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에 실린 글들은 본래'일제시기 북방사 인식'이라고 하는 주제 하에 수행된 공동연구의 산물이다. 총론으로서 이른바 만선사관을 다루고, 각론으로 일본인, 한국인 학자들의 고구려사 인식, 발해사 인식 및 고구려·발해의 유적과 유물에 대한 조사와 연구를 정리하는 것으로 계획을 잡았다. 그런데 공동연구를 진행하면서 연구자들은 위의 주제들이 평면적이라는데 동의했다. 그리하여 일제시기 북방사 인식의 특징을 한국사와 관련하여서는 만선사, 중국사와 관련하여서는 만주사 혹은 만몽사에 있다고 보고, 이를 연구하기로 내용을 바꾸게 되었다. 단 고구려·발해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와 연구에 대한 정리는 그대로 두기로 했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20세기를 전후하여 본격화된 일본 동양사 연구자들의 조선과 만주에 대한 연구는 제국주의 일본의 조선 침략과 만주 침략에 동반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대륙 혹은 일본의 조선에 대한 영향을 강조하면서 조선사의 자율성을 부정하는 경향이 강했다. 또 만주와 몽고를 중국과 별개의 지역으로 간주하여 만주사 혹은 만몽사를 설정함으로써 이들 지역의 역사를 중국사와 분리하려고 했다. 중국에서는 이에 대항하여 이들 지역의 역사가 원시시대 이래 중국사의 일부였음을 주장하는 이른바 동북사의 개념이 나타나게 되었고, 이에 대한 제국주의적 입장의 반론도 제기되었다. 이 책은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거니와, 그 각론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나바 이와키치에서 최남선까지
사쿠라자와 아이(櫻澤亞伊, 일본 니가타대학교 박사과정)는"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의'만선사불가분론(滿鮮不可分論)'"에서 만선사관을 대표하는 인물로 알려져 있는 이나바의 만선사 인식을 다루었다. 이나바의 논저를 검토해보면'만주'와'조선'의 깊은 관계성을 논지의 바탕으로 하고 있더라도'만주'와'조선'을 하나의 역사권으로 설정한'만선사'체계를 가지고 연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지 의심스럽다는 문제를 제기했다. 이나바의 주장은 결국 제국주의 일본의 만주 침략을 역사적으로 뒷받침하려는 것이었으며, 따라서 그것은"그릇된 정치적 목적에 맹종·영합하여 임시변통의 한국사상을 만들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하타다 다카시)에 지나지 않는다고 평가했다.
이정빈(육군사관학교 강사)은"미시나 쇼에이(三品彰英)의 문화경역 연구와 만선사 인식"에서 조선사의 반도적 성격을 강조하면서 그 타율성에 주목했던 것으로 유명한 미시나 쇼에이의 조선사 인식을 다루었다. 이에 따르면 미시나는 이나바 이와키치와는 달리 만주사와 조선사를 구분하고, 조선반도의 북부는 만주사에, 남부는 조선사에 속한다고 보아 만선사 체계를 부정했다고 한다. 이는 동아시아의문화 경역에 대한 자신의 연구에 기반 한 것으로, 고대 일본의 이른바 남선경영을 염두에 두고, 일본을 중심으로 하고 조선을 주변으로 하는 문화경역을 구상했다고 한다. 그런데 후에는 역사 해석의'현재주의적 관점'을 원용해서 일본의 만주 지배를 인정하면서 만선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고, 만선사의 가능성을 말하기도 했다고 하는데, 이는 일본제국사의 일부로서 만선사를 구상하였던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강성봉(성균관대학교 강사)은"1930~40년대 중국 지식인의'동북지역사'인식-푸쓰넨(傅斯年)과 진위푸(金毓)를 중심으로"에서 1931년 이른바 만주사변의 발발과 뒤이은 만주국의 성립으로 일제의 대륙침략이 본격화되면서 반식민지적 위기에 처한 중국에서 만주지역을'만주족의 땅'이라는 전통적 관념으로부터 주권국가 영토의 일부, 즉 '변강(邊疆)'이란 개념으로 새롭게 인식하기 시작하였음을 주목했다. 당시 중국의 역사학자들과 고고학자들은 중국의 동북지방이 역사의 여명기부터 영토상 중국의 완전한 일부였다는 것을 강조하며, 만주사 혹은 만몽사 연구를 비판하였는데, 그들의 인식이 한국 고대사의 일부를 중국사에 편입하려고 하는'동북공정'의 한국사 인식과도 맥이 닿을 수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식민주의적 역사인식의 부정적 유산을 곱씹다
위에서 살펴 본 중국학자들의 동북사 연구에 대해서는 야노 진이치(矢野仁一)를 비롯한 일본학자들의 반론이 있었는데, 식민지 출신의 최남선도 이에 동조했다. 조인성(경희대 교수)은"최남선의 만몽문화론"에서 그가 만주 건국대학교에서 행한 강의의 강의록이라고 하는《만몽문화(滿蒙文化)》를 중심으로 최남선의 만몽사 인식을 살펴보았다. 최남선은 푸쓰넨과는 달리 만몽지역이 신석기시대부터 지리적·민족적으로 중국과 구별됨을 강조하였는데, 만몽지역과 그 문화의 독자성을 드러냄으로써 결국 만주국 성립의 근거를 제시하려고 하였던 것으로 파악했다. 또 북방민족과 그 문화가 중국인과 그 문화에 미친 영향을 강조하였는데, 이로써 중국인과 그 문화의 독창성은 몰각된 반면 북방민족의 중국에 대한 연고는 강조되었으며, 결국 이는 제국주의 일본의 중국 침략에 대한 역사적 근거의 일부가 될 수 있는 것이었음을 지적했다.
양시은(서울대학교 박물관 학예사)은"일본의 고구려·발해 유적조사에 대한 검토 : 1945년 이전까지"에서 19세기 후반부터 1945년 일본이 패전하기까지 고구려와 발해의 유적에 대한 일본인 연구자들의 조사를 정리했다. 이는 유적 조사의 배경이나 결과가 당시 일본이 조선 또는 중국 만주 일대에 대한 소위 식민주의 사학을 펼쳐나가는 밑바탕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전반적으로 다룬 연구가 없다는 문제의식에서 촉발된 것이었다. 이에 따르면 유적조사는 일본의 정치적 목적 하에 정책적으로 진행되었으며, 매우 이른 시기부터 사전조사가 이루어지는등 식민지화를 위한 철저한 준비가 있었다고 한다.
공동 연구를 진행하면서 필자는 제국주의적 혹은 식민주의적 역사인식의 문제점은 물론 그 부정적 유산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가령 1930년대 등장한 동북사에서부터 동북지역에 존재하였던 민족과 그 역사를 중국사의 일부라고 간주하는 인식이 시작되었다. 이 점에서'동북공정'의 한국 고대사 인식의 근원을 여기에서 찾기도 하는데, 자구적인 차원에서 비롯된 것이 지금에 와서는 오히려 제국주의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는 점은 우리 학계나 사회에도 시사 하는 바가 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