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는 동북아역사재단의 2009년도 동북공정 대응 및 한중역사문제 연구과제 지원사업의 하나로 "중국 번속이론 극복연구"를 주제로 하여 기획되었다. 중국사의 각 시대를 전공한 전공자들이 최근 중국에서 전개되고 있는 번속 개념과 이론, 제도적 구성 등을 중점으로 하여 각자 나름의 분석틀과 시각에 의해 접근 비판하였다. 전체적으로 번속제도이론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주된 논지로 하였으며, 개별적 검토 비판과 나름의 대안을 모색한 것이 본 연구의 특징이다.
1990년대 이후 중국에서 번속개념과 번속이론이 제기되었는데, 간단하게 언급하자면 중국의 책봉을 받은 지방정권과 조공국 등은 모두 중국의 속국이었다는 단순한 논리이다. 본 연구는 그동안의 중국 번속이론의 총집결이라 할 수 있는 리다룽(李大龍)의 《한당번속체연구》와 황쑹쥔(黃松筠)의 《중국고대번속제도연구》를 중심으로 중국의 번속이론을 검토 분석하고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도로 이루어졌다.
중국의 번속제도와 이론에 대한 연구는, 그 제도의 확립과 운용의 결과 현재 중국의 영토와 민족이 형성되었다고 보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이러한 연구는 중국의 역사가 한족과 중원왕조의 역사 뿐 만 아니라 변경국가와 변경민족의 역사의 총합체이며, 그 결과 현재 중국이 통일적 다민족국가가 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확인하기 위한 작업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 본 연구를 계기로 번속이론을 근거로 한 중국의 일방적인 한중관계 인식논리를 극복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점에서 그 의의를 둘 수 있을 것이다.
번속제도 이론은 서주의 봉국(封國), 복국(服國)에서 기원하였으며 한대(漢代)에 이르러 번속제도로 확립되었다고 하였다. 서주의 봉국, 복국과 양한의 제후왕국과 속국, 위진남북조의 도호관(都護官)제도 등이 그 과정에서 나타난 번속제도의 실체들이며, 이 제도들은 모두 하나의 원리에 의해서 실시되었으며, 시대적으로 다른 모습으로 각 시대에 맞게 수정되어 시간이 갈수록 완전한 상태로 완비되어, 가장 최종적인 전제국가인 명청제국시대에 가장 완성된 제도로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중국 자료만 이용, 중립성 객관성 결여
이러한 중국의 번속제도 이론에 대해 첫째, '중국 중심의 사고'를 바탕으로 힘의 논리를 합리화함으로써, 중국의 역대왕조가 '폐권주의'를 지향해 왔음을 공공연히 드러내고 있다고 비판한다. 둘째, 중국 왕조와 변경민족, 주변국 간의 책봉조공 관계의 성립을 번속관계 성립의 지표로 삼아 이것을 지배와 예속의 관계로 규정하고 있다. 즉, 번속이론은 쌍방의 상호관계 속에서 성립되어야 할 책봉조공의 규명에서, 중국의 자료만을 이용하여 일방적 측면만 강조함으로써 학문연구의 객관성과 상호성 중립성을 전혀 갖추지 못한 결점을 갖고 있다고 지적한다.
셋째, 황쑹쥔의 경우, 가장 큰 오류는 잘못된 용어와 전제를 바탕으로 청대와 그 이전시대의 번속제도를 규정 서술하고 있다. 청대의 번속은 이전 시대와 달리 번부(藩部)와 속국(屬國)을 합친 것인데, 번부는 청대에 이르러 비로소 등장한 용어이다. 즉 청대에 처음 등장한 제도를 이용해서 과거의 번속제도와 개념을 규정하였다. 이처럼 다른 내용을 가진 청대의 번속을 그 이전 시대와 같은 의미로 사용하게 되면 당시의 상황을 제대로 전달하기 어렵다고 비판하고 있다.
넷째, 황쑹쥔이 제시한 중국 번속제도의 주요 특징 중에는 민족자치와 지방자치, 일조양제(一朝兩制)가 있다. 하지만 이러한 개념들은 현대 중국의 정치적 상황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는데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였다. 민족자치는 중원왕조가 변경지역을 통치할 힘이 없을 때 부득이 하게 해당지역의 수령에게 통치를 위임한 것이었다고 한다. 중국학자들이 말하는 번속이론은 중원왕조의 통치력이 미치지 못했던 것을 민족자치와 지방자치라는 교묘한 말로 포장하고 있고, 일조양제의 경우도, 마치 시혜를 베풀었다는 듯이 서술하고 있으며, 이런 점이 중화민족의 형성에 적극적 작용을 했다고 기계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 뿐 아니라 번속이론에서는 중원왕조와 이민족 왕조 사이에 일어났던 수많은 갈등과 상호 침략 투쟁에 관한 사실은 거론하지 않은 체, 일방적이고 편향적인 서술을 반복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번속제도 이론에 의하면 고구려가 중국의 속국, 지방정권으로 규정될 뿐만 아니라 고려와 조선까지도 중국 속국의 범주로 포함된다. 즉 과거의 고구려나 발해를 중국의 지방정권으로 규정하는데 머무르지 않고 고려 조선까지도 현재의 식민지 개념으로 오해할 할 수 있는 속국개념으로 규정하는 것은 역사적 오류를 넘어 민족적 수치감까지 불러일으킬 수 있는 심각한 몰역사적 개념규정이다.
동아시아 국제관계 속 총합적 연구 필요
본 연구는 중국의 번속이론 비판과 극복을 주제로 하여 고대에서 청대에 이르는 중국의 번속이론과 제도에 대한 전반적인 분석과 비판을 시도하였다. 하지만 연구기간 등의 제약으로 구체적 대응논리 개발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향후 개별 연구 등을 통해 보다 철저한 이론적 검토와 몰역사성을 밝히는데 주력해야 할 것이다.
올바른 과거상의 정립은 통시적으로 함께 이해할 수 없는 각 시대의 독특한 역사성을 전제로 해야 한다. 그럼에도 이 번속제도이론과 같이 무분별하게 각 시대별로 적용한다면 자칫 역사를 이론의 굴레에 빠뜨리는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 역사연구에서 이론의 개발과 적용이 무시될 수 없지만 무엇보다 각 시대의 역사성의 정확한 인식이 더욱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중국에서 번속제도 이론이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구상 하에 이루어지고 전개되고 있는 만큼 우리학계에서도 이와 관련한 총합적 연구가 필요하다. 따라서 번속제도 이론과 관련하여 한중관계사를 포함한 동아시아 국제관계에 대한 전체상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진다면 보다 심화된 연구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