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古朝鮮과 한漢나라의 ◐경계선◑은 호지하虖池河(現. 滹沱河 )
  • 작성일2021.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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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司馬遷 사기史記에 한국고대사를 풀수 있는 열쇠가 숨어있다

■ 한漢(전한前漢)의 영토[ 기원전 107년 ~ 기원후 8년 ]
※주) 사마천司馬遷 사기史記에 나타나는 나라의 주 활동 무대를 중심으로 작성된 내용이다
---> https://blog.naver.com/tnrnfle/222324381699

1) 한漢 무제武濟가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한 년도를 영토관점에서 전한前漢의 시작으로 보았다
※주) 전한前漢은 기원전 202년부터 기원후 8년까지다

2) 한漢나라는 진시황의 진秦나라 영토를 이어 받았다

3) 한무제 시기( 기원전 128년)에 예薉나라 임금인 남려가 항복해서 창해군을 설치했는데...
예薉가 예맥국穢貊國이며 창해군이 연나라와 제나라 사이인 창주시滄州市다. 후한 말에 공손강이
예맥국의 일부를 침범하여 대방군을 설치한 것으로 추정된다(옛 현도군에 대방군 설치)
※주) 사기 평준서에 '창해군(滄海郡)을 설치하니 연(燕), 제(齊) 사이가 바람에 휩쓸리듯 소란'한
이유가 있을 것이고, 설치 2년만인 126년에 창해군이 폐지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예맥국이 한나라를 몰아낸 것으로 보인다)

4) 한 무제(漢 武帝) 원삭(元朔) 2년(기원전 127년)에 황하를 따라 흉노와 방어선을 쳤다는 것은...
섬서성 북쪽을 방어한 것이고, 상곡군의 구불구불하고 외진 조양일대의 땅을 포기한 것은
임분시臨汾市와 운성시​運城市를 제외한 산서성 전부를 포기한 것으로 추정된다

​5) 낙랑군樂浪郡과 최씨 낙랑국樂浪國은 별개가 아닌 같은 지역으로 추정된다
최씨 낙랑국이 위만조선보다 1년 빠른 서기전 195년에 세워졌고, 최씨 낙랑군멸망 뒤에
낙랑군이 삼국사기에 등장하고,위만조선 멸망후에 성이 밝혀지지 않은 재상 노인(路人)의 아들 최(最)가
온양후(溫陽侯)에 봉해졌으니, 재상 노인(路人)이 최씨고​ 후손이 낙랑국의 왕일 것으로 추정된다
※주) 한서 지리지에 따르면 한漢나라에서는 현縣에 후국侯國들이 있다

6) 관련 자료 글.
(1) 춘추시대 및 진시황의 진秦나라와 고조선의 경계선
☞ 사마천司馬遷 사기史記에 한국고대사를 풀 ◐열쇠.. : 네이버블로그 (naver.com)
(2) 한나라가 한사군을 설치한 장소는 형수시衡水市 무강현武强县
☞ 요수(遼水)는 殷의 하수(河水) ⑩ ◐위만조선.. : 네이버블로그 (naver.com)
(3)연燕나라는 장성長城을 호지하虖池河(現. 滹沱河 ) 강에 쌓았다
☞ 요수(遼水)는 殷의 하수(河水) ⑨ ◐연장성燕.. : 네이버블로그 (naver.com)

「한서」권6 무제기 창해군 설치
秋, 匈奴入遼西, 殺太守;入漁陽、雁門, 敗都尉, 殺略三千餘人. 遣將軍衛靑出雁門, 將軍李息出代, 獲首虜數千級. 東夷薉君南閭等[一]口二十八萬人降, 爲蒼海郡.
[一]服虔曰:「穢貊在辰韓之北, 高句麗沃沮之南, 東窮于大海.」 晉灼曰:「薉, 古穢字.」 師古曰:「南閭者, 薉君之名.」

(원삭元朔 원년인 B.C 128) 가을, 흉노가 요서를 침입해 태수를 죽였다. 어양, 안문을 침입해 도위를 패배시키고 3천여 명을 살략했다. 장군 위청(衛靑)을 보내 안문을 나가게 하고, 장군 이식(李息)은 대(代)를 나가게 하여 수천 급을 참획했다. ; 동이(東夷) 예군(薉君) 남려(南閭) 등 구(口) 28만 명이 항복하자 창해군(蒼海郡)을 설치했다.

[一] 복건 왈 [예(穢)는 예맥(穢貊)으로 진한(辰韓)의 북쪽, 고구려, 옥저의 남쪽에 있었고 동쪽으로 대해로 막혀있었다. 진작 왈, 薉는 옛날의 穢 자다. 안사고 왈, 남려(南閭)는 예군(薉君)의 이름이다.]

사기 권30 평준서 平準書
自是之後,嚴助﹑朱買臣等招來東甌,[一]事兩越,[二]江淮之閒蕭然煩費矣.唐蒙﹑司馬相如開路西南夷,鑿山通道千餘里,以廣巴蜀,巴蜀之民罷焉.彭吳[三]賈滅朝鮮,[四]置滄海之郡,則燕齊之閒靡然發動.及王恢設謀馬邑,匈奴絶和親,侵擾北邊,兵連而不解,天下苦其勞,而干戈日滋.

[一]正義烏侯反.今台州永寧是也.
[二]正義南越及閩越.南越,今廣州南海也.閩越,今建州建安也.
[三]索隱人姓名.
[四]索隱彭吳始開其道而滅之也.

이 이후로(한무제 즉위 이래 재정과 경제가 풍족해지고 사치풍조가 일어난 후) 엄조(嚴助), 주매신(朱買臣) 등이 동구(東甌,※)를 [1] 초래(招來,초무;끌어들임)하고 양월(兩越,남월과 동월)에서 일을 벌이니 [2] 강회(江淮,장강과 회수) 사이가 소란해지고 크게 비용이 소모되었다. 당몽(唐蒙), 사마상여(司馬相如)는 서남이(西南夷)에 이르는 도로를 열어 천여 리에 걸쳐 산을 뚫고 길을 통하게 하니 파촉(巴蜀) 땅을 개척했으나 파촉 백성들은 피폐해졌다. 팽오(彭吳)는 [3] 조선(朝鮮)을 멸하고자 하여 [4] 창해군(滄海郡)을 설치하니 연(燕), 제(齊) 사이가 바람에 휩쓸리듯 소란해졌다. 그러다 왕회(王恢)가 마읍(馬邑)에서의 모책을 꾸미자 흉노가 화친을 끊고 북변을 침요(侵擾)하여 전쟁이 연이어 풀리지 않으니, 천하가 그 노역에 괴로움을 당했으나 간과(干戈,전란)는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해졌다.

창해군(蒼海郡) 폐지
한(漢) 무제(武帝)는 팽오(彭吳) 등에게 요동군(遼東郡)에서 창해군(蒼海郡)에 이르는 교통로를 닦게 하였지만 인력과 비용이 지나치게 많이 소모되어 공손홍(公孫弘, BC 200 ~ BC 121) 등의 건의를 받아 교통로 개척을 중단하였다. 그리고 BC 126년에 창해군(蒼海郡)도 폐지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창해군 [滄(蒼)海郡] (두산백과)

한나라는 마침내 하남 지역을 탈취​하여 그곳에 삭방성(朔方城)을 쌓고
옛날 진(秦)나라 때 몽염(蒙恬)이 만들었던 요새를 다시 수리하고 황하를 따라 견고하게 방어선을 쳤다.
한나라 역시 상곡군의 구불구불하고 외진 조양(造陽) 일대의 땅을 포기하여 흉노에게 넘겨주었다.
이 해가 한 무제(漢 武帝) 원삭(元朔) 2년(기원전 127년)이었다.
[출처] 110-9/15[史記列傳(사기열전)] 권110.匈奴列傳(흉노열전) (9/15)

※주) 황하를 따라 방어선을 쳤다는 것은 섬서성 북쪽을 방어한 것이고, 상곡군의 구불구불하고 외진 조양일대의 땅을 포기한 것은 임분시와 운성시를 제외한 산서성 전부를 포기한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