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韓은 산동성과 강소성이었다(삼국지 위서동이전 내용)
  • 작성일2021.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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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사 삼국지는 진(晉)나라의 학자 진수(陳壽:233∼297)가 편찬했다

■ 예맥국(예맥조선)은 하북성 창주시다
--> 고조선 영토(유방의 한漢나라와 ◐경계선◑은 호지하虖池河:現. 滹沱河):네이버 포스트 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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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韓은 예맥국(穢貊國) 남쪽인 산동성과 강소성일 수 있다

※주) 예濊는 예맥국,예맥조선으로 하북성 천진시 아래 창주시滄州市이니, 예濊 나 한韓을 한반도, 고구려를 만주라는 선입관을 버리고, 동쪽 바다를 동해가 아니라 중국동쪽 바다인 황해로 보고..

---> 1) 고구려를 하북성 북부로, 2) 예濊를 중국 동부인 하북성 창주시로, 3)한韓을 중국 동부나 산동성,강소성으로 상상하고 읽어보시면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됩니다(바다는 덕주시 발해호수, 대해는 황해)


○ 三國志註 001 魏書 烏丸鮮卑東夷傳註 002
​※주) 한자 원문 정사 삼국지에는 위서 '동이전'은 없고 위서 '오환 선비 동이전'이다

○ [역사 편찬자인 陳壽는] 평한다.

『史記』·『漢書』에서는 朝鮮과 兩越註 183을 기록하였고, 東京(後漢)시대에는 西羌에 대해 撰錄하였다. 魏나라 때부터 匈奴가 쇠약해지자, 다시 烏丸과 鮮卑가 나타났다. 이어 東夷에 이르러서는 사신이 늘 왕래하여 사건에 따라 [역사를] 기술하였으니 어찌 凡常한 일이라 하겠는가!

​『書經』에 ‘동쪽은 바다(황해)에 닿았고 서쪽은 사막에까지 이르렀다’註 003 하였으니, 九服의 制度註 004 이내에 있는 것은 말할 수가 있으나,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荒域 밖은 여러 번의 통역을 거쳐야 이르게 되어, [漢人의] 발걸음이나 수레가 닿지 않기 때문에, 그 나라의 풍속이 중국과 다른 것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虞나라로부터 周대에 이르기까지 西戎은 白環을 바쳤고註 005 東夷에서는 肅愼의 조공이 있었으나,註 006 모두 여러 해가 지나서야 도달하였으니 그 머나먼 거리가 이와 같다.

​○ 漢나라 때에 張騫을 西域에 사절로 파견하여註 007 黃河의 근원을 찾아내고, 여러 나라를 두루 방문하여 드디어 都護를 설치하고註 008 그들을 통치하게 되었다. 그렇게 한 뒤에는 서역의 사정을 모두 알 수 있게 되어 그 결과 史官도 [西域의 일을] 상세히 기재할 수 있게 되었다.註 009

魏나라가 일어서는 서역의 모든 나라가 다 오지는 않았으나, 그 중의 大國인 龜玆註 010·于寘註 011·康居註 012·烏孫註 013·疎勒註 014·月氏註 015·鄯善註 016·車師註 017 등의 무리가 조공을 바치지 않는 해가 없었으니, 대략 漢나라 때의 古事와 같았다.

​○ 公孫淵의 父祖 三代註 018가 계속 遼東(하북성 중부 형수시)을 차지하자, 천자는 그 지방을 絶域으로 여겨 [公孫氏에게] 海外(창주시 산동성 강소성)의 일로 위임시켰다. 그 결과 결국 東夷와의 관계가 단절되어 중국과 통하지 못하게 되었다. 景初 연간(A.D.237~239; 高句麗 東川王 11~13)에 크게 군대를 일으켜 [공손]연을 죽이고,註 019 또 몰래 바다(하북성 중부 덕주시에 있었던 발해호수)를 건너가서 樂浪郡과 帶方郡을 수습하였다.註 020 그 후로 해외가 안정되어 東夷들이 굴복하였다.

그 뒤 高句麗가 배반하므로 또 다시 약간의 군대를 파견하여 토벌하면서註 021 지극히 먼 지방까지 추격하니, 烏丸註 022과 骨都註 023를 넘고 沃沮를 거쳐 肅愼의 王庭을 짓밟고 동쪽으로 大海(황해)에까지 이르렀다. [그곳의] 長老가 ‘얼굴이 이상한 사람이 해가 돋는 근처에 살고 있다’고 이야기 하였다.

​○ 드디어 여러 나라를 두루 관찰하고 그들 나라의 법령과 습속을 수집하여 나라의 크고 작음의 구별과 각국의 명칭을 상세하게 기록할 수가 있었다.

[그 나라들은] 비록 오랑캐의 나라이기는 하지만 俎豆註 024를 쓰는 예절이 남아 있으니, ‘중국이 禮를 잃으면 四夷에게서 구한다’註 025는 것을 더욱 믿을 수 있다. 그러므로 그 나라들을 순서대로 찬술하고 그 같고 다른 점을 열거하여 前史의 미비한 점을 보완하다.

​○ 濊註 133(하북성 중부 창주시)

濊註 134는 남쪽(산동성)으로는 辰韓과, 북쪽으로는 高句麗·沃沮와 접하였고, 동쪽으로는 大海(황해)에 닿았으니, 오늘날 朝鮮의 동쪽이 모두 그 지역이다. 戶數는 2만이다.

일찍이 箕子가 朝鮮에 가서 八條의 敎를 만들어 그들을 가르치니, 문을 닫아 걸지 않아도 백성들은 도둑질을 하지 않았다.

그 뒤 40여世를 지나 朝鮮侯 準이 참람되게 王이라 일컬었다.註 135 [秦나라 말년에] 陳勝註 136 등이 起兵하여 온 천하가 진나라에 반기를 드니, 燕·齊·趙지역의 백성 수만인이 조선으로 피난하였다. 연나라 사람 衛滿이 북상투를 하고(魋結), 오랑캐의 복장으로 [조선에] 와 그 王이 되었다.

漢 武帝는 조선(하북성 형수시 무강현의 위만조선)을 정벌하여 멸망시키고, 그 지역을 분할하여 四郡을 설치하였다. 이 뒤로부터 胡族과 漢族 사이에 점차 구별이 생겼다.註 137

​○ [濊에는] 大君長이 없고註 138 漢代 이래로 侯·邑君·三老註 139의 관직이 있어서 下戶를 통치하였다. 그 나라의 노인들은 예부터 스스로 일컫기를 ‘[高]句麗와 같은 종족이다’라고 하였다.

그들의 성질은 조심스럽고 진실하며 욕심이 적고 廉耻가 있어, 남에게 구걸하거나 도움을 청하지 않는다. 언어와 예절 및 풍속은 대체로 [고]구려와 같지만 의복은 다르다. 남녀가 모두 曲領註 140을 입는데, 남자는 넓이가 여러 치 되는 銀花를 옷에 꿰매어 장식한다.

​○ 單單大山領의 서쪽은 樂浪에 소속되었으며, 領의 동쪽 일곱 縣은 [東部]都尉가 통치하는데 그 백성은 모두 濊人이다. 그 뒤 都尉를 폐지하고 그들의 우두머리(渠帥)를 封하여 侯로 삼았다. 오늘날의 不耐濊는 모두 그 종족이다. 漢末에는 다시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그 나라의 풍속은 山川(하천)을 중요시하여 산과 내마다 각기 구분이 있어註 141 함부로 들어가지 않는다. 同姓끼리는 결혼하지 않는다.註 142 꺼리는 것이 많아서 병을 앓거나 사람이 죽으면 옛 집을 버리고 곧 다시 새 집을 지어 산다. 삼베가 산출되며 누에를 쳐서 옷감을 만든다.註 143 새벽에 별자리의 움직임을 관찰하여 그 해의 풍흉을 미리 안다.註 144 珠玉은 보물로 여기지 않는다.

​○ 해마다 10월이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주야로 술마시며 노래부르고 춤추니 이를 ‘舞天’이라 한다. 또 호랑이를 神으로 여겨 제사지낸다.註 145 부락을 함부로 침범하면 벌로 生口와 소·말을 부과하는데, 이를 ‘責禍’라 한다. 사람을 죽인 사람은 죽음으로 그 죄를 갚게 한다. 도둑질하는 사람이 적다.

길이가 3丈이나 되는 창(矛)을 만들어 때로는 여러 사람이 함께 잡고서 사용하기도 하며, 步戰에 능숙하다. 樂浪의 檀弓註 146이 그 지역에서 산출된다. 바다에서는 班魚의 껍질註 147이 산출되며(DB주석 : 班魚皮가 나고), 땅은 기름지고 무늬있는 표범이 많다(DB주석 : 땅에서는 文豹가 아주 많다). 또 果下馬註 148가 나는데 [후]한의 桓帝 때 獻上 하였다.

​○ 正始 6년(A.D.245; 高句麗 東川王 19) 에 樂浪太守 劉茂와 帶方太守 弓遵은 [單單大]領 동쪽의 濊가 [고]구려에 복속하자, 군대를 일으켜 정벌하였는데, 不耐侯 등이 고을을 들어 항복하였다.

[正始] 8년(A.D.247; 高句麗 東川王 21)에는 [魏나라의] 조정에 와 조공하므로, 不耐濊王으로 봉하였다. [不耐濊王은] 백성들 사이에 섞여 살면서註 149 계절마다 郡에 와서 朝謁하였다. 二郡에 戰役이 있어 租稅를 거둘 일이 있으면, [濊의 백성에게도] 供給케 하고 使役을 시켜 마치 [郡의] 백성처럼 취급하였다.

​○ 韓註 150

韓註 151은 帶方註 152의 남쪽(산동성, 강소성)에 있는데,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한계(​동쪽바다는 황해, 서쪽 바다는 소양호)를 삼고, 남쪽은 倭(오나라 월나라 대만)와 접경하니, 면적이 사방 4천리 쯤 된다. [韓에는] 세 종족이 있으니, 하나는 馬韓,註 153 둘째는 辰韓,註 154 세째는 弁韓인데, 辰韓은 옛 辰國이다.註 155

​○ 馬韓은 [三韓 中에서] 서쪽에 위치하였다. 그 백성은 土著生活을 하고 곡식을 심으며 누에치기와 뽕나무 가꿀 줄을 알고 綿布를 만들었다. [나라마다] 각각 長帥가 있어서, 세력이 강대한 사람은 스스로 臣智라 하고, 그 다음은 邑借라 하였다.

[그 나라 사람들은] 산과 바다 사이에 흩어져 살았으며 城郭이 없었다.註 156

[馬韓의 諸國으로는] 爰襄國·牟水國·桑外國·小石索國·大石索國·優休牟涿國·臣濆沽國·伯濟國·速盧不斯國·日華國·古誕者國·古離國·怒藍國·月支國註 157·咨離牟盧國·素謂乾國·古爰國·莫盧國·卑離國·占離卑國·臣釁國·支侵國·狗盧國·卑彌國·監奚卑離國·古蒲國·致利鞠國·冉路國·兒林國·駟盧國·內卑離國·感奚國·萬盧國·辟卑離國·臼斯烏旦國·一離國·不彌國·支半國·狗素國·捷盧國·牟盧卑離國·臣蘇塗國·莫盧國·占臘國·臨素半國·臣雲新國·如來卑離國·楚山塗卑離國·一難國·狗奚國·不雲國·不斯濆邪國·爰池國·乾馬國·楚離國 등 모두 5십여國이 있다. 큰 나라는 萬餘家이고, 작은 나라는 數千家로서 總 10餘萬戶이다.

辰王註 158은 月支國을 통치한다. 臣智에게는 간혹 우대하는 호칭인 臣雲遣支報 安邪踧支 濆臣離兒不例 狗邪秦支廉註 159의 稱號를 더하기도 한다. 그들의 관직에는 魏率善·邑君·歸義侯·中郞將·都尉·伯長이 있다.

​○ [朝鮮]侯 準(​창주시의 예맥조선) 이 참람되이 王이라 일컫다가 燕나라에서 亡命한 衛滿의 공격을 받아 나라를 빼앗겼다.

魏略: 옛 箕子의 후예인 朝鮮侯는 周나라가 쇠약해지자, 燕나라가 스스로 높여 王이라 칭하고 東쪽으로 침략하려는 것을 보고, 朝鮮侯도 역시 스스로 王號를 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燕나라를 逆擊하여 周 王室을 받들려 하였는데, 그의 大夫 禮가 諫하므로 중지하였다. 그리하여 禮를 서쪽에 파견하여 燕나라를 설득하게 하니, 燕나라도 전쟁을 멈추고 [朝鮮을] 침공하지 않았다.

그 뒤에 子孫이 점점 교만하고 포악해지자, 燕은 장군 秦開註 160를 파견하여 [조선의] 서쪽 지방을 침공하고 2천여리의 땅을 빼앗아 滿番汗註 161에 이르는 지역을 경계로 삼았다. 마침내 조선(창주시의 예맥조선)의 세력은 弱化되었다.

秦나라가 天下를 통일한 뒤, 蒙恬을 시켜서 長城을 쌓게 하여 遼東에까지 이르렀다.

이때에 朝鮮王 否가 王이 되었는데, 秦나라의 습격을 두려워한 나머지 政略상 秦나라에 服屬은 하였으나 朝會에는 나가지 않았다. 否가 죽고 그 아들 準이 즉위하였다.

그 뒤 20여년이 지나 [중국에서] 陳[勝]과 項[羽]가 起兵하여 天下가 어지러워지자, 燕·齊·趙의 백성들이 괴로움을 견디다 못해 차츰 차츰 準에게 亡命하므로, 準은 이들을 서부 지역에 거주하게 하였다.

漢나라 때에 이르러 盧綰으로 燕王을 삼으니, 朝鮮과 燕은 浿水註 162를 경계로 하게 되었다. [盧]綰이 [漢을] 배반하고 匈奴로 도망간 뒤, 燕나라 사람 衛滿도 亡命하여 오랑캐의 복장을 하고 東쪽으로 浿水를 건너 準에게 항복하였다. [衛滿]이 서쪽 변방에 거주하도록 해 주면 中國의 亡命者를 거두어 朝鮮의 藩屏이 되겠다고 準을 설득하였다. 準은 그를 믿고 사랑하여 博士에 임명하고 圭를 下賜하며, 百里의 땅을 封해 주어 서쪽 변경을 지키게 하였다.

[위]만이 [중국의] 망명자들을 유인하여 그 무리가 점점 많아지자, 사람을 準에게 파견하여 속여서 말하기를, “漢나라의 군대가 열 군데로 쳐들어오니, [王宮]에 들어가 宿衛하기를 청합니다.”

하고는 드디어 되돌아서서 準을 공격하였다. 準은 滿과 싸웠으나 상대가 되지 못하였다.

​○ [準王]은 그의 近臣과 宮人들을 거느리고 도망하여 바다를 경유하여 韓의 지역註 163(산동성)에 거주하면서 스스로 韓王이라 칭하였다.

魏略: 準의 아들과 친척으로서 [조선]나라에 남아있던 사람들도 그대로 韓氏라는 姓을 사칭하였다. 準은 海外[의 나라]에서 王이 되었으나 조선(위만조선)과는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그 뒤 準의 후손은 絕滅되었으나, 지금 韓人 중에는 아직 그의 제사를 받드는 사람이 있다.

​○ [韓은] 漢나라 때에는 樂浪郡에 소속되어 철마다 朝謁하였다.

魏略: 일찍이 右渠가 격파되기 전에, 朝鮮相 歷谿卿이 右渠에게 諫하였으나 [그의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동쪽의 辰國註 164으로 갔다. 그 때 백성으로서 그를 따라가 그 곳에 산 사람이 2천여戶註 165나 되었는데, 그들도 역시 朝鮮에 조공하는 藩國과는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王莽의 地皇 연간에, 廉斯鑡이 辰韓의 右渠帥가 되어 樂浪註 166의 土地가 비옥하여 사람들의 생활이 풍요하고 안락하다는 소식을 듣고 도망가서 항복하기로 작정하였다. 살던 부락을 나오다가 밭에서 참새를 쫓는 남자 한 명을 만났는데, 그 사람의 말은 韓人의 말이 아니었다. [그 이유를] 물으니 남자가 말하기를,

“우리들은 漢나라 사람으로 이름은 戶來이다. 우리들 천 5백명은 材木을 벌채하다가 韓의 습격을 받아 포로가 되어 모두 머리를 깎이우고 노예가 된 지 3년이나 되었다.”
고 하였다. 鑡이
“나는 漢나라의 樂浪에 항복하려고 하는데 너도 가지 않겠는가?”

하니, 戶來는,
“좋다.”
하였다. 그리하여 鑡은 戶來를 데리고 출발하여 含資縣으로 갔다. 含資縣에서 [樂浪]郡에 연락을 하자, [樂浪]郡은 鑡을 통역으로 삼아 芩中으로부터 큰 배를 타고 辰韓에 들어가서 戶來 등을 맞이하여 데려갔다. 함께 항복한 무리 천여명을 얻었는데, 다른 5백명은 벌써 죽은 뒤였다. 鑡이 이때 辰韓에게 따지기를,

“너희는 5백명을 돌려보내라, 만약 그렇지 않으면 樂浪이 만명의 군사를 파견하여 배를 타고 와서 너희를 공격할 것이다.”
라고 하니, 辰韓은
“5백명은 이미 죽었으니, 우리가 마땅히 그에 대한 보상을 치르겠습니다.” 하고는, 진한 사람 만 5천명과 弁韓布 만 5천필을 내어놓았다. 鑡은 그것을 거두어 가지고 곧바로 돌아갔다. [樂浪]郡에서는 鑡의 功과 義를 표창하고, 冠幘과 田宅를 주었다. 그의 자손은 여러 代를 지나 安帝 延光 4년(A.D.125; 百濟 己婁王 49)에 이르러서는 그로(선조의 공으로) 인하여 賦役을 면제받았다.

​○ [後漢의] 桓帝·靈帝 末期에는 韓과 濊註 167가 강성하여 [漢의] 郡·縣이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니, [郡縣의] 많은 백성들이 韓國으로 유입되었다.註 168

建安 연간(A.D.196~220; 百濟 肖古王 31~仇首王 7)에 公孫康이 屯有縣 이남의 황무지를 분할하여 帶方郡으로 만들고, 公孫模·張敞 등을 파견하여 漢의 遺民을 모아 군대를 일으켜서 韓과 濊를 정벌하자, [韓·濊에 있던] 옛 백성들이 차츰 돌아오고, 이 뒤에 倭와 韓은 드디어 帶方에 복속되었다.

​○ 景初 연간(A.D.237~239; 百濟 古爾王 4~6) 에 明帝가 몰래 帶方太守 劉昕과 樂浪太守 鮮于嗣를 파견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帶方·樂浪의] 두 郡을 평정하였다. 그리고 여러 韓國의 臣智에게는 邑君의 印綬를 더해 주고, 그 다음 사람에게는 邑長[의 벼슬]을 주었다.

[韓族의] 풍속은 衣幘을 입기를 좋아하여, 下戶註 169들도 [樂浪이나 帶方]郡에 가서 朝謁할 적에는 모두 衣幘를 빌려 입으며, [대방군에서 준] 자신의 印綬를 차고 衣幘을 착용하는 사람이 천여명이나 된다.

部從事 吳林은 樂浪이 본래 韓國을 통치했다는 이유로 辰韓 八國을 분할하여 樂浪에 넣으려 하였다. 그 때 통역하는 관리가 말을 옮기면서 틀리게 설명하는 부분이 있어, 臣智註 170과 韓人들이 모두 격분하여 帶方郡의 崎離營을 공격하였다. 이 때 [帶方]太守 弓遵과 樂浪太守 劉茂가 군사를 일으켜 이들을 정벌하였는데, 遵은 전사하였으나 二郡은 마침내 韓을 滅하였다.

​○ 그 풍속은 기강이 흐려서, 諸國의 도읍에 비록 主帥가 있어도 邑落에 뒤섞여 살기 때문에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였다. 跪拜하는 禮 또한 없다. 거처는 草家에 土室을 만들어 사는데, 그 모양은 마치 무덤과 같았으며, 그 문은 윗부분에 있다. 온 집안 식구가 그 속에 함께 살며, 長幼와 男女의 분별이 없다.

그들의 장례에는 棺은 있으나 槨은 사용하지 않는다.註 171 소나 말을 탈 줄 모르기 때문에 소나 말은 모두 장례용으로 써버린다. 구슬을 귀하게 여겨 옷에 꿰매어 장식하기도 하고, 목이나 귀에 달기도 하지만, 금·은과 錦·繡는 보배로 여기지 않는다.

그 사람들의 성질은 굳세고 용감하다. 머리칼을 틀어 묶고 상투를 드러내는데 마치 날카로운 兵器와 같다. 베로 만든 도포를 입고 발에는 가죽신을 신고 다닌다.

그 나라 안에 무슨 일이 있거나 官家에서 城郭을 쌓게 되면, 용감하고 건장한 젊은이는 모두 등의 가죽을 뚫고, 큰 밧줄로 그곳에 한 발[丈]쯤 되는 나무막대를 매달고 온 종일 소리를 지르며 일을 하는데, [이를] 아프게 여기지 않는다. 그렇게 작업하기를 권하며, 또 이를 강건한 것으로 여긴다.註 172

​○ 해마다 5월이면 씨뿌리기를 마치고 귀신에게 제사를 지낸다. 떼를 지어 모여서 노래와 춤을 즐기며 술 마시고 노는데 밤낮을 가리지 않는다. 그들의 춤은 수십명이 모두 일어나서 뒤를 따라가며 땅을 밟고 구부렸다 치켜들었다 하면서 손과 발로 서로 장단을 맞추는데, 그 가락과 율동은 [中國의] 鐸舞와 흡사하다. 10월에 농사일을 마치고 나서도 이렇게 한다.

귀신을 믿기 때문에 國邑에 각각 한 사람씩을 세워서 天神의 제사를 주관하게 하는데, 이를 ‘天君’註 173이라 부른다.

또 여러 나라에는 각각 別邑이 있으니 그것을 ‘蘇塗’註 174라 한다. [그곳에]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매달아 놓고 귀신을 섬긴다. [다른 지역에서] 그 지역으로 도망온 사람은 누구든 돌려보내지 아니하므로 도적질하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들이 蘇塗를 세운 뜻은 浮屠와 같으나, 행하는 바의 좋고 나쁜 점은 다르다.

​○ 그 나라 北方의 [中國]郡에 가까운 諸國은 그런대로 약간의 禮俗이 있지만, 멀리 떨어져 있는 지역은 흡사 죄수와 奴婢가 모여 사는 곳과 같다. 별다른 珍寶가 나지 않고, 동물과 草木은 대략 中國과 동일하다. 큰 밤이 생산되는데 그 크기가 배만큼 크다. 또 細尾雞가 나는데 그 꼬리의 길이는 모두 5자(尺) 남짓 된다. 그 고장 남자들은 간혹 文身을 한 사람도 있다.

또 州胡註 175가 馬韓의 서쪽 바다 가운데의 큰 섬에 있다. 그 사람들은 대체로 키가 작고 말도 韓[族]과 같지 않다. [그들은] 모두 鮮卑族처럼 머리를 삭발하였으며, 옷은 오직 가죽으로 해 입고 소나 돼지 기르기를 좋아한다. 그들의 옷은 上衣만 입고 下衣는 없기 때문에 거의 나체와 같다. 배를 타고 왕래하며 韓나라에서 물건을 사고판다.

​○ 辰韓은 馬韓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辰韓의] 노인들은 代代로 傳하여 말하기를,

“[우리들은] 옛날의 망명인으로 秦나라의 苦役를 피하여 韓國으로 왔는데, 馬韓이 그들의 동쪽 땅을 분할하여 우리에게 주었다.”
고 하였다.
그곳에는 城柵이 있다.註 176
그들의 말은 馬韓과 달라서 나라(國)를 邦이라 하고, 활(弓)을 弧라 하고 도적(賊)을 寇라 하고, 술잔을 돌리는 것(行酒)을 行觴이라 한다. 서로 부르는 것을 모두 徒라 하여 秦나라 사람들과 흡사하니, 단지 燕나라·齊나라의 명칭만은 아니었다.

樂浪 사람을 阿殘이라 하였는데, 東方 사람들은 나(我)라는 말을 阿라 하였으니, 樂浪人들은 본디 그 중에 남아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지금도 [辰韓을] 秦韓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다. [辰韓은] 처음에는 6國이던 것이 차츰 12國으로 나뉘어졌다.

​○ 弁辰도 12國으로 되어 있다. 또 여러 작은 別邑이 있어서 제각기 渠帥가 있다. [그 중에서] 세력이 큰 사람은 臣智라 하고, 그 다음에는 險側이 있고, 다음에는 樊濊가 있고, 다음에는 殺奚가 있고, 다음에는 邑借가 있다.

已柢國·不斯國·弁辰彌離彌凍國·弁辰接塗國·勤耆國·難彌離彌凍國·弁辰古資彌凍國·弁辰古淳是國·冉奚國·弁辰半路國·弁[辰]樂奴國·軍彌國(弁軍彌國)·弁辰彌烏邪馬國·如湛國·弁辰甘路國·戶路國·州鮮國(馬延國)·弁辰狗邪國·弁辰走漕馬國·弁辰安邪國(馬延國)·弁辰瀆盧國·斯盧國·優由國이 있어서, 弁韓과 辰韓의 합계가 24國이나 된다. 大國은 4~5천家이고, 小國은 6~7백家로, 총 4~5萬戶이다.

그 중에서 12國은 辰王에게 臣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