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에 들어 세계적 강대세력들의 형세와 한반도가 위치한 동북아시아 세력판도가 빠른 변화의 물살을 타고 있다. 역사에서 보면 국제관계의 대처 여하에 따라 한 국가가 안정과 번영이냐, 쇠퇴와 패망이냐의 갈림길에 섰던 경우가 많다. 그것은 한국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국제관계가 급변하는 시기에는 국내 세력들 간에 이견 대립이 자중지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21세기 한국사회에서 대외관계에 대한 첨예한 이견 대립은 서로 다른 이념을 바탕으로 전개되는 양상이어서, 이념과 연결된 광범한 요소를 연이어 끌어들이며 충돌이 오래 지속될 기세이다.
시대에 따라 국제적 형세나 이념의 내용은 많이 다르지만, 국제관계를 보는 눈에 이념이 작용하는 특성의 단면은 그 시작부터 결과까지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역사적 실례들에서 잘 드러난다. 예컨대 고려시대에는 문화의 폭넓은 다양성과 연관되며, 각 이념 간의 대외관계를 보는 시각의 차이가 양극단에 걸칠 정도로 컸다. 고려 성종대는 그러한 면이 특히 잘 드러나는 시기이다.
화이론자(華夷論者)들이 조정을 주도하던 고려 성종 12년(993) 8월에 고려는 일대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세 달 전, 거란이 침공군을 일으켰다는 서북계 여진이 보내 온 첩보도 거짓이라고 무시하며 아무런 방비를 하지 않던 고려 조정은 거란군의 침공이 시작되자 공황상태에 빠졌다. 당황한 화이론자들은 두 가지 대책을 내 놓았다. 하나는 중신이 군대를 이끌고 거란 진영에 나아가 항복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서경(평양) 이북의 땅을 거란에 떼어줌으로써 거란을 달래는 것이었는데, 성종은 후자를 따르려고 하였다. 왕건 태조대 이래로 거란과 맞서며 잘 대처해 온 고려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근본 요인은 화이론자들의 정책에 있었다.
고려 성종때 거란의 침략에 무기력했던 까닭
화이론자들은 당과 송 등 한족 국가가 천하의 중심인 중화이고, 이(夷)의 하나인 고려는 마땅히 사대의 예법을 통해 평화를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자국 전래의 문화를 '비야'하다고 전면 부정하며 유교를 비롯한 한족의 문화를 지고하다고 여겨 급격히 도입을 추진하였다. 특히 10세기 초 이래로 분열되어 있던 한족의 왕조들을 979년에 송나라가 통일하자, 고려의 화이론자들은 크게 고무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981년 고려 성종의 즉위와 동시에 집권한 그들은 송나라와의 사대관계만을 중시하였다. 그런데 송나라의 세력권은 동북아의 대륙 남부에 국한되었고, 그 북방에서는 거란이 정복팽창을 계속하여 성종대 초에는 동남쪽으로는 압록강 하류에까지 도달했다.
이에 앞서 천하다원론자였던 고려 태조는 정복팽창을 거듭하는 거란과의 대결이 언젠가는 불가피할 것으로 판단했다. 그는 만주 동남부 지역의 여진 부족들과 발해유민 집단들을 규합하여 거란에 대항하는 동맹을 결성하고 칭제(稱帝)를 통해 그 맹주로서의 역할을 하며, 거란에 대한 방비에 힘을 기울였다.
태조의 이러한 정책은 후대의 왕에게로 이어졌다. 그런데 성종대가 되자, 거란의 위협은 더 심각해졌음에도 천하다원론자들을 누르고 집권한 화이론자들은 거란에 대한 대비책을 모두 폐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집권 초부터 사대명분에 의해 칭제를 폐지하고 거란에 대항하는 동맹을 해체한 다음, 여진 집단들과는 거리를 두거나 반목했다. 고려 자체의 군비도 대폭 축소해 나갔다. 화이론자 원로대신 최승로는 심지어 북방 국경수비에 배치된 중앙군을 철수하고 지역민으로만 대신할 것을 건의했다. 외침에 대비한 지방 보유 무기는 거둬들여 농기구를 주조했다.
화이론자들은 신봉하는 이념을 앞세움으로써 국제관계의 중대한 실사(實事)를 놓치고 말았다. 그들은 이념에 따라 송나라의 통일과 성장에만 주목하고, 급격히 팽창하는 거란세력이 문턱까지 다가온 위태로운 사실은 외면하거나 호도하고 있었다. 그 결과 군사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무방비상태에서 거란의 침공을 당하게 되었다. 허둥대며 실사 파악을 제대로 하기도 전에 대책을 내놓았는데, 그것은 위기의 수습책이 아니라 고려의 몰락을 초래할 졸책이었다.
영토 할양 추진은 화이론자들에게 눌려 있던 이지백, 서희 등 천하다원론자들의 신랄하고 강력한 비판을 받고 중지되었다. 그리고 서희가 거란 진영에 들어가 담판하며 거란의 침공의도를 간파함으로써 고려는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도 해법은 정곡을 찌르는 실사의 파악에서 나왔던 것이다.
다른 의견들의 경쟁이 없는 사회는 병들기 쉬워
고려 성종대와 유사한 사례들은 한국사 속에서 드문 것이 아니다. 이념의 과잉은 이념을 앞세움으로써 뚜렷하고 중대한 것도 보지 못하도록, 실사를 보는 눈을 가린다. 게다가 그것이 만성화되면 자신들의 기존 입장이나 정책을 합리화하기 위해 실사를 호도하고 왜곡하게까지 된다. 국가사회의 명운이 걸린 국제관계에서는 실사 파악의 부실만으로도 큰 손실을 초래하지만, 실사를 호도하고 왜곡하기에 이르면 국가를 큰 위험에 빠트린다.
문제는 이념 자체라기보다는 실사보다도 이념을 우선하여 앞세우는 이념의 과잉이다. 이념은 나름으로 세계, 국가, 인간, 문화 등을 바라보는 체계를 갖추고 중요한 가치를 추구함으로써 그 시대적 의미를 갖는다. 또한 서로 다른 이념에 따른 이견들의 경쟁은 문제에 대한 논의를 풍성하게 하며 시각을 넓혀주어 보다 발전된 해법을 구하게 하는 토대가 된다. 이견이 없고, 논쟁과 경쟁이 위축된 사회는 병들기 쉽고 활력을 잃는다.
고려의 지식인들은 고려가 동북아의 선진적 위치에 있다는 자부심을 피력하는 글들을 적지 않게 남겼다. 실제로 한족의 국가와 비교할 때, 고려시대에는 여러 부문에서 격차가 현저히 줄었고, 일부 부문에서는 그들을 능가하는 결실을 거두었다. 그것은 각기 나름의 이념적 체계를 갖는 천하다원론, 화이론, 자국중심론이 경쟁하며 다양한 검토와 시도를 통해 여러 부문들의 발전에 직접·간접으로 활력을 주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이들이 실사를 우선적으로 중시함을 통해 소통하며, 함께 노력한 시기에 거둔 성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