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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정부와 비정부기구를 잇는 새 모델
  • 동북아역사재단 자문위원 백영서(연세대 교수)

왜 국제회의가 우리에게 필요할까. 준비하는 주최 측이 상당한 비용과 노력을 들여야 하는 국제회의가 일회성 전시용 이벤트에 그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나 참가자를 적절히 선정하고 잘만 운영한다면 문제를 새롭게 사고하도록 지적 자극을 주는 귀한 자리가 될 수 있다. 국내외에서 열리는 국제회의에 비교적 자주 참여하는 나는 그 기회를 서로 다른 맥락에서 공동주제를 논의하는 여러 참석자들과의 접촉을 통해 자신의 안목을 넓고 깊게 단련하는 공부의 장으로 적극 활용하는 편이다.
올 10월 9,10일 서울에서 "역사대화로 열어가는 동아시아 역사화해"를 공동주제로 열린 동아시아 역사화해 국제포럼(유네스코 한국위원회/동북아역사재단 공동주최)에 참석해, 나는 역사화해의 의미와 실천방안에 대해 돌아보는 유익한 시간을 보냈다.
먼저, 너무 잘 아는 듯 넘어가기 쉬운 화해의 의미를 새삼 음미할 수 있었다. 펠드만(Lily G. Feldman)은 기조강연을 통해, 화해를 "정부와 사회를 넘나드는 이원적인 제도를 통해 과거 적대세력 간에 장기적으로 평화를 구축하는 과정"으로 정의하였다. 서로의 차이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융합하는 것이고, 완벽한 평화보다는 한층 더 현실적인 목표인 '생산적 토론'을 추구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역사 이해의 차이를 갈등을 야기하는 요인으로 부정적으로만 간주하지 않고 '생산적 자극물(irritant)'로 적극 활용하면서, 낮은 수준의 '공존'을 거쳐 높은 수준의 '협력증대'로 향상해가는 긴 여정이 우리가 추구하는 과정으로서의 역사화해인 셈이다.

역사화해란 무엇인가

화해란 누가, 어떤 전제조건 아래에서 하는가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볼 수 있었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구분이 명확할 경우, 피해자가 화해를 주도하고 최종적인 발언을 하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이 우세했다. 피해자의 감정이 역사화해에 꼭 필요한가라는 소수 의견도 제기되기는 했다.
이와 더불어, 역사를 정치적으로 이용(사실은 오용 내지 악용)하는 데에 대한 경계의 목소리도 높았다. 그런데 그것이 도덕적 비판으로 그쳐서는 현실적 변화를 일으키기 힘들다는 것은 우리가 모두 겪어온 바이다. 여기서 화해는 "항상 도덕과 실용주의가 짝을 이룬 것"이라는 펠드만의 발언이 화해의 출발점을 제시한다. 그녀의 지적을 내 식으로 바꿔 말하면, 도덕적 설득과 더불어 이익 공유의 중요성을 일깨워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때 이익은 현실적인 것인 동시에 미래의 것이다.
그밖에 이번 회의에서는 역사화해의 실천방안으로 그간 주목되어온 공동 역사교과서와 국가 간 역사협의체의 활동 경험도 점검했다. 그런데 타이완과 홍콩에서 활동하는 롱잉타이(龍應台)는 공동 역사교과서가 절충과 타협에 그친 나머지 역사적 진실에 접근하는 데 오히려 장애가 되지 않는지 질의했다. 현재 출간된 여러 종의 공동 역사교재가 교과서 서술 체제를 따르고는 있지만 사실상 부교재이므로 그녀의 질문이 시기상조이자 과도한 비판인 면이 없지 않지만, 역사교과서란 실천방안이 안고 있는 근원적·태생적인 문제에 대해 주의를 환기시켰기에 깊이 새겨둬야 하지 않을까.
역사화해를 추진하는 기구의 역할에 대해서도 인식의 공유가 있었다. 정부와 시민사회의 협력이 특히 강조되었다. 역사 갈등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민족과 국가를 경시하고 과도하게 개인이나 시민사회의 역할에 기대는 관념적 시각이 논단의 일각에서 힘을 얻고 있는 형편과 대조가 된다. 나 자신은 국가와 시민사회의 협력과 경쟁의 관계가 '민주적 설명책임(accountability)'을 매개로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호밧(Andrew Horvat)은 국가횡단적 비국가기구(Transnational Non-state Actors)의 역할을 강조하면서도 그것이 정부와 맺는 관계를 유형화하여 촉매(catalyst), 보완(complement), 유도(conduit), 경쟁(competitor)이라는 네 가지 역할로 나눴다. 그 어느 유형도 정부와 비국가기구의 관계를 배타적으로 설정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다.

재단, 평화의 동북아시아를 위한 창조적 역할을

바로 여기서 출범 1주년을 맞은 동북아역사재단의 위치가 명료해지면서 그 의의가 도드라진다. 한국정부의 지원을 받는 독립적인 재단법인 동북아역사재단(이하 역사재단)이야말로 정부와 비정부기구를 넘나드는 역사화해의 기구로서 새로운 유형의 역할을 수행할 가능성을 품고 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역사재단은 현재 교육부와 외교통상부 등 여러 관련 정부 부처에서 파견 나온 관료, 전문연구자(및 시민활동가) 등이 어우러진 특이한 기구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 갈등이란 문제를 진단하고 처방하는 과정에서 서로의 경험 차이로 말미암은 갈등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펠드만의 화해에 대한 설명을 떠올린다면, 이러한 차이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생산적 갈등으로 승화시켜 공존에서 협력증대로 발전하는 '내부로부터의 화해'를 이룩해나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런 길을 걸으며 역사재단은 동북아 역사화해를 이끄는 창조적 기구로서 나라 안팎의 역할모델로 자리 잡을 것이 틀림없다.
이 과제를 한층 더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이념적 지표 또한 명료하게 정립하고 그것을 역사재단의 모든 구성원들이 공유할 필요가 있다. 역사재단은 단순히 동북아 역사분쟁을 해소하는 데 기여한다는 소극적 목표가 아니라 평화의 동북아시아를 세우는 데 참여한다는 한층 더 적극적이고 야심적인 목표를 내건 기구여야 한다.
동아시아의 현실을 돌아보면, 경제와 사회문화 영역에서는 물론이고 정치안보 영역에서도 상호의존성이 깊어지는 가운데, 동아시아 지역협력체를 건설하기 위한 정부 간 협력사업(이른바 ASEAN+3의 정책과제)도 조금씩 추진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지역의 통합 움직임이 온전히 실현되려면 동아시아적 정체성에 대한 공감대가 동시에 형성되어야 한다. 바로 이 과제 수행의 핵심 요소가 역사화해이다. 첨예하게 도드라져 있는 역사 문제에 대한 화해 없이는 진정한 공감대의 형성은 기대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지역의 정체성은 지역 주민의 현재와 미래만이 아니라 그들이 자신의 과거를 어떻게 이해하는 가에도 달려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보면, 역사재단의 존재는 어느 한 정부의 의지를 넘어선 동아시아의 현실과 미래가 요구하고 허용하는 것임이 명확해진다. 그러니 역사재단의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은 재단의 장기적 과제와 중단기적 과제를 항상 연결시켜 사고하면서 일상의 업무를 적절히 추려내는 지혜를 발휘해야 할 것이다. 이 막중한 사명을 수행해가는 과정에서 구성원들이 벅찬 보람을 맛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렇게 되도록 재단 밖에서는 격려와 고언을 아끼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