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각국이 자국사의 체계적 확립을 위해 노력하는 데에는 근대 국민국가의 정체성 논리가 작용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다민족·다인종 국가의 역사인식-갈등의 역사와 공존의 모색" 기획연구는 다민족·다인종으로 이루어진 국가들이 추진해온 일국적 정체성의 함양을 지향하는 자국사 확립을 위한 노력을 조명하고 있다. 이들 국가들에서 자국사 확립 과정이 빈번히 역사왜곡을 낳고 있으며, 심각한 갈등을 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이 연구의 필요성을 설명해 준다.
최근 동아시아에서도 역사이해의 문제가 단순히 학술적 차원을 넘어 현실정치의 분쟁거리로 비화할 여지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이런 문제의 중심에 동아시아 3국의 자국 중심 역사학이 존재하며, 그 중에서 특히 중국은 '다민족 통일국가론'이란 논리를 내세우며 갈등의 진원지가 되고 있다. 물론 중국의 논리는 다민족으로 이루어진 중국의 현실을 인정하고 자국 내 애국주의를 고양하고자 하는 필요성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노력이 역사왜곡, 나아가 갈등 조장으로 이어지고 있기에 문제다.
사실 인간들의 과거사 인식에서 현재적 가치를 전적으로 배제하기를 기대하기란 불가능한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오늘날 역사가들은 현재의 관점으로 과거를 역투영하여 자기중심적 가치를 만드는 것이 무서운 행위란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21세기를 맞은 현재 중국 측의 시도가 보여주듯 갈등은 주저의 대상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이 연구는 이런 동아시아의 정치적 환경과 역사인식의 문제를 배경으로 시작되었다. 연구자들은 주로 다민족·다인종으로 이루어진 세계 여러 나라에서 자국사 확립을 향한 과정이 야기한 문제들을 조명해 보고자 했다. 그러나 이 연구는 엄밀히 말하면 전형적인 다민족국가들만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다.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지만 이 연구는 세계 어디에서도 순수한 단일민족 국가는 없다는 인식에서 시작되었다. 현존하는 지구상 어떤 국가도 민족적, 인종적 난맥상은 보편적인 현상이다.
다민족·다인종 문제의 발생과 은폐의 역사
따라서 이 연구는 미국, 남아프리카, 멕시코, 러시아, 스페인과 같은 다민족·다인종 국가뿐만 아니라, 독일과 프랑스라는 민족동질성에 입각한 전형적인 나라들도 특별히 다루기로 했다. 다민족·다인종 문제에서 자유로운 '근대 국민국가'는 존재하지 않으며, 독일이나 프랑스도 예외는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들 국가들은 최근 이민자 집단의 증가와 함께 다민족·다문화 문제가 피할 수 없는 현실일 뿐만아니라, 최근 주류 민족의 흡수·동화 이데올로기, 통합노력에 대한 비판과 아울러, 문제 해결을 위한 대안을 모색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주목의 대상이다.
이런 전제에서 출발하여 각 나라들에서 다민족·다인종 문제가 발생하고 발전해온 역사, 그럼에도 민족 이데올로기, 국민국가의 통합력으로 이런 문제들을 은폐한 역사를 살펴보는 일이 연구자들의 주된 과제였다. 또한 이 연구에서 다룬 국가들은 다른 어느 지역보다 격렬하게 다민족·다문화의 문제를 표출 했던 역사를 가지고 있고, 그로 인한 갈등이 최근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개별 연구들은 각국의 다민족·다인종의 상황이 이루어지는 역사 과정을 정리하는 것만큼이나 현재 이들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 이를 해결하기 위한 최근의 시도들을 밝히는데도 주력했다.
물론 여전히 세계 각국은 '평범한' 그러나 강력한 '국민국가'를 지향하며 일국적 정체성을 고집하고 있다. 그럼에도 오늘날 '국민국가'란 형식이 얼마나 더 오래 유지될 수 있을지, 혹은 역사학이 이런 '국민국가'를 합리화하기 위해 얼마나 더 봉사할 수 있을지 단언하기는 쉽지 않다. 최근 지구상 국가들을 둘러싼 조심스런 진단은 국민국가의 위상이 다민족·다문화의 현실에서 흔들리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아울러 지난날 역사가의 임무가 '국민국가'의 내적 정체성 확립에 봉사하는 것이라 여겨졌다면, 오늘날 역사가들 중에서 그와 같은 논리를 되풀이할 가능성은 점차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민족사'에 대한 비판적 문제제기 "성과"
그러나 '국민국가'와 일국사학의 체계가 갖는 정당성이 흔들리고 있음에도 그것를 넘어서는 대안 제시는 쉽지 않다. 물론 이 연구에 참여한 개별 연구자들은 세계 도처에서 다원적 정체성, 그에 입각한 '열린 공화국'에 대한 기대가 증가하고 있음을 보고하고 있다. 그러나 그 미래는 여전히 불확실하다. 새로운 변화를 바라는 이들의 염원을 담아 주류민족의 단순한 헤게모니 관철이 아닌 진정한 의미에서의 다원적 구조 형성, 그 속에서의 공존이 점쳐지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허울뿐인 공존이며, 또 다른 형태의 차별과 배제를 잉태할지 모른다는 우려의 소리가 높다.
이렇게 미래를 예측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이번 연구의 성과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다민족으로 이루어진 '국민국가'에서 내적 정체성의 확립을 목적으로 추진된 근대 역사학이라는 거대 기획이 항상 다민족들 간의 공존의 이데올로기를 앞세운다 할지라도, 실은 주류 민족을 중심으로 한 억압적이고 전유(專有)적 기능을 해 왔다는 점은 이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따라서 개별 연구들은 다민족·다문화의 양상을 띠고 있었음에도 국민국가의 역사학이 어느 만큼이나 배제와 포섭의 논리 속에서 기능해 왔는지, 그리고 이런 논리가 현재 갈등의 역사를 어떻게 만들고 있는지를 밝히고자 했다.
이번 연구는 애초에 너무 전문적이거나, 저자들 간의 편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단순히 개별 사례를 모으는 차원을 지양하려고 의식적으로 연구자들 간의 충분한 교감으로 공통의 문제의식을 갖고자 했다. 이를 통해 각각의 연구들은 세계 각국이 내세우는 민족사 논리의 허구성을 밝히고자 했으며, 그 결과 민족사에 대한 비판적 문제제기라는 소기의 성과에는 이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번 연구에서는 최근 민족사에 대한 비판적 문제의식 속에서 싹트고 있는 각국의 새로운 역사학에 대한 소개가 다소 미진한 것이 사실이다. 이는 향후 과제로 남겨져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