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하일기 재방문7
  • 작성일2012.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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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판첸라마를 접견하는 과정에서 접견을 대충하였는데 이 사실을 乾隆帝가 알고 어제의 극진한 대접에서 매우 진노하게 된다. (아울러 판첸라마로부터 예품으로 받은 불상 등을 어떻게 처리하는가에 대한 사신단의 논란이 이어진다.)
연암은 당시 판첸라마를 접견한 사실을 단순한 종교적 이슈로만 보지 않고 오히려 청나라의 통치방법으로 이해하고 조선은 이에 대한 대비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北京으로 돌아와 귀국하는데 이 같은 행적을 담은 연암의 기행문은 당시 청나라와의 화친을 굴욕이라고 생각하는 조선 주류사회에서 달갑지 않은 것은 뻔한 사실이었다. 이 같은 연암의 과학적, 실용주의적 중국기행문은 이 같은 이유로 당대에는 빛을 발하지 못하다가 약 50년 이상이 경과해서야 비로소 조금씩 세상에 알려지게 되어 원본이 일부 전해지지 않은 점도 아쉬운 부분이다.

乾隆帝는 잘 알다시피 청나라 태평성대를 이루는 康熙-雍正-乾隆 130년간으로 康熙와 乾隆이 각각 60년씩 재위하였다. 내가 최근 臺灣의 故宮博物館을 견학하였는데 청나라의 도기 및 옥가공 등 물산측면에서 그전 명나라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높은 경제수준을 유지하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乾隆皇帝는 할아버지인 康熙帝의 치적을 그대로 계승하여 국경을 현재의 국경으로 확장하고 강희자전을 편찬하는 등 문화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큰 업적을 이루었다.

청나라는 기본적으로 몽골, 티베트 등 혈연, 종교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가진 민족간 연립정권적 성격을 가지는데 과거 5호 16국 및 元代의 많은 북방정권이 쉽게 무너지는 이유를 너무 쉽게 북방민족의 정통성을 상실하고 漢化되었다고 판단하고 최대한 초원시절의 풍습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지속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