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韓은 산동성과 강소성이었다(후한서 동이열전 내용)
  • 작성일2021.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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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서는 중국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에 남조(南朝) 송(宋, 420~479)의 범엽(范曄, 398~445)이 편찬했다

■ 예맥국(예맥조선)은 하북성 창주시다
--> 고조선 영토(유방의 한漢나라와 ◐경계선◑은 호지하虖池河:現. 滹沱河 :네이버 포스트 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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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韓은 예맥국(穢貊國) 남쪽인 산동성과 강소성일 수 있다

※주) 예濊는 예맥국,예맥조선으로 하북성 천진시 아래 창주시滄州市이니, 예濊 나 한韓을 한반도, 고구려를 만주라는 선입관을 버리고, 동쪽 바다를 동해가 아니라 중국동쪽 바다인 황해로 보고..

---> 1) 고구려를 하북성 북부로, 2) 예濊를 중국 동부인 하북성 창주시로, 3)한韓을 중국 동부나 산동성,강소성으로 상상하고 읽어보시면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됩니다(바다는 덕주시 발해호수, 대해는 황해)


○ 後漢書註 001 東夷列傳註 002

찬자평(撰者評)
○ 論한다.

옛날 箕子註 136가 쇠망하는 殷나라의 운수를 피하여 朝鮮 땅에 피난하였다. 처음엔 그 나라의 풍속이 알려진 바 없었으나, 八條의 法註 137을 시행하여 사람들에게 해서는 안되는 것을 알게 하니, 마침내 그 邑落에 음란한 행동과 도둑이 없어져서 밤에도 문을 잠그지 않았으며, 악하고 나쁜 풍습을 바꾸고 너그럽고 간략한 법을 이루어 수백년 동안 행하여졌다.

그러므로 東夷의 전체가 柔謹으로 風化되어 三方註 138의 풍속과는 다르게 되었으니, 진실로 政敎가 창달되면 道義가 있게 마련인 것이다. 仲尼(공자)가 분연히 九夷에 가서 살으려 하였더니 어떤 이가 그곳은 더러운 곳이 아닌가 하므로, 孔子가 ‘君子가 살고 있으니 어찌 그곳이 더럽겠는가’註 139 한 것도 특히 그런 까닭이 있어서 일 것이다.

그 뒤 드디어 [중국과] 통상을 하게 되고 점차 上國과 교역하더니, 燕나라 사람 衛滿註 140이 그들의 풍속을 어지럽히자, 이에 [그들도] 따라서 나빠지게 되었다. 老子는 ‘法令이 불어날수록 도적이 많아진다’고 하였다. 箕子가 법조문을 간략하게 하고 信義로 다스린 따위는 聖賢의 法을 만든 근본취지를 얻었다 하겠다.

○ 贊한다.
옛날 堯임금이 羲仲을 嵎夷(산동성)에 살게 하니 곧 暘谷이라 한다. 山과 바다에 사는 것을 아홉 종족으로 구분지었다. 秦나라 말년에 정치가 혼란해지자 燕나라 사람들이 [이 땅에] 피난하여, 중국의 풍속을 어지럽히고 [東夷의] 풍속까지 나빠지게 하더니, 드디어 漢나라와 통하게 되었다. 아득하고 멀리서 통역하자니 복속도 하고 배반도 하는구나.

「王制」에 이르기를 ‘東方을 夷註 003라 한다’고 하였다.註 004 夷란 根本이다. [그 의미는] 夷가 어질어서 生命을 좋아하므로註 005 萬物이 땅에 근본하여 産出되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夷는] 天性이 유순하여 道理로서 다스리기 쉽기 때문에 君子國(서국 추정)과 不死國(산동반도 청구국 추정)이 있기까지 하다.註 006 夷에는 아홉 종류가 있으니, 畎夷·于夷·方夷·黃夷·白夷·赤夷·玄夷·風夷·陽夷가 그것이다.註 007 그러므로 孔子도 九夷에 살고 싶어하였다.註 008

○ 옛날 堯임금이 羲仲을 嵎夷(산동성)에 살도록 命하면서 ‘暘谷’이라 하였으니註 009 그곳은 대체로 해가 돋는 곳이다. 夏后氏의 太康이 德을 잃자, 夷人들이 처음으로 叛하기 시작하였다.註 010 少康 이후부터는 대대로 王化에 감복되어 王室에 복종하고 그들의 음악과 춤을 바치게 되었다.註 011

桀이 포악해지니 諸夷가 內地에 侵入하여 왔는데, 殷의 湯王이 革命하고 [난 뒤] 이들을 정벌하여 평정하였다.註 012 仲丁 때에 이르러 藍夷가 침입하였다.註 013 이로부터 복종하고 배반하기를 3백여년간 계속하였다. 武乙에 이르러 [殷이] 衰弱해지자, 東夷가 점차 강성해져서 드디어 淮水(산동성과 강소성 경계, 안휘성과 하남성 경계)와 岱山(산동성 泰山)으로 나뉘어 옮겨오더니 점차 中土에까지 뻗어와 살게 되었다.註 014

○ [周] 武王이 [殷의] 紂를 멸망시킴에 이르러 肅愼이 와서 石砮와 楛矢를 바쳤다.註 015 管叔과 蔡叔이 周나라를 배반하고 夷狄을 招誘하였는데, 周公이 이들을 정벌함으로서 東夷가 드디어 평정되었다.註 016 康王 때에 肅愼이 다시 왔다.註 017

그 후에 徐夷(강소성 서주시 부근)가 참람되어 王號를 칭하며 九夷를 거느리고 宗周를 쳐서 서쪽으로 黃河의 上流에까지 이르렀다.註 018 穆王은 그 세력이 한창 떨침을 두려워하여 동방 諸侯를 분리시켜 徐偃王註 019에게 命하여 다스리게 하였다. 偃王은 潢池 동쪽에 살았는데 國土가 500리였으며, 仁義를 행하니 陸路로 와서 朝會하는 나라가 36國이나 되었다. 穆王이 後에 赤驥·騄耳 등의 말을 얻어서 造父로 하여금 그 말을 몰고 楚나라에 알려서 徐國을 치게 하니, [造父는] 하룻만에 [楚나라에] 도착하였다. 이에 楚文王이 大兵을 일으켜 徐國을 멸망시켰다.註 020 偃王이 어질기만 하고 權道가 없어서 차마 그 백성을 데리고 싸우지 못하였으므로 敗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리하여 북으로 彭城 武原縣 東山 아래로 달아났는데, 따라간 백성이 萬名이나 되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그 산의 이름을 徐山이라고 하였다.

厲王이 無道하자, 淮夷가 쳐들어 왔다.註 021 王이 虢仲에게 命하여 征伐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는데, 宣王이 다시 召公에게 정벌하도록 명하여 그들을 평정하였다.註 022

幽王 代에 이르러 [王室이] 음란해지자 四夷가 번갈아 침범하여 왔는데, 齊桓公이 霸業을 닦고서 물리쳤다.註 023 楚靈王이 申에서 會盟할 적에는 그들도 회맹에 참여하였다. 그 뒤 越이 琅邪로 옮기고 나서 그들과 함께 전쟁을 일으켜, 마침내 中國의 여러 나라들을 능멸하고 작은 나라들을 侵略하여 멸망시켰다.

○ 秦나라가 六國을 합병한 후 淮水와 泗水 지방의 夷를 모두 분산시켜 秦의 백성으로 만들었다.註 024 陳涉이 起兵하여 秦의 天下가 허물어지자, 燕나라 사람 衛滿이 朝鮮으로 피난하여 와서 그 나라의 王이 되었다.註 025 백년 쯤 지나서 武帝가 그를 멸망시키니 이에 東夷가 처음으로 上京에 通하게 되었다.

○ 王莽이 位를 찬탈하여 황제가 되자, 貊人이 변경에 쳐들어와서 노략질하였다.註 026 建武(A.D.25~55; 高句麗 大武神王 8~太祖王 3) 초에는 [東夷가] 다시 와서 조공하였다.註 027 이때 遼東太守 祭肜의 위세가 北方을 떨게 하고 名聲이 海外에까지 진동하니, 이에 濊·貊·倭·韓 등이 萬里 밖에서 조공하였다.註 028 그리하여 章帝·和帝 시대 이후로 사절이 왕래하다가 永初 연간(A.D.107~113; 高句麗 太祖王 55~61)에 [국내 정치가] 多難하게 되자, 드디어 중국을 침입하여 노략질하였으며, 桓帝·靈帝가 失政하여 국내가 어지럽게 되자 이런 일이 점점 잦아지게 되었다.註 029

○ 漢나라가 中興한 뒤로부터 四夷의 賓貢이 때에 따라 어기거나 叛함은 있었으나, 使者와 通譯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풍속과 風土를 대략 기록할 수 있게 되었다.

東夷는 거의 모두 土着民으로서, 술마시고 노래하며 춤추기를 좋아하고, 冠으로는 고깔(弁)을 쓰고 비단옷을 입으며, 그릇은 俎豆를 사용하였으니, 이른바 중국이 禮를 잃으면 四夷에게서 구했던 것이다.
보통 蠻·夷·戎·狄을 통틀어 四夷라고 부르는 것은註 030 公·侯·伯·子·男을 모두 諸侯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 濊註 099(하북성 중부 창주시)

濊註 100는 북쪽으로는 高句驪·沃沮와, 남쪽(산동성)으로는 辰韓과 접해 있고, 동쪽은 大海(황해)에 닿으며, 서쪽은 樂浪에 이른다. 예 및 옥저·고구려는 본디 모두가 [옛] 朝鮮의 지역이다.

일찍이 [周] 武王이 箕子를 조선에 봉하니,註 101 기자는 [朝鮮 백성에게] 예의와 농사짓는 법과 양잠하는 법을 가르쳤다. 또 八條의 敎를 제정하니, 그 나라 사람들이 마침내 서로 도둑질을 하지 않아 [밤에도] 문을 닫지 아니하고, 婦人들은 貞節을 지키며 음식은 籩豆를 사용하여 먹었다.註 102

그 뒤 40여世를 지나 朝鮮侯 準에 이르러 스스로 王이라 칭하였다. 漢初의 대혼란기註 103에 燕·齊·趙나라 사람으로서 그 지역으로 피난간 사람이 수만명이나 되었는데, 연나라 사람 衛滿은 準을 공격하여 깨뜨리고, 스스로 朝鮮의 왕이 되어 나라가 손자 右渠에게까지 전하여졌다.

○ 元朔 원년(B.C.128) 에 濊君(창주시 예맥조선) 南閭註 104 등이 右渠를 배반하고 28萬口를 이끌고 遼東에 귀속하였으므로, 武帝는 그 지역으로 蒼海郡(창주시 예맥조선)註 105을 만들었으나, 수년 후에 곧 폐지하였다. 元封 3년(B.C.108)에 이르러서는 조선(형수시 무강현의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땅을 나누어 樂浪·臨屯·玄菟·眞番의 四郡을 두었다. 昭帝 始元 5년(B.C.82)에는 임둔과 진번을 폐지하여 낙랑과 현도에 합병하였다.註 106 현도는 다시 [高]句驪로 옮겼으며 單單大領의 동쪽의 沃沮와 濊貊은 모두 낙랑에 예속되었다. 뒤에 그 지역이 넓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註 107 다시 [大]領의 동쪽 7縣을 떼어 낙랑군에 속한 東部都尉를 두었다. [濊가 漢에] 복속된 후부터註 108 풍속이 점점 나빠짐에 따라, 법령도 점차 늘어나 60여條나 되었다.註 109 [後漢] 建武 6년(A.D.30; 高句麗 大武神王 13)에 [東部]都尉의 관직을 폐지하고, [大]領 동쪽의 지역을 포기한 뒤, 그 지방의 우두머리(渠帥)들을 봉해 縣侯로 삼으니, 歲時마다 모두 와서 朝賀하였다.

○ [濊에는] 大君長이 없고, 그들의 관직으로는 侯와 邑君과 三老가 있다. [濊의] 노인들은 자신들이 [고]구려와 같은 종족이라 말하는데, 언어와 법령과 풍속이 대체로 비슷하다.

그 사람들의 성품은 우직하고 건실하며 욕심이 적어 남에게 구걸하지 않는다. 남녀 모두 曲領을 입는다. 그 풍속은 山川을 중요시하여 산천마다 각 邑落의 경계가 있어서 함부로 서로 침범하지 않는다.註 110 同姓간에는 혼인하지 않는다. 꺼리고 금하는 것이 많아서 병을 앓거나 사람이 죽으면(DB주석 : 병을 앓다가 죽으면) 곧 옛 집을 버리고 다시 새 집을 지어 산다. 삼(麻)을 심고 누에를 기르며 길쌈을 할 줄 안다. 새벽에 별자리의 움직임을 관찰하여 그 해의 흉풍을 미리 안다.

해마다 10월이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주야로 술마시며 노래부르고 춤추니, 이를 ‘舞天’이라 한다. 또 호랑이를 神으로 여겨 제사지낸다. 부락을 함부로 침범하는 사람이 있으면, 벌로 生口와 소·말을 부과하는데 이를 ‘責禍’라고 한다. 사람을 죽인 사람은 죽음으로 그 죄를 갚게 한다. 도둑질하는 사람이 적다.

步戰에 능숙하며, 길이가 3丈이나 되는 창을 만들어 때로는 여러 사람이 함께 잡고서 사용하기도 한다. 樂浪의 檀弓이 그 지방에서 産出된다. 또한 무늬있는 표범이 있고 果下馬가 있으며, 바다에는 班魚가 나는데 使節이 올 적에 빠짐없이 獻上한다.

○ 韓(산동성 강소성)註 111

韓註 112은 세 종족이 있으니, 하나는 馬韓, 둘째는 辰韓, 셋째는 弁辰註 113이다.

馬韓(산동성서부 강소성)은 서쪽에 있는데, 54國註 114이 있으며, 그 북쪽은 樂浪註 115, 남쪽은 倭(오나라 월나라 대만)와 接하여 있다.註 116 진한(산동성)은 동쪽에 있는데, 12國이 있으며, 그 북쪽은 濊貊(창주시의 예맥조선)과 接하여 있다. 弁辰(강소성)은 辰韓의 남쪽에 있는데, 역시 12國이 있으며, 그 남쪽은 倭(​오나라 월나라 대만)와 接해 있다.

모두 78개 나라註 117 伯濟註 118(백제)는 그 중의 한 나라이다. 큰 나라는 萬餘戶, 작은 나라는 數千家인데, 각기 산과 바다 사이에 있어서 전체 국토의 넓이가 사방 4천여리나 된다. 동쪽과 서쪽은 바다를 경계(동쪽바다는 황해, 서쪽 바다는 소양호로 추정)로 하니 모두 옛 辰國註 119이다. 마한이 [韓族 중에서] 가장 강대하여 그 종족들이 함께 王을 세워 辰王으로 삼아 目支國註 120에 도읍하여 전체 三韓 지역의 王으로 군림하는데,註 121 [三韓의] 諸國王의 선대는 모두 마한 종족의 사람이다.

○ 마한 사람들은 농사와 양잠을 할 줄을 알며, 길쌈하여 베를 짠다. 큰 밤이 산출되는데 그 크기가 배만큼 크며, 꼬리가 긴 닭이 있는데 꼬리의 길이는 5尺이나 된다.

邑落에 雜居하며 역시 城郭이 없다. 땅을 파서 움집을 만드니 그 모양이 마치 무덤같으며, 출입하는 문은 윗 부분에 있다. 跪拜할 줄을 알지 못하며, 長幼의 차례와 男女의 분별 따위의 예가 없다.

金·보화·비단·모직물 등을 귀하게 여기지 않으며 牛·馬를 탈 줄을 모르고, 오직 구슬을 귀중히 여겨서 옷에 꿰메어 장식하기도 하고 목이나 귀에 달기도 한다. 그들은 대체로 머리를 틀어 묶고 상투를 드러내 놓으며, 베로 만든 도포를 입고 짚신을 신는다.

그 나라 사람들은 씩씩하고 勇敢하여 젊은이들 중 築室하는 데서 일하는 사람은 매번 밧줄로 등의 가죽을 꿰어 큰 나무를 매어 달고 소리를 지르는데 [이것을] 건장하다고 한다.註 122

해마다 5월에는 농사일을 마치고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낮이나 밤이나 술자리를 베풀고 떼지어 노래부르며 춤춘다. 춤출 때에는 수십명이 서로 줄을 서서 땅을 밟으며 장단을 맞춘다. 10월에 농사의 추수를 끝내고는 또 다시 이와 같이 한다.

여러 國邑에는 각각 한 사람이 天神의 제사를 주재하는데 [그 사람을] ‘天君’註 123이라 부른다. 또 蘇塗註 124를 만들어 거기다가 큰 나무를 세우고서 방울과 북을 매달아 놓고 귀신을 섬긴다.

[馬韓의] 남쪽 경계는 倭에 가까우므로 文身한 사람도 있다.

○ 辰韓은 그 노인들이 스스로 말하되, 秦나라에서 亡命한 사람註 125들로서 苦役을 피하여 韓國에 오자, 마한이 그들의 동쪽 지역을 분할하여 주었다 한다. 그들은 나라(國)를 邦이라 부르며, 弓은 弧라 하고, 賊은 寇라 하며, 行酒를 行觴이라 하고, 서로 부르는 것을 徒라 하여, 秦나라 말과 흡사하기 때문에 혹 秦韓註 126이라고도 부른다.

城栅과 家屋이 있다. 모든 작은 邑에는 각각 渠帥가 있으니, 강대한 자를 臣智註 127라 하고, 그 다음은 儉側, 그 다음은 樊秖, 그 다음은 殺奚, 그 다음은 邑借註 128가 있다. 토질이 비옥하여 5곡註 129이 잘 자라며 누에치기와 뽕나무 가꿀 줄을 알고 비단과 베를 짠다. 소나 말을 타고 다니며 혼인은 예의에 맞게 하며 길에 다니는 사람들은 길을 양보한다.

그 나라에는 鐵이 생산되는데註 130 濊·倭·馬韓註 131이 모두 와서 사 간다. 모든 무역에 있어서 鐵을 화폐로 사용한다.

그들의 풍속은 노래하고 춤추며 술마시고 비파뜯기를 좋아한다. 아이를 낳으면 머리가 납작하게 되도록 하려고 모두 돌로 눌러 놓는다.註 132

○ 弁辰 사람들은 辰韓 사람들과 뒤섞여 사는데, 성곽과 의복은 모두 [辰韓과] 같으나 언어와 풍속은 다른 점이 있다. 弁辰 사람들의 모습은 모두 신체가 장대하고 머리칼이 아름다우며, 의복은 깨끗하고 형법은 엄격하다. 변진은 倭國과의 거리가 가깝기 때문에 文身註 133한 사람이 상당히 있다.

과거에 朝鮮王 準이 衛滿에게 패하여, 자신의 남은 무리 수천명을 거느리고 바다로 도망, 마한을 공격하여 쳐부수고 스스로 韓王이 되었다. 準의 後孫이 絶滅되자, 마한 사람이 다시 自立하여 辰王이 되었다.

○ 建武 20년(A.D.44; 百濟 多婁王 17) 에 韓의 廉斯註 134 사람인 蘇馬諟 등이 樂浪에 와서 공물을 바쳤다. [後漢]의 光武帝는 蘇馬諟를 封하여 漢의 廉斯邑君으로 삼아 樂浪郡에 소속시키고 철마다 朝謁하도록 하였다. 靈帝 말년에 韓과 濊가 모두 강성해져 [漢나라의] 郡縣이 제대로 제압하지 못하자, 난리에 고통스러운 백성들이 韓으로 도망하여 流入하는 경우가 많았다.

○ 마한의 서쪽 바다의 섬 위에 州胡國註 135이 있다. 그 나라 사람은 키가 작고 머리를 깎으며, 가죽 옷을 입는데 上衣만 입고 下衣는 입지 않는다. 소나 돼지 기르기를 좋아하며, 배를 타고 왕래하면서 韓의 國中에서 물건을 사고 판다.

○ 夫餘國​註 031

夫餘國註 032은 玄菟의 북쪽 千里 쯤에 있다.註 033 남쪽은 高句驪와, 동쪽은 挹婁와, 서쪽은 鮮卑와 접해 있고, 북쪽에는 弱水註 034가 있다. 국토의 면적은 사방 二千里이며, 본래 濊[族]의 땅이다.註 035

○ 처음에 北夷의 索離國註 036王이 출타중에 그의 侍女가 後[宮]에서 임신을 하게 되었다. 王이 돌아와서 그녀를 죽이려 하자 侍女가 말하기를,

“지난번 하늘에 크기가 달걀만한 氣가 있어 저에게로 떨어져 내려오는 것을 보았는데, 그대로 임신이 되었습니다.”
하였다. 王이 그녀를 [옥에] 가두었는데, 그 뒤에 마침내 아들을 낳았다.

王이 그 아이를 돼지우리에 버리게 하였으나, 돼지가 입김을 불어주어 죽지 않았다. 다시 마굿간에 옮겼으나 말도 역시 그와 같이 해주었다. 王이 그 아이를 神異하게 생각하여 그 어머니가 거두어 기르도록 허락하고, 이름을 東明이라 하였다.

東明이 장성하여 활을 잘 쏘니 王이 그의 용맹함을 꺼리어 다시 죽이려고 하였다. [이에] 東明이 남쪽으로 도망하여 掩㴲水註 037에 이르러, 활로 물을 치니 고기와 자라들이 모두 모여 물 위에 떠올랐다. 東明은 그걸 밟고 물을 건너서 夫餘에 도착하여 王이 되었다.註 038

[夫餘는] 東夷 지역 중에서 가장 평탄하고 넓은 곳으로 토질은 五穀이 자라기에 알맞다. 名馬와 赤玉과 담비(貂)·삵괭이(豽)註 039가 생산되며, 큰 구슬의 크기는 마치 대추(酸棗)와 같다.

木栅을 둥글게 쌓아 城을 만들고註 040 宮室과 倉庫와 감옥이 있다.

그 나라 사람들은 체격이 크고 [성품은] 굳세고 용감하며 근엄·후덕하여 [다른 나라를] 쳐들어 가거나 노략질하지 않는다. 활·화살·칼·창으로 兵器를 삼았으며 六畜의 이름으로 官名을 지어 馬加·牛加·狗加註 041 등이 있으며, 그 나라의 邑落은 모두 諸加에 소속되었다.註 042

음식을 먹고 마시는 데는 俎豆를 사용하며, 會合시에는 拜爵·洗爵의 禮가 있고 出入시에는 揖讓의 禮가 있다. 臘月註 043에 지내는 祭天行事에는 연일 크게 모여서 마시고 먹으며 노래하고 춤추는데, 그 이름을 ‘迎鼓’라 한다. 이 때에는 刑獄을 중단하고 죄수를 풀어 준다. 전쟁을 하게 되면 그 때에도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소를 잡아서 그 발굽을 가지고 吉·凶을 점친다. 밤낮없이 길에 사람이 다니며, 노래하기를 좋아하여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 그 풍속은 형벌이 엄하고 각박하여 사형을 당한 사람은 그 집사람을 모두 적몰하여 奴婢로 삼는다. 도둑질을 하면 [도둑질한 물건의] 12배로 변상해야 되고, 남녀가 음란한 짓을 하면 모두 죽이는데, 투기하는 여자를 더욱 미워하여 죽인 뒤 다시 산 위에다 시체를 버려둔다. 형이 죽으면 그 형수를 아내로 삼고, 죽어 [장사지낼 적에는] 椁은 사용하지만 棺은 쓰지 않는다.註 044 사람을 죽여 殉葬을 하는데, 많을 때는 백명 가량이나 된다. 그 나라 王의 장사에는 玉匣을 사용하므로, 漢나라 조정에서는 언제나 玉匣을 미리 玄菟郡에 갖다 두어, 王이 죽으면 그 玉匣을 취하여 장사지내게 하였다.

○ 建武 연간(A.D.25~55; 高句麗 大武神王 8~太祖王 3) 에 東夷의 여러 나라들이 모두 와서 朝獻 하고 入見하였다. 25년(A.D.49; 高句麗 慕本王 2)에 夫餘王이 사신을 보내어 貢物을 바치므로,註 045 光武帝가 후하게 報答하니 이에 사절이 해마다 왕래하였다.

安帝 永初 5년(A.D.111; 高句麗 太祖王 59)에, 夫餘王이 처음으로 步兵과 騎兵 7~8千명을 거느리고 樂浪을 노략질하여註 046 관리와 백성을 죽였으나, 그 뒤에 다시 歸附하였다.

永寧 元年(A.D.120; 高句麗 太祖王 68)에, 嗣子 尉仇台註 047를 보내어 궁궐에 나아와서 朝貢을 바치므로 天子가 尉仇台에게 印綬와 金綵를 下賜하였다.

順帝 永和 元年(A.D.136; 高句麗 太祖王 84)에, 그 王이 京師에 와서 조회하므로,註 048 帝는 黃門鼓吹와 角抵戲를 하게 하여 [관람시켜] 보내었다.

○ 桓帝 延熹 4년(A.D.161; 高句麗 次大王 16) 에, 사신을 보내어 朝賀하고 貢物을 바쳤다.註 049

永康 元年(A.D.167; 高句麗 新大王 3)에, 王 夫台가 2만여명을 거느리고 玄菟를 노략질하므로, 현도태수 公孫域이 쳐서 깨뜨리고 천여명의 머리를 베었다.註 0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