植民史學(식민사학)의 固着化(고착화)를 打破(타파)합시다
  • 작성일2009.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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百濟武寧王陵 墓誌石과 墓誌

1971년 충남공주(忠南公州) 송산리(松山里)에서 배수로공사(排水路工事) 중 고분(古墳)이 발견(發見)되어 발굴조사(發掘調査)를 한 바, 금은제장신구(金銀制裝身具), 무기(武器),동경(銅鏡)등 3천여 점의 유물(遺物)이 나왔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重要)한 것은 왕(王)과 왕비(王妃)의 묘지석(墓地石)과 매지권(買地券)이 출토(出土)되었으므로 이것을 근거(根據)로 하여 백제(百濟) 25대 무녕왕(武寧王)의 무덤이라고 주장(主張)하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무령왕묘지(武寧王墓誌)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영동대장군 백제사마왕(寧東大將軍 百濟斯麻王)
년62세계묘년5월(年六十二歲癸卯年五月)
병술삭칠일임진붕(丙戌朔七日壬辰崩)
지을사년8월계유삭(到乙巳年八月癸酉朔)
12일갑신안조등관(十二日甲申安厝登冠)
대묘입지여재(大墓立志如在)
상기 묘지(墓誌)의 뜻:영동대장군(寧東大將軍) 백제사마왕(百濟斯麻王)은, 62세로 계묘년(AD 523년)5월7일 붕어(崩御)하여,(3년째 되던)을사(乙巳)년(AD 525)8월12일 시신(屍身)을 편안히 온존(溫存)하여 신선(神仙)의 지경(地境)에 들어가는 대묘(大墓로) 만들어 안치(安置)하고 묘지(墓誌)를 세운다

왕(王)의 墓誌石(묘지석)과 墓誌銘(묘지명)은 부여 융(夫餘 隆)의 墓誌銘(묘지명)과 우리가 발해(渤海)라 이야기하는 大震國 제3대(代) 문왕(文王)의 둘째 정혜공주(貞惠公主))와 넷째 정효공주(貞孝公主)의 墓誌銘에 견주어 보더라도 後代(후대)에 누군가 의도적(意圖的)으로 만들어 묻어논 것이라고 밖에는 달리 생각할 수 없습니다. 격식(格式)에도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초라하기 그지없습니다. 묻혀있는 자(者)에 관한 서문(序文)도 없고, 자(字)․출생지(出生地)의 기록(記錄)도 없고, 선조(先祖)에 대한 기록(記錄)도 없으며, 사람의 됨됨이나 一生(일생) 동안의 行蹟․왕(王)으로서의 치적(治積)도 기술(記述)되어 있지 않으며, 죽은 사인(死因)이나 죽은 장소(場所) 그리고 장지(葬地)도 기록(記錄)되어 있지 않으며, 추증시호(追贈諡號)가 무녕왕(武寧王)이라는 기록(記錄)도 없으므로, 일국(一國)의 왕(王)의 지위(地位)나 품위(品位)에 어울리지 않는 묘지명(墓誌銘)으로 어딘지 석연(釋然)치 않습니다.
「삼국사(三國史)」에 의하면 아들 성왕(聖王)은 󰡒지혜(智慧)와 식견(識見)이 뛰어났으며 상황판단(狀況板斷)을 잘한 왕(王)이고, 고구려(高句麗)의 군사(軍士)를 물리치고 신라(新羅)와의 화친(和親)과 전쟁(戰爭)을 하는 양면정책(兩面政策)을 편 왕(王)이다󰡓라고 기록(記錄)하고 있는데, 그러한 현명(賢明)한 왕(王)이 자신(自身)의 부모(父母)의 무덤을 볼품없이 만들고, 문무백관(文武百官)이 참석(參席)한 자리에서 묘지(墓誌)를 격(格)에 어울리지 않는 격식(格式)과 문장(文章)으로 치졸(稚拙)하게 만들어 넣었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理解)가 가지 않습니다. 또한 공(功)들여 다듬은 묘지석(墓誌石)도 아니며, 격식(格式)도 일국(一國)의 왕위(王威)에 걸맞지 않는 지석(誌石)임은 한눈에 봐도 알수 있으며 일국(一國)의 왕(王)의 이름을 묘지(墓誌)에는 사마왕(斯麻王)이며 삼국사(三國史)(삼국사기(三國史記)는 일제(日帝)에 의해 교정(矯正)된후의 이름임)에는 사마왕(斯摩王)입니다. 일국(一國)의 왕의 이름을 오기(誤記) 한다는 것은 있을수도 없는일입니다.. 누가 보더라도 후대(後代) 에 조작(造作)되거나 도굴(盜掘)시에 지금의 묘지(墓誌)를 넣지 않았나 하는 의심(疑心)을 지울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무녕왕릉(武寧王陵)은 발굴(發掘)후 영구폐쇄(永久閉鎖)하여 후학(後學)들의 연구(硏究)까지 막고 있다는데 대해서 더욱 의구심(疑懼心)이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관광객(觀光客)들이 무녕왕릉(武寧王陵)의 묘지라고 1,000만명이상 보고온 것은 기존(旣存) 제후급릉(諸侯級陵)에 묘지(墓誌)를 만들어 넣은후에 의도(意圖)된 발굴(發掘)로 생각되어 집니다.
또한 성왕(聖王)의 사비천도(泗泌遷都:남부여)하기 이전(以前)인 웅진(熊津)(천도(遷都)시대에는 개로왕(蓋鹵王),문주왕(文周王),삼근왕(三斤王),동성왕(東城王)등 4대(代)의 왕(王)이 있었으니 공주(公州)무녕왕릉(武寧王陵) 근처(近處)에 4개(個)의 왕릉(王陵)이 더 있어야 하는데 발견(發見)되지 않고 있다는 것도 의아(疑訝)합니다.(또한 릉(陵)이 있다 손 치더라도 보통(普通)의 경우(境遇) 왕릉(王陵)주위(周圍)에 다른 릉(陵)이 있다면 떨어져서 릉(陵)을 조성(造成)하는 것이 관례(慣例)인데 무녕왕릉(武寧王陵)에는 가까이 붙어서(전면 20m) 2개(個)의 릉(陵)이 있다는 것이 예외이다)
왕비의 묘지(王妃의 墓誌)
병오년 십일월 백제국왕대비수종 거상지유지 계미년 을유년 이월 계미삭십이일갑오 개장 유대묘 입지여(丙午年 十日月 百濟國王大妃壽終 居喪地酉地 癸未年 乙酉年 二月 癸未朔十二日甲午 改葬 遺大墓 立志如))
왕비(王妃)의 지석(誌石)에는 「병오(丙午 AD 526년)11월에 백제국왕(百濟國王) 왕비(王妃)가 죽어 장사 지내기를 유지(酉地:서쪽땅)에 하였으며, 기유(己酉 AD 529년)2월12일 대묘(大墓)에 이장(移葬)하였다」고 새겨져 있습니다. 「백제국왕 대비百濟國王大妃」라고 하였으니 어느 왕(王)의 비(妃)인지 알 수 없고, 누구의 딸이었는지도 밝히지 않고, 생전(生前)의 인품(人品)이나 덕행(德行)의 유무(有無) 등도 기록(記錄)하지 않으니, 고대국가(古代國家)에서는 이러한 엉터리 왕비(王妃)의 지석(誌石)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위 글은 구자성 선생님의 看過하여 잊혀진 우리의 上古史 중에서 발췌

저는 이글을 읽으면서 발굴에 參與(참여)했던 李모라는 분의 이야기가 생각나 적습니다. 그분은 발굴과 동시에 墓制(묘제)가 梁(양)나라의 墓制(묘제)라고 했다는 군요, 과연 그럴까요. 百濟의 存續年代(존속년대)는 歪曲(왜곡)된 三國史의 記錄대로라도 31代 678년간이나 存續했던 大陸의 覇者 였고 梁나라는 서기 502년에서 557년까지 不過(불과) 5代 55년간 存續아닌 스쳐지나가던 나라였는데 判斷(판단)은 여러분이 해주세요정말 發想(발상)의 轉換(전환)이 必要(필요)할 때입니다. 국민여러분 건강한 여름 보내세요. 대한민국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