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월 5일부터 6일까지 이틀에 걸쳐 "동아시아의 지식교류와 역사기억"을 주제로 한국을 비롯 중국, 일본, 대만 학자 총 60명과 여러 청중이 함께한 가운데 국제학술회의가 열렸다. 2007년 12월에 "중심과 주변에서 본 동아시아"를 테마로 한 국제학술회의가 끝난 직후 발족된 '동아시아사 연구자포럼'과 동북아역사재단이 공동으로 주최하였다.
동아시아 각국의 학자들이 숙식을 같이하며 '他'의 발표를 듣고 '自'의 '史觀'을 피력하고 또 토론하는 가운데, 생각과 의견의 일치라고까지는 할 수 없겠지만 서로에 대한 이해의 度를 심화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는 것을 체감할 수 있어 기뻤다. 학술회의에서 논의되었던 다양한 이슈들 그리고 방대한 분량의 발표와 토론 내용에 대한 요약은 지면관계상 생략하기로 한다. 우선 강조해야 할 점은 이번 국제학술회의가 '동아시아사 연구포럼'('동아시아사 연구자포럼'이 아닌 것에 유의)이 정식으로 출범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이 아닐까 싶다.
주지하다시피, 2010년이면 조선이 日帝에 의해 '병합'된 지 100주년이 된다. 그러한 역사적 시점을 앞에 두고 '동아시아사 연구포럼'이 결성되어 시의가 적절하다는 점 또한 마음을 푸근하게 한다. '동아시아사 연구포럼'의 창립 취지를 간략하게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동아시아 국가들이 역사 인식으로 인해 빚어지고 있는 대립과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해당 학자들 간의 긴밀한 협조 하에 공동으로 하는 연구가 필요하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동아시아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서로의 의견을 나누는 즉, 의사 소통을 지속할 수 있는 기회를 자주 갖지 않으면 안 된다. 현재, 한국과 일본 그리고 중국과 일본 사이에는 정부 간 협의로 양국 간의 역사학자 협의체가 구성되어 활동 중이나, 동아시아 지역 전체의 역사학자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협의체는 아직 구축되고 있지 못한 형편이다. 따라서, 그러한 협의체가 필요함을 절실히 인식하는 바이다."
충돌하는 것은 '문명' 아닌 '언어'
이젠 거의 고전(?)이 되다시피 했지만, 새뮤얼 헌팅턴은 "문명의 충돌"이라는 저서에서 문명간의 충돌을 논하면서, 동아시아의 경우 '일본문명'을 중화권에서 분리시켜 놓았다. 전혀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제 '동아시아사 연구포럼'을 결성하여 본격적으로 공동연구에 착수하려 하는 '우리들'에게는 그 책자가 썩 맘에 드는 대상은 아닐 듯싶다.
여기서 그리 반갑지만 않은 그 문명의 '충돌'을 새삼스레 거론하는 이유는 '충돌'의 주체는 문명이 아니라 바로'언어'라고 믿기 때문이다. '언어'를 통해 대화를 하고 대화를 통해 소통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상대와 소통할 때 상대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서로의 오해가 풀리게 되고 평화로운 관계가 유지될 수 있다. 그 반대의 경우 즉, 충분한 대화를 나누기도 전에 자국(자민족)의 주장만을 일방적으로 편다면, 다른 민족의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입기 십상이어서 이후의 감정 대립과 반목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이번 국제학술대회의 특징 중 또 하나는 공식 언어가 한국어와 중국어 그리고 일본어였다고 하는 사실이다. 현수막이나 프로그램, 논문집 등에 인쇄되어 있는 영문표기를 제외하고 학술회의를 소통하게 한'언어'(들)은 바로 이들이었다. 그러니까, 이제껏 무조건(?) 항상 '주인공'이었던 영어가 배제되었다고 하는 점이다.
사실 그간 동아시아 학자들 사이에서는, 한자라고 하는 공통된 '언어'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서로의 소통에 있어 적지 않은 장애물이었던 익숙지 않은 영어를 사용함으로써 영어 그 자체와 또 그 영어로부터 파생되는 새로운 이질적 '문화와 문명'에 준거된 심각한'언어 충돌'이 표출되어 왔다. 근대 이전 시기, 동아시아 국가의 지식인들이 한자라고 하는 '언어'를 바탕으로 필담이나 혹은 漢籍(한적, 한문으로 쓴 책)을 통해 소통했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근대 이후, 혹 영어라고 하는 이질 '언어'가 동아시아 국가들 간의 '문명의 충돌'을 초래케 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동아시아사 연구 포럼', 소통과 상생을 향하여
동아시아 국가들이 역사 문제를 두고 갈등을 겪고 있는 이유는 다종다양하지만, 그 중 빼놓을 수 없는 하나는 아마도 그 목숨 질긴 화이관(華夷觀)이라고 하는 마치 영화 속의 좀비(zombie)와도 같은 괴물일 것이다. 화이관 역시 이곳에서 장황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간단히 말해 자국(자민족)은 '화(華)'로 두고 나머지 국가(민족)들은 전부 '이(夷)'로 인식하는 것을 일컫는다. 예컨대, 근세(early modern)의 중화주의, 소중화주의, '일본형 화이의식' 등이 그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러한 주의나 의식 등이 근대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이어져 내려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의식 속에 침잠해 있어 쉽사리 불식되고 있지 않는 것이 문제이다. 관념적일 수도 있겠지만, '동아시아사 연구포럼'의 결성을 계기로 '언어'와 역사 갈등의 장벽을 허물고 소통을 통한 상생의 길로 나아가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면, 과거(그리고 현재)의 '동아시아'가 지니고 있었던 화이관은 상당 부분 그 힘을 잃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
여기에서 우리가 반드시 유념해야 하고 또 지양해야 할 부분은 현재(또는 미래)의 '동아시아'를 여타 지역과의 구별이 아닌 차별을 근저로 '화(華)'로 설정하고 여타의 지역들을 새로운 버전의 '이(夷)'로 인식하려는 자세일 것이다. 그러니까, '동아시아' 지역의 국가와 국민들이 이를테면 '동남아시아'나 기타 '아시아' 지역을 (무)의식적으로 '이(夷)'로 취급하려는 역사인식의 오류는 적어도 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동아시아사 연구포럼'이 주관하게 될 2009년 국제학술회의가 과연 어떠한 모습으로 전개될지 사뭇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