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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 소식
일본 고문헌에 비친 김춘추
  • 연민수_연구위원/역사연구실
태종무열왕릉비

일본 최초의 정사인 『일본서기(日本書紀)』(720년 편찬)는 김춘추를 왜국에 인질로 끌려온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신라가 가야를 멸망시키자 왜 왕권에서는 종전 가야지방에서 공납 받던 산물을 신라가 대납해 왔는데, 이 공납관계를 인질로 대체하기로 하고, 첫 인질로 김춘추를 보냈다는 것이다. 이런 설명은 현재의 연구 성과에서는 비판거리도 안 되는 것이지만, 문제는 왜 일본 역사서에서 김춘추는 인질로 자리매김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김춘추가 살았던 7세기 중엽 한반도는 격동의 세기였다. 통일을 향한 삼국의 영토전쟁은 만성화되고, 주변국을 상대로 한 외교를 치열하게 전개했다. 642년 백제 의자왕은 신라의 군사적 요충지인 대야성과 주변 40여성을 함락시켰다. 이곳을 지키던 성주는 다름 아닌 김춘추의 사위 품석으로 일가족이 몰살당하였다. 식음을 전폐한 김춘추는 백제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고, 적지인 고구려로 달여가 집권자였던 연개소문을 만나 지원요청을 한다.

고구려 외교가 순탄치 않자 친백제 노선에 있던 왜국을 상대로 모험외교를 감행한다. 『일본서기』에는 김춘추의 행적에 대해 침묵하고 있으나 "춘추의 용모가 수려하고 화술이 뛰어나다(春秋美姿顔善談笑)"라고 적고 있다. 여덟 글자에 불과한 인물평이지만 외교가로서 김춘추의 모습이 함축되어 있다. 대왜 외교를 일단락지은 김춘추는 이번에는 당나라로 달려가 당태종을 만나 파병을 요청한다. 파병을 끌어내려고 당의 의관제를 채용하는 등 당측의 요구사항을 상당부분 수용하기도 했다. 동아시아를 상대로 한 전방위 통일군사외교는 성공하였고 드디어 신라는 한반도의 주인공이 되었다.

일본 중심주의를 위해 "인질"로 격하

『일본서기』에서 김춘추를 인질로 보는 것은 왜국과의 특별한 인연과 신라사에서 차지하는 그의 위치 때문이다. 그는 신라왕으로 있으면서 백제의 사직을 끊은 인물이다. 왜 왕권이 총력을 기울인 백제부흥운동은 처참한 패배로 끝났다. 왜국은 김춘추에 대해 특별한 인식을 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왜국에 갔던 김춘추가 신라 최고통치자에 올라 신라 중대 왕통을 열었고 그의 직계 왕들이 일본과 활발한 교류를 했다.

8세기 일본 지배층들은 신라를 번국으로 자리매김하는 율령법을 제정했고 역사적으로는 조공국임을 증명하는 『일본서기』를 편찬했다. 신라를 극복하고자 하는 일본지배층의 현실과 미래의 기대상이다. 바로 일본 본위의 주관적 대외이념을 충족시키는 인물로서 김춘추는 더할 나위 없는 소재였다. 그를 인질이라고 칭한 것은 이런 상황에서 나타났다. 8세기 현실에서 역사적으로 신라왕에 대한 일본 천황의 우월한 지위를 확보해 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고대 일본인이 당대 동아시아 최고의 외교가로 꼽히는 김춘추의 이미지를 왜곡한 것은 이러한 사정에 기인한다. 그런데 고대에 형성된 잘못된 역사인식은 사라지지 않고 계승되어 일본 근대 사가들의 왜곡된 한국관, 일본 우월주의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고대의 이데올로기와 근대의 침략주의사관이 시공을 초월하여 하나가 되는 한·일 역사의 특수한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기록의 중요성과 함께 사료 속에 숨어있는 진실을 찾는 비판적 혜안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새삼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