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릉도수 배상삼 살인사건, 그 진실은...(수정보완)
  • 작성일2010.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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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수 배상삼 살인사건, 그 진실은....

울릉도 개척 초기 울릉도수 배상삼(裵尙三)이 다수에 의해 무참히 살해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그럼 배상삼은 어떤 인물이고 누가 왜 죽였을까?

『강원도관초』(江原道關草) 제3책의 1894년 1월 7일자 기사에 배상삼에 대한 기록이 있다.
‘유민 배상삼, 배치겸, 이운경은 외국인과 통하여 사사로이 곡물을 몰래 반출하였다. 3명을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에 압송하고, 울릉도민에게 외국선박과 교역하지 말라고 지시하라’ 는 내용이다.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은 외교와 통상사무를 관장하는 곳으로 지금의 외교통상부라고 할 수 있다.

『강원도관초』외에 배상삼의 죽음에 대한 기록은 『울릉문화』(1996.12 발행, 2002.2 보완.재발행)와 『울릉군지』(2007) 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울릉군지』에는 두 가지의 상반된 이야기가 실려 있다.
배상삼은 당연히 죽어야 할 사람이라 개척민들에 의해 죽었다는 <10-1. 태하의 배상삼>이고 『울릉문화』와 같은 내용이다.
<10-2. 태하의 배상삼>은 울릉도수로서 개척민들의 숭상을 받았던 배상삼을 홍재유(洪在裕) 등 8인이 잔인하게 죽였다는 내용이다.

『울릉문화』와 『울릉군지』외에 1963년 8월 11일자 《조선일보》 기사에 배상삼(배성삼)의 생화장을 목격했다는 박운학의 증언이 수록되어 있다. 박운학은 거제도 출신으로 의주,진남포,장산마루에서 쌀을 사서 영일만,울산,강릉,원산에서 팔고 빈 배를 바람에 맡겨 울릉도에 들어갔다, 울릉도는 거제도로 가는길에 새 배를 짓는 곳으로 이때 배상삼의 죽음을 목격했다고 한다.
그런데 1895년의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는 『울릉군지』와 달리 《조선일보》는 1902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필자는 『강원도관초』『울릉문화』『울릉군지』 외에 배상삼의 죽음에 대한 울릉주민의 증언을 여러 차례 들은 바 있다.
증언에 따르면 배상삼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억울한 누명을 벗어야 한다고 했다.

다음은 증언 요약이다.

''배도수는 일본인의 벌목을 금지했다. 이때 조선인 몇 사람이 일본인의 벌목을 도와주겠다며 나섰고 저동에 사는 배상삼을 태하로 불러들였다. 배상삼이 뜻을 굽히지 않자 이들은 고춧가루를 눈에 뿌려 앞을 못보게 하고 때려 죽였다. 부인까지 죽이려고 했으나 임신중이라 살려두었고 후일 유복자가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울릉도에 오기도 했다.''


그럼 울릉도수 배상삼 살인사건의 진실은 무엇일까?

『강원도관초』와 『울릉문화』『울릉군지』의 <10-1>만 본다면 배상삼의 죽음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울릉군지 <10-2>는 배상삼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주장에 무게를 싣고 있다.
<10-2>는 살인에 가담했던 사람의 이름과 시기, 사건 이후의 상황, 배상삼의 가족관계, 아들들의 복수시도, 억울한 죽음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울릉군지』 편집위원 전태수씨의 후일담 등을 담고 있는데 울릉주민의 증언과 거의 같기 때문이다.

다음은 배상삼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내용을 싣게 된 과정을 설명하는 <후일담 4>이다.

“배도수(배상삼)에 대하여는 지금까지 포악하고 여색을 좋아한 사람이었으므로 타살되었다고 오전(誤傳)되어 왔으나 손태수(孫泰銖)씨의 선조고(先祖考)가 울릉도지를 집필할 때 손씨가 ‘배도수의 행적을 바로 잡아주어야 한다’고 말하자 ‘아직 당시 8인 중 2,3인이 생존하고 있으며 그 자손이 후일을 기하여 네가 너에게 구전하니 후일을 기하여 네가 바로 잡아라’고 말하였다. 그 후 다행스럽게 『울릉군지』(1989)가 발간될 때 손태수씨가 집필위원으로 위촉됨에 따라 이를 소상히 기록하여 세상에 진상을 밝히게 되었다.”


왜? 울릉도 주민들은 배상삼이 억울하게 죽었다며 안타까워 하고, 오랜세월이 흐른 이때 그 진실을 밝히려고 하는 것일까?

저동의 집을 떠나 죽음의 굿판이 벌어질 태하로 가던중에 죽음을 예고하듯 나팔소리가 들렸다는 서면의 나발등 전설.
배상삼의 죽음이후 살인범들이 자살, 사고로 죽고 공범들의 죽음을 지켜봐야 했던 한 사람, 그리고 그 한 사람이 두려움을 떨치기 위해 참회를 하고, 마을(대아리조트 일대)입구에 있는 바위를 쪼며 여생을 보냈다는 흔적이 지금도 개울가에 남아 있다.


지난해 필자는 사동에 남아 있는 흔적을 수소문끝에 어렵게 찾아냈다.
하루에도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눈길이 가는 곳이다.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배상삼의 억울한 죽음을 기억하는 이는 얼마나 될까?


현장소개는 다음 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