사(三國史)의 어느부분에 삼국(三國)이 한반도(韓半島)에 있다는 내용(內容)은 없습니다. 위 사학자(史學者)의 말대로 방대(尨大)한 한민족(韓民族)의 역사(歷史) 무대(舞臺)강역(疆域)을 축소(縮小)시켜 억지(抑止)로 한반도(韓半島)안에 밀어 넣고 지명(地名)을 심어놓은 것을 그대로 답습(踏襲)하여 교육(敎育)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태종 33권, 17년(1417 정유 / 명 영락(永樂) 15년) 2월 5일(임술) 3번째기사안무사 김인우가 우산도에서 돌아와 토산물 등을 바치다
안무사(按撫使) 김인우(金麟雨)가 우산도(于山島)에서 돌아와 토산물(土産物)인 대죽(大竹)·수우피(水牛皮)·생저(生苧)·면자(綿子)·검박목(檢樸木) 등을 바쳤다. 또 그곳의 거주민 3명을 거느리고 왔는데, 그 섬의 호수[戶]는 15구(口)요, 남녀를 합치면 86명이었다. 김인우가 갔다가 돌아올 때에, 두 번이나 태풍(颱風)을 만나서 겨우 살아날 수 있었다고 했다.
○按撫使金麟雨還自于山島, 獻土産大竹、水牛皮、生苧、綿子、檢樸木等物, 且率居人三名以來。 其島戶凡十五口, 男女幷八十六。 麟雨之往還也, 再逢颶風, 僅得其生。
【태백산사고본】 15책 33권 8장 B면
【영인본】 2책 146면
【분류】 *재정-진상(進上) / *과학-지학(地學) / *호구-호구(戶口)
PS:국한문 혼용으로 작성한 것은 우리의 역사를 조금이라도 찾기 위해서 입니다. 국민여러분 만이 우리의 역사를 찾으실수 있습니다.항상 건강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