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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서
[중ㆍ러 국경 및 러시아 한인유적지 현지 조사] '동아시아 평화공동체'의 전망을 찾아
  • 최덕규 | 연구위원 제2연구실

아이스크림이나 냉면과 같이 추워야 제 맛이 나는 음식이 있듯이, 러시아 역시 눈보라치고 찬바람이 불어야 그 진가를 제대로 발휘하는 나라이지 싶다. 지난 11월 하순 한인이주 문제와 중ㆍ러관계 관련 자료조사를 위해 밤늦게 도착한 하바롭스크 공항은 수은주가 영하20도를 가리키고 있었고, 마중 나온 현지 안내인의 자동차는 추위에 문짝이 얼어붙어 열리지 않아서 하마터면 우리는 휑한 공항 주차장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얼음조각으로 굳어버릴 뻔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도 이제는 따스한 기억 저편에 머물러있다. 이렇게 이번 현지조사가 무사히 마무리될 수 있었던 데에는 추위를 녹여버릴 만큼 인정이 넘쳐나던 뜨거운 가슴을 지닌 현지인들과 고국에 대한 한과 그리움을 신명나는 우리의 가락과 춤사위로 풀어내던 이주한인들의 열정이 큰 도움이 되었다. 아마도 혹한과 동토의 자연은 역설적이게도 인간들에게 꼼수보다는 서로 도우며 착하게 살라고 가르치는 모양이다.

우리가 러시아 극동지역에 주목한 이유는 다음의 두 가지다. 첫째, 이 지역은 현재 러시아인, 중국인, 한인 등이 평화롭게 공존하며 상호 문화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짐으로써 일종의 동아시아 평화공동체의 전망을 제시해주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 중ㆍ러 양국이 하바롭스크 인근의 흑할자도(黑子島:)[러시아명: 볼쇼이 우수리스크 섬]를 분할하기로 합의함으로써 이곳이 영토문제의 평화적인 해결사례를 제시했다는 점이다. 이는 동아시아 국가들 사이에서 영토분쟁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는 상황에서, 중국과 러시아는 오히려 양국간의 현안이었던 영토문제를 해결한 바, 향후 우리의 연구와 조사사업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러시아 극동지역의 한인 이주 관련 유적은 블라디보스톡을 중심으로 동쪽의 빨치산스크, 남서쪽의 크라스키노 그리고 북서쪽의 우수리스크에 분포되어 있다. 그 가운데 4만을 헤아리는 극동지역 거주 한인 가운데 약 2만 명의 한인들이 모여살고 있는 우수리스크에는 발해의 유적들로 추정되는 역사유물들이 곳곳에 남아있어 우리의 오랜 역사의 향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또한 이곳을 감싸 흐르는 수이푼(Suifun) 강가에 서있는 독립운동가 이상설 선생의 기념비와 우수리스크 사범대학의 한국어학과 학생들의 유창한 우리말 솜씨는 그곳이 낯선 이국땅이라는 인상보다는 오히려 친근함을 느끼기에 충분하였다.

한편 블라디보스톡에서 차로 약 4시간 걸리는 크라스키노 근처에는 러시아 연해주에서 최초로 생겨난 한인마을인 지신허(Tizinkhe) 마을터가 있다. 약 2천호는 족히 살았을 광활한 대지는 현재 사슴농장으로 변해버려 우물터와 덩그러니 남겨진 연자방아 몇 개만이 과거 이곳에 한인들이 집거해있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곳에 살았던 한인들은 1930년대 중반 소련의 스탈린 정권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이주됨에 따라 사람들의 온기를 잃어버리고 지신허 마을은 사라지고 말았다. 결국 현대사의 비극이 투영되어 있는 한인이주 관련 연구조사 작업은 단순히 연해주 한인이주사의 복원이라기보다는 중국의 조선족, 일본의 재일한국인과 더불어 체계적인 통합연구의 출발점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하바롭스크에서 우리는 현재 동북아 영토문제 해결의 모범사례로 꼽히고 있는 흑할자도 문제 전문가와 인터뷰를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흑할자도는 하바롭스크 인근의 흑룡강과 우수리강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면적은 350㎢로서 홍콩의 1/3에 해당한다. 중ㆍ러의 접경선에 위치한 이 섬은 그 귀속을 둘러싸고 지리한 국경분쟁을 야기한 바 있으며 양국관계 정상화의 걸림돌이 되어왔다. 그러나 흑할자도는 2005년 중ㆍ러 양국이 면적균등분할 방식으로 이섬의 반분(半分)에 합의하면서 東半部는 러시아가 西半部는 중국이 관할하는 "1도양국(一島兩國)"의 독특한 형태를 취하게 되었기 때문에, 동북아시아에서 평화적으로 영토문제가 해결된 대표적인 성공모델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이 같은 중요성을 고려하여 우리는 이 섬에 주목했으나, 초겨울에는 섬과 연결되는 부교를 철거하기 때문에 얼음이 두껍게 얼기 전까지는 사실상 접근이 불가능하였다. 이에 흑할자도의 분할작업에 관여한 알렉세이 막히노프(A.Makhinov) 교수(러시아과학아카데미 물과 생태 문제 연구소 극동지부 부소장)와 중ㆍ러 국경문제 해결의 과정 및 전망에 대한 간담회 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다. 막히노프 교수는 흑할자도의 면적분할문제는 이 섬이 법적, 지리적으로 러시아의 영토였지만 사실상 양국 고위층 사이에서 정치적으로 해결된 문제라는 입장을 밝혔다. 따라서 러시아 극동지역에서도 처음에는 러시아의 일방적인 양보에 대해 부정적 여론이 있었지만 지금은 이를 기정사실화하고 있다고 전해주었다. 이 같은 면적 분할론이 여타 영토분쟁 사례에 적용될 수 있을지 여부에 대한 질문에 대해 그는 흑할자도 문제는 정치적으로 해결된 독특한 사례이기 때문에 다른 영토문제에 적용되기 어려울 것이라고 단언하였다. 흑할자도 사례가 동아시아의 여타 영토문제에 일률적으로 적용하기 어렵다는 그의 입장표명은 향후 다양한 영토문제를 둘러싼 해법에 대해 더 많은 고민을 해야 한다는 숙제를 우리에게 안겨주었다.

따라서 이번 현지조사는 동북아역사문제의 해결과 대안을 전망하는데 러시아극동지역의 중요성과 현지 기관에 대한 지원 및 공동연구의 필요성을 새삼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