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에 기회가 생겨 윈난(雲南)을 여행했다. 오래전부터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이어서 기대가 컸다. 2005년 여름 신장(新疆, '실크로드')을 여행했던 적이 있는데, 그 후 윈난 여행에 대한 기대는 신장 여행 때의 감동이 반영된 기대감이 되었다.
신장 여행에서 끝없이 펼쳐지는 광활한 사막과 우람한 산맥을 실컷 구경할 수 있었고, 50도를 웃도는 사막 특유의 고온 건조한 날씨도 겪어 보았다.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도 눈여겨보았다. 한족과 구별되는 위구르인의 선명한 자기 정체성 인식, '외래의 타자=한족'에 의해 촉발되고 주도되는 변화=현대화(서부대개발)와 위구르인의 소외, 위구르인의 독자성 상실의 위험과 저항 등을 어렴풋하게나마 실감할 수 있었다. 이는 현재 중국이 안고 있는 소수민족 문제의 한 단면이다.
말하자면, 신장 여행을 통해 평생 경험하지 못했던 이국적인 자연환경을 몸으로 겪고, 소수민족 문제의 현장을 둘러볼 수 있었는데, 이번 윈난 여행에서도 그런 감동을 기대했던 것이다.
윈난(雲南)은 중국의 서남부, 인도차이나 반도와 접경해 있는 변경지대에 위치해 있다. "꽃구름의 남쪽(彩雲之南)" 또는 안후이(安徽) "운령(雲嶺)의 남쪽(雲嶺之南)"에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면적은 약 39만㎢로 한반도의 1.7배에 이르고, 인구는 남한 인구와 비슷한 4천5백만 정도이다. 윈난 최고의 고성인 리장(麗江)과 '이상향'으로 일컬어지는 샹그릴라(香格里拉)로 유명하다. 우리의 여행은 다리(大理), 리장, 샹그릴라, 추슝(楚雄) 등의 명승고적이나 소수민족의 풍속을 돌아보는 일정으로 짜여졌다.
신장과 대비되는 윈난의 오늘
그러나 여행 중에 본 윈난은 기대에 비해 아쉬움이 컸다. 역시 자연환경과 소수민족은 여행의 화두로 유효했으나, 신장에 비해 감흥은 적었다. 과연 자연 경관은 아름다웠으나 이색적인 느낌은 별로 없었고, 한반도 '금수강산'에 비해 더 뛰어나다고 할 수도 없었다. 특히 가옥이나 농경 목축지 등의 풍경은 이국정서를 그다지 자극하지 못했다. 지나친 상업화도 한 몫 거들었다.
소수민족의 문제는 더욱 더 선명하게 신장의 경우와 대비되었다. 윈난에는 한족 이외에 25개 소수민족이 살고 있는데, 이들이 윈난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그 중에서 이족(族), 바이족(白族), 나시족(納西族), 하니족(哈尼族), 다이족(族) 등 5개 민족이 대표적이다.
샹그릴라 지역을 여행하는 중에 20대 중반의 젊은 짱족(藏族) 청년이 우리 여행팀의 로컬 가이드를 맡았다. 원래 윈난 짱족의 본거지가 바로 샹그릴라 지역이라고 한다. 그 청년은 자기의 성을 '허(和)'라고 소개했다. 원래 성이 없던 짱족은 근대 이후에 성을 얻었는데 대개가 '허'라고 한 듯하다. 가는 곳마다 윈난 짱족 출신의 명망가는 대개 '허'씨였다.
그 청년은 우리에게 윈난의 소수민족 상황을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그런데 그의 설명을 듣자니 소수민족에 대한 정부당국의 입장을 그대로 옮기는 듯했다. 윈난의 소수민족은 자기의 독자성을 잘 유지하고 있고, 한족은 물론 소수민족 상호 간에도 아무런 갈등 없이 조화롭게 잘 지내고 있다고 강조했다. 특이하게도 덩샤오핑이 제기한 '일국양제(一國兩制)'를 침이 마르게 칭찬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 가이드 청년의 생각이 일반적인 짱족의 생각인지 묻고 싶었다. 그러나 곧 의문이 해소되었다. 그는 자신이 중국공산당의 예비 당원으로서 곧 당원이 될 것이라고 했다. 자기 아버지, 형들도 모두 당원이라고 했다.
모든 짱족이, 나아가 윈난의 소수민족이 모두 그 가이드 청년 같지는 않겠지만, 여러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기를 윈난에는 (소수)민족 갈등 같은 것은 전혀 없다고 했다. 실제 여행 중에 느낀 윈난의 소수민족은 한마디로 다민족국가 중국의 "바람직한" 구성원들이었다. 한족 중심의 국가권력이 원하는 소수민족 모델이 그대로 실현되어 있는 듯했다. 소수민족들은 복장, 풍습, 언어 등에서 그들 나름의 외피를 적당히 갖추고 있었으나, 그들의 독자성은 그것이 전부였다. 더욱이 이들의 외피는 관광 상품으로 잘 활용되고 있었다.
중국의 "바람직한" 소수민족들
물론 잠깐 만난 몇 명의 윈난 사람으로 윈난의 소수민족을 뭐라 평가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신장에서 느꼈던 위구르인의 인상과 매우 대조적인 것만은 분명하다. 정체성 상실의 위협으로 인한 긴장으로, 신장의 강렬한 태양만큼이나 이글거렸던 위구르인의 눈빛은 윈난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조금 극단적으로 말하면, 윈난의 소수민족은 마치 관광 상품화된 박제와 같다는 느낌을 주었다.
이런 차이는 어디에서 유래된 것일까? 이는 아무래도 오랜 통합과 동화의 역사가 빚은 결과인 듯하다. 멀리는 진한대(秦漢代) 이래 정치적으로 복속되기 시작해 적어도 당대(唐代) 이후에는 정치적으로 통합되었다고 볼 수 있으니, 윈난을 상대로 위구르나 티베트와 같은 차원에서 소수민족의 문제를 언급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윈난 소수민족의 역사를 보면서, 한번 복속한 이민족을 절대 놓아주지 않으면서 오랜 세월에 걸쳐 천천히 그리고 자연스럽게 통합, 동화시켜 나가는 한족의 전략을 상상했다면 지나친 것일까! 이런 과정을 통해 중국 주변의 많은 민족이 정체성을 상실했고 또 상실해 가고 있는데, 우리 민족이 그 대열에 끼지 않은 것에 대해 다행으로 생각한다면 과장된 상상일까? 중국과는 영토를 두고 어떤 형태로든 인연을 맺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 이른바 '간도 회복' 주장이 우려스럽다면 기우일까? 아무튼 중국 소수민족 문제의 다양성을 새삼 깨닫는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