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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 소식
정한론 '유감'
  • 이원우 제1연구실 연구위원
경천애인

정한론(征韓論)하면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사이고 타카모리(西鄕隆盛, 1828~1877)가 불평사족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하자고 주장한 것이라고 연상할 것이다. 전체적 맥락에서 보면 역사적 사실 또한 그러하다. 그런데, 이 문제의 '조선사절파견론'을 주장한 사이고는 어떠한 인물일까.

1873년 10월, 이와쿠라사절단이 유럽을 순방하고 있던 사이 조선과의 외교문제와 폐번치현 후의 불안한 정치상황이 어우러져, 사이고 타카모리의 조선사절파견론을 계기로 명치정부 수뇌부였던 참의(參議)의 절반과 군인·관료 등 600여명이 사직을 한 일대 정변이 일어난다. 이것이 '명치6년정변(일명 정한론정변)'이다. 이 사건의 연장선상에서 조선과 일본은 1876년 조일수호조규를 체결하고, 일본 내에서는 최대 규모의 사족(士族)전쟁인 서남전쟁(1877)을 치른다.

한국인들에게 사이고는 조선침략론의 수괴요, 그 이상은 생각하고 싶지도 알고 싶지도 않은 인물일 것이다. 일본과의 외교교섭에서 일방적으로 밀리기만 하다가 한일병합을 당했기 때문에, 개항 이후 일본에 대한 인식은 그저 반일과 증오심 일변도로 임하면 되었지 사건 개개의 전개와 사건에 연계된 인물에 대한 천착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애써 감정처리해온 측면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사이고 타카모리는 명치유신정부의 필두 참의로 황족과 귀족출신인 산죠 사네토미(三美)와 이와쿠라 토모미(岩倉具視)를 제외하고는 당시 일본 정부의 최고 요인이었다. 이러한 사이고는 평소에 '명분론'적인 대외관을 견지하고 있었다. 예의 정한론정변 때 정부에 제출한 '출사시말서'에는 "상대방을 의심하여 무장 경호대를 거느리고 사절을 파견해서는 예를 잃어버리게 되니 꼭 교의를 두텁게 하고자 하는 취지를 관철하고 싶다"고 피력하고 있다. '경천애인'을 좌우명으로 했으며, 그가 남긴 유훈집에는 "정도를 밟고 지성을 다한다"는 말이 빈번하게 나온다. 1873년 10월에, 명분론적인 대외관의 소지자이자 명치정부의 최고실력자인 사이고 타카모리가 외교사절로 조선에 오는 것이 좌절되었던 것이다.

'명분론'의 사이고가 조선 사대부를 만났다면?

그 후 일본은 1876년 2월, 전권대사 참의 겸 북해도개척사 쿠로다 키요타카(黑田淸隆)와 부사로 참의 이노우에 카오루(井上馨)를 조선에 파견한다. 쿠로다는 취중에 부인을 참살하는 등 행실이 고약하여 '미치광이'로 불렸고, 이노우에는 정상(政商) 미츠이(三井)와의 부적절한 관계 때문에 '미츠이의 점장'으로 불린 인물이다. 반면 조선과의 외교를 원활히 타개하기 위하여 청과 청일수호조규(1871.4)를 체결할 때는 정사 대장경 다테 무네나리(伊達宗城, 다이묘), 부사 외부차관 야나기하라 사키미츠(柳原前光, 구 公家), 동 권대승(權大丞) 츠다 마미치(津田眞道, 대학자)를 파견했다. 당시 일본이 조선을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처리하려 했는지는 청과 조선에 파견한 인물만 비교해 보아도 쉽게 짐작이 간다.

사이고 타카모리가 비무장 사절론을 주장하고 명분론적 대외관을 견지한 유교적 덕목을 지닌 인물이라 할지라도 정한의 목적은 불평사족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하는 것임에는 변함이 없다. 그럼에도 필자가 1873년 10월 사이고의 조선사절파견이 불발로 끝난 것을 심히 유감으로 생각하는 것은, 언필칭 '공맹의 도', '선왕(先王)의 길'을 염송하는 조선의 사대부와 경천애인을 덕목으로 삼는 사이고가 조일 간의 외교문제 등을 의제로 논난(論難)할 수 있었다면, 결과야 예측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우리에게 외교 주도권이 50%는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조일수호조규체결 이후 일본에게 계속 밀리다가 결국 나라를 빼앗긴 조선의 외교를 생각하다 이처럼 무의미한 역사적 가정을 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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