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하일기 재방문8
  • 작성일2012.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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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청황제는 漢族인 中原의 황제일 뿐 아니라 몽골족의 수장으로 초원의 칸이라는 점을 확인시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많은 중국 왕조가 여름에 북방민족의 기습으로 멸망하였음)

당시 청나라의 실용적 문물을 받아들이자는 학풍을 北學이라 하였는데 유학이 주를 이루는 당시 주류사회에서 박지원은 상당히 냉대받는 지금의 우리 표현으로는 반체제 베스트셀러 작가였다.
주로 遼寧地域을 지나면서 연암이 쓴 소설 중 虎叱(호랑이의 질책)이 유명한데 당시 세상 물정에 어둡고 그저 유학논쟁에만 매달리는 조선선비의 현실을 안타까워한 내용으로 이해하고 있다.

열하일기는 총 26권으로 6월24일 압록강을 건너 8월 20일 베이징으로 돌아오는 약 2개월의 이야기를 기록한 기행문으로 조선후기 실학 중 백미로 손꼽힌다. 특히 벼슬을 하지 않은 순수한 야인의 입장에서 경제발전을 추구하는 정조 때의 실학사상을 이끄는 주요 저술로 평가 받고 있다. 최근에 1956년 번역된 이래 50년 이상 경과한 이후 이제서야 김명호선생님에 의해 다시 완역되어 늦으나마 적극 환영할 일이다. 저와 가까운 어떤 학자 한 분은 우리나라 熱河日記가 학문적으로 매우 중요한데도 과거 상당한 오류를 포함한 번역본으로 그저 인용될 뿐 체계적으로 연구되지 못하고 오랜 기간 그냥 방치된 점을 개탄하는 것을 접한 적이 있는데 이를 계기로 관심있는 학자들이 적극 연구를 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정조후기인 1794년에 정약용선생 주관으로 지금의 수원인 화성 행궁 축성이 이루어 지는데 공기가 당시로서는 파격적으로 2년 정도에 축성하여 박지원이 熱河日記에서 기록한 청나라의 축성기술, 벽돌기술이 많이 응용되지 않았나 하는 추측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