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해 2010년을 보내면서, 결코 보낼 수 없는 2010년의 "거사"를 생각한다. '강제병합 100년 한일지식인 공동선언'을 두고 하는 말이다. 한일 두 나라의 역사학자를 중심으로 지식인 1천여 명이 1910년의 강제 '병합'의 원천 무효를 공동으로 선언한 것은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라 할 만하다.
우리는 이 문제가 한일과거사문제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을사보호조약에서 정미7조약을 거쳐 경술 '병합'조약에 이르는 일련의 조약들이 불법무효화가 아니라면 일제의 식민지지배는 합법적인 것이 되고 정당성을 갖게 되며, 위안부문제는 합법적이고 정당한 통치과정에 생긴 "실수" 혹은 "필요악" 정도가 되며, 독립운동은 불법적이고 부당한 행위로 떨어지게 된다.
그렇다면 일본은 과거사에 대해서 무엇을 사과해야 하는가. 식민통치는 합법이고 다만 방법의 횡포성에 대해서만 사과-지금까지 일본의 사과는 그런 것 이었다-하는 이제까지의 행태를 깨자는 것이다.
지난해, 매달려 있던 안중근의 동양평화론 논문을 끝내면서 "거사" 에 뛰어 들기로 마음먹었다. 국내에는 이태진 교수, 일본에서는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교수를 비롯한 한일의 연구자들이 이 문제를 제기하고 있었다. 필자는 비교적 이른 1990년을 전후한 시기에 이 문제에 대하여 논문과 칼럼 5~6편 쓴 적이 있다. 이제껏 몇몇 연구자의 학술연구 수준에서 언급되던 것을 역사적 의미를 갖는 "거사" 수준으로 옮겨 보자는 데 우리는 합의 하였다.
안중근, 강제병합 100년 한일 지식인 선언에 영감을 주다
필자는 안중근에 관한 논문을 쓰면서 그가 이토 히로부미 중심의 침략 노선과 대립하는 "동양평화"라는 비전을 세우고 그 전선에 중국인이나 서양인은 물론 일본 시민까지 폭 넓게 끌어들이려 했고, 그 대열의 선두에서 장엄하게 죽음을 택했음을 깨달았다.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을 연구하는 동안 필자는 논문만 쓰지 말고 행동에 나서야 한다는 충동을 느꼈다.
사실 필자는 중국의 패권주의화 또는 아세아의 중국화 문제를 주목하고 있고 패권 질서를 막기 위해서는 과거 일본의 패권주의 유산을 청산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구한말 일본이 강요하여 맺은 여러 조약의 무효선언은 일본의 근대성의 표현 내지 시민사회의 성숙성의 표현이며 과거의 패권주의 유산을 청산하여 '시빌(Civil) 아시아'를 확립하는 첩경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안중근 관련 논문 집필을 마치던 날 도쿄의 와다 하루키로 교수에게 전화하고 지금까지 70평생 잘 먹고 잘 산 밥값이나 하자는 기분으로 "거사"에 뛰어 들었다.
일차적으로 각각 100여명의 서명을 받아 5월 10일, 서울과 도쿄에서 선언을 발표를 하였다. 한국에서는 보수 진보를 묻지 않고 대표적인 지식인들이 서명에 동참했다. 아무리 명분 있는 일이라도 진보 쪽에서 추진하면 보수 쪽에, 보수 쪽에서 하면 진보가 외면하는 그간의 관행을 깬 것이다. 모두가 사심 없이 뛴 결과다. 독립기념관이나 백범기념관에서 발표하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민족주의의 발로라는 인상보다는 "열린 국제주의" "열린 '시빌 아시아'" 라는 인상이 중요하다는 생각에서 프레스센터를 이용하기로 하였다.
언론에 크게 보도되었다. 감동적인 호응이 일었다. 일본 언론은 냉담하여 퍽 대조적이었다. 그러나 한국의 대대적인 보도와 여론이 일본정부를 압박하여 간 나오토 수상 담화에 영향을 끼쳤음이 틀림없다.
'시빌 아시아'의 하늘을 여는 날 까지 "거사"는 계속된다
도쿄에서 기자회견을 할 때 한 기자가 "역사학자들의 뜻이 현실 정치를 움직일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필자는 "서명한 지식인의 약 2/3가 역사학자들이다. 역사적 실체에 밝은 전공 연구자들이 대거 서명 한 것은 강 상류의 흐름이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얼마 전 한일역사공동위원회에서는 이 문제를 거론하는 것조차 어려웠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이번에는 역사공동위원회에 참가했던 많은 이들과, 서명에 참여하지 않으리라고 예상했던, 다소 보수적인 성향의 역사학자들도 많이 참여 했다. 놀라운 일이 아닌가? 한국의 시인 이육사의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라는 싯구가 생각난다. 역사학자들이 상류의 흐름을 바꿔 놓았다면 하류의 정치가들의 흐름이 바뀌는 것은 시간 문제가 아니겠는가"라고 답했다.
최근 동아일보-아사히신문 공동 좌담회에서 양측 참여자 사이에 신랄한 논쟁이 있었다. 서명에 참여하지 않았던 일본 측 두 "거물" 지식인은 간 나오토 수상 담화 그 이상을 요구하면 일본 여론의 반발로 오히려 문제를 악화 시킬 수 있다며 공동선언의 논리를 비판했다. 한국 측 참여자들은, 여론을 상수로 보지 않고 변수로 보는데에 지식인의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냐고 반론 하였다. 어떤 이는 당시 일본 쪽 조약추진과정의 미숙성 때문에 생긴 약간의 문제점 때문에 불법이라고 한다면, 더욱 강제적으로 더욱 정교하게 추진하여 실수가 없었더라면 합법이냐고도 물었다. 이에 불법개념은 조약 절차상의 결함도 포함한 강제성 그 자체로 보아야 하고 침략이나 식민지 그 자체로 보아야 한다고 답하였다. 또 어떤 이는 배상문제를 감당할 수 없다고 하기에, 그 점은 중국이 일본을 감동시켰듯이 한국이 일본을 감동시킬 수 있어 오히려 감동연쇄가 '시빌 아시아'를 여는 큰 자산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벽을 느꼈다. 그 벽 때문에 한국의 일부 신문에서도 일본 정부의 '병합'조약 무효선언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지레 후퇴하는 칼럼들을 실었다. 안될 때 안 되더라도 최후까지 정론을 펴 일본정부를 압박하여야 할 텐데 미리 타협논리를 펴 일본정부의 미지근한 발언의 길을 터준 격이다. 국회는 왜 정식 국회결의로 일본 정부에 요구하지 못 했을까? 한일 양국의 타협 노선 "동맹" 앞에 우리의 발걸음은 잠시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일 지식인 1천여 명이 합의하여 일으킨 역사의 천둥소리는 울렸고 그 천둥소리가 한일 100년의 먹구름을 걷고 '시빌 아시아'의 푸른 하늘을 여는 날 까지 우리의 "거사"는 계속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