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태(주몽) 아들의 나라 비류백제 이동설(하북성--> 영산강 지역--> 일본열도)
  • 작성일2023.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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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한서와 삼국지의 부여가 비류백제이고, 주서와 북사의 백제시조 구태가 부여의 (위)구태다

1) 삼국사기 백제본기 이설인 비류와 온조의 아버지 【우태를 주몽의 다른 이름인 아명으로 본다】

주몽은 우발수에서 잉태하여(우태) 태어났으며 (동)부여왕 해부루의 서손이니
우태의 설명과 주몽의 설명이 같기(비슷하기) 때문에 우태가 곧 주몽이다

2) 주서와 북사의 백제 시조 구태가 후한서와 삼국지 부여의 (위)구태다
따라서 후한서와 삼국지 부여가 비류백제다
(위) 구태와 구태가 동명의 후손이고, 공손도가 딸을 (위)구태와 구태에게 시집보냈다고 했으니
(위)구태와 구태는 동일인이니 부여가 곹 비류백제다

3) 후한서와 진서 동이열전에서 부여인 비류백제 나라 가운데에 옛 예성이 있는데 예맥의 성이라 했으니
비류백제의 위치는 하북성 창주시다

4) 진서의 의려왕은 우씨고 백제 고이왕도 우씨로 같고, 사망년도가 AD AD 286년으로 같기에
진서의 부여 의려왕이 백제 고이왕이다

5) 진서의 의려왕 아들인 의라왕은 비류왕 시기에 반란을 일으킨 내신좌평 우복(우태의 우씨)으로 추정된다


■ 비류백제의 이동(하북성 --> 영산강 지역 --> 일본열도)

1) 진서 동이열전 기록을 마지막으로 비류백제인 부여가 중국 정사에서 사라진다
-. 비류백제인 부여가 멸망했다는 내용은 삼국사기나 중국 정사에 나오지 않는다
-. 의라왕이 죽었다는 내용도 없고 일본에는 의라왕을 기리는 의라신사가 있다

2) 비류백제의 고고학적 물질문화
4세기 중반부터 영산강 유역에 분구묘의 대형화, 대형 옹관 등장, 백제와 다른 금동관과 금동신발 출토등
비류백제 이동과 정착을 추론할 수 있는 고고학적 물질문화 변화가 영산강 지역에 나타난다

3) 무령왕 시대인 AD 501년에
비류백제 우태의 우씨인 달솔 우영(優永)이 뜬금없이 삼국사기에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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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내용을 종합하고 삼국사기와 중국 정사 내용을 연결해서 정리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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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로왕은 부여의 여씨
2) 문주왕과 동성왕은 모용의 모씨(삼근왕도 모씨로 추정)
3) 무령왕 이후부터는 부여인 비류백제 우태의 우씨로 추정

그래서 부여인 비류백제의 후손인 성왕이 백제 국호를 남부여로 바꾼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주서부터는 백제 시조가 우태로 등장하니, 무령왕 부터 북주시대에도 비류백제의 우씨가 백제왕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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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정리해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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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류왕의 공격으로 하북성 창주시에 있던 의라왕(우복)이
신천지인 영산강 유역으로 이동하여 정착하고 일본열도까지 진출하게 된다

1)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부여씨인 개로왕이 사망하자
2) 개로왕을 보좌하던 모용씨의 문주가 백제왕이 되었는데..
3) 모용씨의 동성왕을 암살하고 일본열도를 다스리던 우태씨의 무령왕이 백제왕으로 등극하여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비류백제의 후손인 우태씨의 우씨가 백제를 다스리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