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강제병합 100년을 맞아 지난 8월 11일 국회에서"일제 피해자 문제의 해법은?"을 주제로 토론회가 열렸다. 토론회에서는 일본으로 끌려가 공장에서 강제노동을 했던 양금덕 할머니(82)가 증언자로 나왔다. 일본 미쓰비시중공업이 일제 강점기에 강제노역을 했던 근로정신대 할머니 8명에게 각각 99엔의 후생연금 탈퇴수당을 지급하기로 한 결정을 두고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양금덕 할머니와'근로정신대와함께하는시민모임'이국언 사무국장(42)을 만나 이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 _ 편집자 주
간 나오토 총리가 일본의 한국 강제병합과 식민지배에 대해 사과하는 담화를 발표했다. 소감은?
양금덕 내가 지난 65년 동안을 눈물로 살았는데 부족한가보다.
이국언 한마디로 면피용에 불과하다. '한국인의 뜻에 반해 이뤄진 식민지배'니'통절한 반성'이니 하는 언어적 수사에도 불구하고 실제 내용이 하나도 없다. 기껏 각론으로 사할린 문제나 유골봉환 문제를 언급했는데 이것조차 지금까지 해오던 것을 재탕한 것에 불과하다. 백번 양보해서 강제병합에 대한 불법과 무효를 선언할 용기가 없다면, 최소한 대표적인 여성 전쟁 범죄이자 국제적인 비난을 받고 있는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이 있어야 하는데, 이것마저 없다.
이번 담화 이후에 일 정부에 기대하는 것이 있다면?
양금덕 나는 열세 살 초등학교 6학년 때 일본에 끌려가서 "천황을 위해" 열심히 피눈물 흘리면서 일한 죄밖에 없다. 65년 동안 결국은 매 맞고 배곯은 설움만 남았다. 해방 후 고향으로 돌아와서 주위 사람들이 종군'위안부'로 착각해서 마음 고생한 것을 생각하면 보상을 만배 천배 준다고 해도 내 속으로는 화해가 안 된다. 그러나 사죄하면 받아 주겠다. 서로 인간적으로 사죄가 먼저고 보상을 해줘야한다. 사죄하는 것이 도리다.
이국언 사할린 문제의 경우 '지원'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이는 본말을 전도한 것이다. 사할린 문제에서 일본정부는 현재 '우편저금 반환 소송'의 피고 신분이다. 피고인 위치에 '지원'은 무슨 지원인가. 정말 의지가 있다면, 소송으로 시간을 끌게 아니라 당장 막대한 금액의 사할린 강제징용 피해자의 우편저금을 반환해야 한다. 유골봉환 문제도 마찬가지다. 진정 의지가 있다면, 일본 전역에 흩어져 방치되고 있는 유골에 대한 사실 조사가 먼저 이뤄져야 하고, 더 늦기 전에 국가 차원에서 한국에 있는 유족들의 DNA를 채취해 유골이나마 유족에게 온전히 돌아갈 수 있는 대책에 먼저 착수해야 한다. 그것이 아니라면 귀찮은 쓰레기를 이번에 치우겠다는 것에 불과하다.
지난 7월 14일 미쓰비시중공업과 근로정신대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협의체 구성에 합의했다고 들었다. 협의체 구성은 되었는지? 이후 진행 상황이 궁금하다.
양금덕 협상을 한다고는 했지만 확답은 아직 없다. 시위도 지금 208일을 하다가 잠시 그만 둔 상태다.
이국언 본격적인 협상을 앞두고 상대가 있는 입장에서 아직 공론화하기에 어려운 점이 있다. 서로 이견이 있을 수 있고, 다소의 시간도 소요되리라 생각된다. 다만 아직 큰 차질은 없는 상태이다.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와 기업의 배상을 받기 위해 11년 동안 시위와 재판을 계속해 왔다. 어떤 계기로 이 일에 앞장서게 되었나?
이국언 2003년 오마이뉴스 기자 시절 처음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한많은 삶을 가까이에서 보게 됐다. 당시 그 어른들이 청와대에 국적 포기 신청서를 제출하러 상경투쟁을 한다는데, 오죽했으면 대한민국 국적을 포기한다고 했을까 싶었다. 3·1절과 8·15 때가 1년 중 가장 바쁘다는 말도 가슴 아픈 얘기였다. 이때만 무슨 취재거리가 없는가 하고 기자들이 찾는다는 말을 듣고 정말 마음이 좋지 않았다. 감히 그 분들의 한을 풀어 드릴 수는 없지만 하소연이라도 들어줄 사람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됐다. 그렇게 피해자들을 만나다 보니 어느 때부터인가 내게 맡겨진 하나의 책임같이 느껴지게 되었다.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은 어떻게 만들어지게 되었나? 또 어떤 활동을 하고 있는지?
이국언 2008년 11월 도쿄 최고재판소 '기각' 판결로 더 이상 사법적 구제의 길이 없어진 할머니들의 사정을 알고 부끄러움과 자책감이 많았다. 그 뒤 뜻있는 분들이 모여 2009년 3월 '시민모임'을 결성했다. 미쓰비시자동차가 광주에 전시장을 연 직후인 지난해 10월 5일부터 토요일과 일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점심시간을 이용해 1인 시위를 하고 있는데, 지난 7월 30일까지 208일 동안 1윈 시위를 했고, 참가 인원만 해도 1천7백여 명에 가깝다. 1인 시위 외에 일본정부와 미쓰비시중공업의 사죄와 배상을 촉구하는 10만 명 서명운동을 시작했다. 지난 1월부터 매주 거리 서명운동에 나서, 애초 목표를 훨씬 뛰어넘어 13만5천여명이 서명에 참여했다. 지난 6월 23일에는 일본을 방문해 미쓰비시중공업 본사와 일본 내각부에 서명용지를 전했더니 깜짝 놀라더라.
현재 전국에서 근로정신대 피해자로 확인된 사람들은 얼마나 되는가?
이국언 정확한 자료는 없고 다만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등 지원위원회' 직권조사 보고서를 통해 추산하자면,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 항공기제작소 300여명, 도야마 후지코시 회사 1089명, 도쿄 아시이토 누마즈 공장 300명 정도로 추산된다. 물론 이 수치는 국외 피해자의 경우이다.
지난 8월 2일 서울 일본 대사관 앞에서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의 '후생연금 탈퇴수당 99엔 심사 청구' 기각 규탄 기자회견을 열었었다. 후생연금 청구부터 소송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어땠나?
양금덕 처음에 청구소송은 일본 변호사가 와서 했다. 일본에 2월에 가서 99엔을 책상에 던져주고 왔다. "내가 고맙다고 할 줄 알았냐. 99엔을 어디다 쓰냐고 얼굴 좀 보자"고 항의했다.
이국언 미쓰비시 근로정신대 원고들이 일본정부와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소송을 시작한 것은 1999년 3월인데, 강제노역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자료 중 하나가 바로 당시 후생연금에 가입했던 기록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1998년 후생노동성 사회보험청에 사실 확인을 요청했는데, 2009년 9월에야 가입사실을 통보해왔다. 액수를 떠나 정당한 권리를 찾기 위해 탈퇴수당금을 달라고 신청했는데, 그게 바로 자장면 반 그릇도 안 되는 99엔, 한화로 약 1,300원에 불과한 돈이다. 지난해 1월 이의신청을 했는데, 올 7월 다시 기각 결정을 내렸다. 화폐가치를 반영토록 하는 규정이 없다는 이유인데, 오히려 묻고 싶다. 초등학교 6학년 나이 어린 소녀들을 끌고 가 강제노역 시킨 것은 무슨 법이 있어서 그런 것이냐고.
일본 내에 이 소송과 관련하여 도움을 주고 있는 지원 단체나 개인들과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어떤 도움을 주고 있는가? 각별히 고마움을 표하고 싶은 분이 있다면?
양금덕 도움을 주고 있는 일본 시민들이 1만2~3천명 정도 된다. 공항까지 나와서 환영도 하고, 전송도 하고, 여비도 주고, 숙식을 모두 해결해준다. 그들이 소송도 먼저 시작을 했고, 협상 지원도 열정적으로 해주고 있다. 지난 2월에 허리를 다쳐서 고생을 했는데 일본 분들이 약도 사다 주고, 약 사 먹으라고 20만 엔을 주기도 했다. 너무나 고맙다.
이국언 일본의 양심적 시민그룹인 '나고야 미쓰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 지원회'의 힘이 절대적이었다. 이 분들은 10년에 걸친 재판 기간 동안 무료 변론은 물론, 증인 심문을 받기 위해 일본을 방문하는 원고 할머니들의 체류비는 물론 항공료까지 일체의 비용을 모두 지원해 왔다. 뿐만 아니라, 2007년 7월부터 지난 7월까지 무려 만 3년 동안 도쿄 원정 금요시위를 해 오고 있다.
불행한 역사에도 불구 한·일간에는 문화교류를 비롯해 어느 때보다도 가깝게 잘 지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후손들에게 물려주고 싶은 바람직한 한·일의 미래는 어떤 것인가.
양금덕 과거의 역사는 불행했지만 한·일 간의 관계가 앞으로는 달라질 수 있다고 본다. 일본에서 먼저 요청을 해서한국 학생들 12명이 일본에 간다. 앞으로 화해가 되면 서로 이웃나라로 웃음으로 살기를 바란다.
이국언 반일도 극일도 넘어서야 한다고 본다. 다시는 이런 전쟁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반전 평화의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지난 역사의 과오와 잘못을 올바로 바로 잡는 노력은 매우 중요하다. 침략과 전쟁을 통해서는 결코 그 어떠한 것도 이득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역사적 교훈으로 남겨야, 다시는 침략과 전쟁을 꿈꾸지 못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한·일 양국의 시민들은 국적을 뛰어넘어 반전 평화를 위해 서로 연대해야 한다.
앞으로의 계획은?
양금덕 보상이 되면 아버지 어머니 이름으로 무덤에 비석을 세워서 술 한 잔 올리고 싶다. 그리고 시민들을 위해 학생들에게는 학비를 대주고, 시민들에게는 쌀이라도 사주고 싶다. 너무나 고맙다. 나는 이 싸움을 계속할 것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나는 쉬지 않고 할 것이다. 나 하나를 위해 이렇게 도움을 주는 분들을 위해서라도 계속해서 싸울 것이다.
양금덕
13살 때 중학교에 보내준다는 담임선생님의 말에 속아 일본 나고야 미쓰비시중공업 공장으로 끌려갔다.
1999년 일본 정부와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근로정신대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으나 11년만인 2008년 도쿄 최고재판소로부터 기각 판결을 받고, 이후 소송 결과 99엔의 후생연금탈퇴수당 지급이라는 어이없는 결과를 받았다, 그러나 이에 포기하지 않고 서울과 광주 등지 미쓰비시 자동차전시장 앞에서 금요시위를 진행 중이다.
이국언
광주 전남 오마이뉴스 기자, 시민의 소리 기자 역임.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아픔과 증언을 담은 《빼앗긴 청춘, 돌아오지 않는 원혼 : 일제 강제동원 광주 전남 피해자들의 증언》 저술. '근로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사무국장으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