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역사재단 NORTHEAST ASIAN HISTORY FOUNDATION 로고 동북아역사재단 NORTHEAST ASIAN HISTORY FOUNDATION 로고 뉴스레터

연구소 소식
'평화헌법 9조'세계대회와 평화기행
  • 이신철 | 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 공동운영위원장

힘내라! 9조! 간바레! 9조! 도쿄의 한 중심 긴자(銀座) 거리에서 한국인들의 힘찬 외침이 울리고, 환호하는 일본인들의 반가운 몸짓과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토요일 오후, 일본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에서 벌어진 일이다.

사랑해요! 9조! 스키데스! 9조! 많은 일본인들, 특히 중년의 아주머니들이 "사랑해요"를 알아듣고 따라한다. 시위에 나선 일본인들에게서도 한류를 실감한다. 더욱 놀라운 건 한국어 아는 일본인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사실이다.

지키자! 9조! 마모로우! 9조!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문제인 헌법 9조를 지키자는 구호에 반가움과 경의를 표한다. '세계의 희망'으로까지 표현되는 헌법 9조에 오랜 세월 적대관계에 있던 한국인들이 함께 한다는 사실이 새삼 힘이 된다.

지난 5월 2일부터 6일까지 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는 한일문제관련 시민단체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일본평화기행, 헌법9조에서 동아시아평화찾기' 행사를 진행했다. 동북아역사재단의 지원 아래 헌법9조 세계대회 참가와 평화기행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다는 계획이었다. 참가자는 모두 21명. 이들 중에는 주최 측에서 직접 초청한 사람도 있었고, 개인일정을 일부러 맞추어 참가한 사람들도 있었다. 참가자들도 다양했다. 변호사, 연구자, 교사, 시민활동가, 한국의 나눔의 집에서 활동하는 일본인 등등.

긴자거리의 가두행진은 매년 일본 '헌법의 날'을 기념하여 진행되는 '5ㆍ3헌법집회'의 일환이었다. 도쿄의 히비야(日比谷)공원에서 진행된 집회에는 약 3,000여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보슬비가 내리고 있는 상황이라 예년에 비해 적게 모였다는 데도 실내 행사장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이 공원을 가득 메우고 있다. 특히 올해는 헌법9조 세계대회를 앞두고 '9조피스워크 히로시마에서 마쿠하리까지'라는 행진에 참가한 사람들이 행사의 중심을 이루었다. 이들은 히로시마로부터 행사가 열리는 치바(千葉)의 마쿠하리(幕張)까지 장장 71일간을 걸어온 사람들이었다. 초등학생, 주부, 교사 등 참가자들도 다양했다. 이들은 각기 자신들이 직접 걸으면서 느낀 9조 지키기에 대한 감상을 이야기했고 듣는 이들은 환호로 화답했다.

참가자들이 행진에 나서자, 멀리서 우익단체들의 자동차에서 나오는 확성기소리가 들려온다. 일본 시민운동의 한 특징은 다양한 개인들이 몸으로 뛰면서 활동을 한다는 점이다. 한일 시민사회 교류 경험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라면, 자신의 명함을 손수 만들어 나누어주거나, 자신이 만든 유인물을 나누어주는 일본인들을 만나는 것이 어렵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 것이다. 반면에 우익들은 크고 작은 검은 차에 각종 구호를 써 붙이고, 확성기를 통해 큰 소리로 외치고 다닌다. 이들의 대조적인 모습이 오늘의 일본사회의 한 단면을 이야기 해준다.

이 같은 대립의 광경은 다음날 진행된 헌법9조 세계대회장 앞에서도 반복되었다. 행사가 시작되기 직전 우익들은 자신들의 차를 이용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목소리는 시끄럽기는 했지만, 매우 초라한 것이었다. 이날 행사장은 7,000명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런데 우익들이 떠들고 있는 장외에 모인 사람만 7,000여명으로 집계되었다. 14,000여명의 사람들이 모인 것이다. 이런 상황에 기가 죽었는지 우익들의 차량은 행사장 주위를 시끄럽게 한 바퀴 돌더니 이내 사라졌다.

연설에 참여한 사람들도 세계대회 다운 면모를 보여주었다. 국제연합경제이사회 NGO부국장 애니파 메즈이를 비롯한 국제적 인사들이 대거 참석했다. 북아일랜드 출신으로 1976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메어리드 코리건 맥과이어의 강연, 그리고 다른 두 명의 노벨평화상수상자들이 영상메시지가 이어졌다. 무력분쟁 예방을 위한 글로벌 파트너쉽(GPPAC)이나 국제민주법률가협회(IADL)에서도 참석했다. 각국의 대표들이 의미있는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했다. 아프리카 가나에서 온 평화군축 운동가 엠마뉴엘 봄반데, 한국의 이석태 변호사, 코스타리카 반핵운동가 카를로스 바르가스 등이 그들이었다.

이들 중 특히 눈에 띠는 것은 미군정 시절 평화헌법 초안 작성에 직접 참가했던 베아테 시로타 고든이었다. 그녀의 등장은 많은 것을 생각게 했다. 미국의 전후 동아시아정책과 평화헌법의 등장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지, 자신이 참여해서 만든 평화헌법을 소중히 여기고 세계로 확장시키고자 하는 미국인 여성은 작금의 미국 전쟁정책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할지 등등의 의문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그러한 궁금점은 곧이어 진행된 토크쇼에서 한층 더 심해졌다. 전쟁을 반대하는 이라크 참전 미군, 미군 장교 출신의 미국 외교관, 이라크에서 납치당했던 일본인 시민운동가, 이라크 인권운동가 등이 참가한 이야기 쇼는 평화헌법과는 다른 길로 내달리는 미·일 양국의 현재 모습과 교차되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행사에는 명망가들 뿐 아니라 일본 내에 있는 소수자들이 대거 등장했다. 오키나와 주민들과 아이누족이 나와서 자신들의 문화를 보여주었다. 일본 내에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이야기도 등장했다. 체르노빌에서 살아남았다는 한 우크라이나 여성은 아름다운 선율과 노래, 그리고 유창한 일본어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첫날 행사의 정점은 일본 대중가수들의 문화공연이었다. 이들은 각기 자신들이 생각하는 '평화헌법'을 이야기하고 노래했다. 일본 중년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는 가수 가토 도키코(加藤登紀子)는 전후 생활고에 시달렸던 대중들에게 힘을 주었던 노래의 소중함을 이야기함으로써 평화의 중요성을 일깨웠다. 남아공에서 태어나 일본인과 백인의 피가 섞인 젊은 락가수의 공연에 어색한 미소를 머금고 호응하는 연세 지긋한 노인들의 모습은 그 자체가 평화였다.

이튿날에도 각종 문화행사와 소규모 세니마들이 곳곳에서 진행되었다. 이 날도 사람들이 너무 많아 행사장은 초만원이었고, 아쉽게 발길을 돌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 중에는 지방에서 먼 길을 달려온 경우도 있었다. 그렇게 대회의 열기는 예상 밖이었다. 편의점을 통해 3,000엔의 입장권을 판매했음에도 많은 사람들이 표를 구입하고 모여든 것도 인상적이었다. 입장하지 못한다는 자원봉사자들의 안내에 어느 한 사람 큰소리를 내지 않고, 근처 공원으로 인도하는 그를 따라가는 모습도 매우 인상적이었다. 물론 개중에는 자신이 살고 있는 지방까지 내려와서 사과하라는 요구를 한 사람도 있었다는 후문이다. 우리와는 참 많은 것이 다른 일본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한국 참가단은 헌법9조 세계대회와는 별도의 프로그램도 진행했다. 도착한 그날 오후에는 짐도 풀지않고 에다가와(枝川) 학교를 향해 달려갔다. 오랜 투쟁 끝에 자신의 권리를 법적으로 확보한 '우리학교'의 관계자들은 갑작스런 한국의 손님들을 내치지 않고 따뜻이 품어주었다. 경색된 남북관계를 감안하지 않을 수 없었을 텐데도 말이다. 둘째 날에는 조선인 징병자와 군속들이 억울한 죽음을 당한 후 다른 유골들과 뒤섞여 작은 항아리에 모셔져 있는 유텐지(祐天寺)를 향했다. 그곳은 올 봄 한국에 유족들이 있는 것으로 확인된 일부 유해가 봉환되기도 한 곳이다. 또 유텐지에는 해방직후 귀국길에서 죽음을 당한 우키시마마루(浮島丸) 폭침사건의 희생자 중 280명의 유골이 봉안되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번 여행단은 이밖에도 동경대공습 당시 조선인을 포함한 신원불명의 유골을 모아 합사해 놓은 위령시설인 도쿄도위령당(東京都慰?堂), 저널리스트였던 고 마츠이 야요리(松井やより)씨의 뜻을 이어받아, 전시성폭력(일본군 '위안부')의 실태를 조사 기록하고 전시하는 공간인 '여성들의 전쟁과 평화 자료관' 등도 방문했다. 헌법9조 세계대회의 앞 뒤 틈새를 이용한 빠듯한 방문이었고, 밤에는 일본 시민활동가 등과 간담회를 갖는 등 쉴 새 없이 엿새가 흘러갔다. 여행 마지막 날 밤은 치열한 평가와 토론으로 밤을 지새고 새벽차로 비행장으로 향하는 그야말로 치열한 여정이었다. 다행히 그만큼 얻은 것도 많았다. 우리가 알아야 할 일본이 과거의 침략의 원흉만이 아니라는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시대가 되었지만, 아직 그들의 평화를 향한 열정이 구체적으로 와 닿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아시아의 평화를 향해 가는 길에는 아직도 할 일이 많다는 것, 이해에 바탕한 교류가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흔치않은 소중한 경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