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제4회 역사NGO세계대회를 준비하기 위한 '아젠다 개발회의'에 참석한 오다가와 고(小田川 興) 와세다대학 객원교수의 발표문 "강제병합100년 한일시민공동선언대회 평가 : 한국과 일본 시민사회의 식민주의 극복을 위한 노력"을 요약하여 개재합니다. 지난 호(2010.12월호)에 실린 김영호 유한대 총장의 글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와 함께 2010년의 가장 귀한 한일 두 나라 시민사회의 결실인 '지식인 공동선언'에 대한 평가와 전망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_ 편집자 주
2010년은 한일국교가 정상화된 지 45년이 되는 해이다. 양국관계는 "한류 열풍"과 경제관계 확대로 매년 왕래하는 사람만 한 해 500만 명이나 된다. 다른 한편으로 독도 문제나 역사교과서 문제에 불이 붙으면 교류가 일시적으로 멈추는 위험한 관계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그 배경에는 국교를 수립한 지 반세기 가까이 지났지만 한일 간에는 "성숙한 시민사회의 고리"가 아직까지도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본군'위안부'(원문에는 일본에서 통용하고 있는 '종군위안부'로 표현하고 있으나 여기서는 일본군'위안부'로 옮김) 문제를 예로 들자면, 본질이 보일 것이다. 냉전 시기에 구소련이나 중국에 대항하여 미국을 주축으로 하는 반공동맹을 형성한 한국과 일본은 광복 전에 일제의 침략에 도움을 줬거나, 반공 이념이 강한 쌍방 지배층의 유착으로 식민지 지배라는 "부정적 유산"에 뚜껑을 덮어버리고 결속을 다졌다. 그러나 냉전이 끝난 후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 1991년 8월 서울에서, 고 김학순씨가 처음으로 일본군'위안부'였음을 공개했다. 이 시기에 독재정권을 물리치고 민주화로 나아가던 한국사회에서 위안부 문제는 계속 억압을 받아왔던 식민지 피해자의 인권회복을 묻는 "시민의 힘"을 상징하게 되었다.
한국의 시민사회는 중산층의 정치참여가 뒷받침되면서 급속도로 힘을 키웠다. 본격적인 민주화를 실현한 김대중 정부에서 산업자원부 장관을 지낸 김영호 총장(유한대)이 "Civil Asia"를 구호로 내걸고 "아시아시민공동체"를 주장한 것은 경제성장을 발판 삼아 큰 틀을 구상할 수 있게 된 한국시민사회의 메시지였다. 2009년 12월 18일, 김영호 총장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이와나미(岩波)서점에서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도쿄대학 명예교수, 오카모토 아츠시(岡本厚) <세계> 편집장과의 협의에 참가한 필자는, 김영호 총장의 진지한 제언에서 "역사의 흐름"을 목격했다.
한일의 차이에서 알 수 있는 것
한일 지식인 공동선언 서명자들은 한국에서는 보수에서 진보까지 다양했다. 주요 신문의 사장이나 주필 등 현직 언론사 간부들의 이름도 있었다. 반면, 일본에서는 보수파의 서명은 처음부터 기대할 수 없었으며, 현직 거대 미디어의 간부도 서명을 거부했다. 두 나라 사이에 여전히 넓은 골이 있음을 상징하고 있다. 동시에 일본에서 진보와 보수의 깊은 균열도 드러났다. 다만, 한일 정상이 합의하여 진행했던 제1기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의 좌장이었던 미타니 다이치로(三谷太一郞)와 조동걸 교수가 서명했다는 점은 주목할만 하다.
일본에서 유의할 점은 병합을 시대적 상황의 산물로 당연하게 생각하고, 그 부당함에 눈을 감는 뿌리 깊은 보수층의 존재다. 더 말하자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한국을 경시하는 교육 때문에 일본인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 속에 숨어 있는 차별의식도 깨달아야 한다.
또한 한일 사회개방의 정도나 상생 사회에 대한 의식의 차이가 선언에도 반영되고 있다. 한국에서는 개방된 국제적인 메시지가 되도록 하기 위해 장소도 서울 프레스센터를 선택했다고 한다. 지난 7월에 열린 일본 기자회견에서 연합통신 기자가 일본에서는 선언에 대한 지지가 많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데, 왜냐고 질문했다. 최대의 원인은 일본이 아직까지 세계를 향해 '열려 있지 않은 사회'라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선언은 식민지 피해에 관하여 "죄는 용서를 빌지 않으면 안되고, 용서는 베풀어야 한다. 고통은 치유해야 하고, 손해는 갚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필자는 용서나 보상의 주어가 없기 때문에 "아름다운 말"만 있고 행동이 따르지 않을 것 같은 걱정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이 선언이 식민지 피해자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 것인가 하는 점이 중요하다. "식민지 지배로 실제 피해를 받은 사람들에게 '미안하다'는 말만으로 충분할까? 어떤 행동으로 보상할 것인가?"하는 엄격한 질문이 한국 측에서 나올 것은 분명하다. 지식인이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선언을 작성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는 비판을 예상했다.
피해자의 마음에 와 닿는 사과와 보상을
필자는 아사히신문 기자 시절인 1968년부터 히로시마, 나가사키에서 피폭당한 후 귀국하여 한국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피폭자들을 취재한 뒤 한국인 피폭자 원호활동에 참여해 왔다. 그 동안 만난 피폭자의 대다수는 일본정부에 대한 원한을 품은 채 돌아가셨다.
일본군'위안부'였다는 고통스런 증언을 처음으로 한 고 김학순씨의 얼굴, 최근 나눔의 집에서 만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모습을 떠올린다. 이러한 상황을 직지하고 필자는 식민지 피해 해결을 위한 구체적인 제언을 포함시킬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번 선언이 현실의 과제 해결에 깊게 관여할 수 없었던 배경 중 하나에는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의 좌절도 한몫을 했다. 무라야마 총리의 담화를 토대로 시작한 이 기금은 한국에서는 실패했다. 자민당, 사회당, 신당 사키가케의 3당 연립정권의 수반이었던 사회당 당수가 총리를 할 때 빨리 구제해야 한다면서 졸속으로 진행했기 때문에, "진정한 국가 보상이 아닌, 국민기금으로 대신하는 돈은 받지 않겠다"는 할머니들로부터 거절 당한 것이다. 한편, 일부에서는 보상금을 받은 사람도 있어서 같은 피해자였던 할머니들 사이에서도 깊은 균열을 만들어버렸다.
총리의 편지도 함께 보낸 보상금 사업은 왜 실패했는가?
할머니들의 마음에 와 닿는 보상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고통스러운 교훈을 살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유감스럽게도 내 의견에 공감 해준 발기인은 적었다. 그러나 서명 참여를 그만두지 않았다. "100년"인 지금, 가능한 한 많은 일본 지식인들이 작은 차이를 버리고 큰 흐름에 참여하여, 병합이 잘못되었다는 점을 크게 알리고, 정부의 시책이나 국회의 전후보상 입법을 서두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뜻 있는 사람들이 모여 전후보상 문제에 대해서 토론회나 세미나를 열기로 계획을 세웠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준비가 가능해졌다.
한일 지식인선언을 '한일시민의 공공재'로 삼자
8월 10일 간 나오토(菅直人) 총리는 담화를 발표하여 한국 사람들이 "그 뜻과 달리 이루어진 식민지 지배로 국가와 문화를 빼앗기고, 민족의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받았다"고 말하고, "식민지 지배로 생긴 많은 손해와 고통에 대해 여기서 새로이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 사과를 표한다"고 말했다.
뒷부분은 전후 50년이었던 1995년 무라야마 총리 담화, 2002년 고이즈미 총리가 북한을 방문했을 때 했던 북일 평양 선언을 답습한 것이지만, 앞 부분은 그것보다 한 발 앞선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총리 담화에 대해 일본에서는 "한 발 전진"(와다씨)이라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지난 7월, 한국 측 공동선언 발기인인 김영호 총장, 이태진 서울대학 명예교수 등 4명은 아라이 사토시(荒井聰) 중의원 의원(당시 국가전략담당 장관)을 비롯한 민주당 의원들을 방문하여, 간 총리 담화에 "병합조약무효"를 포함해줄 것을 요청했다. 김영호 총장은 "무라야마 담화를 뛰어 넘는 총리담화가 나온다면, 한일 사이에 '감동의 고리'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역설했지만 그런 기대는 이뤄지지 않았다. 한국 측은 "반 발만 전진"했다는 평가지만, 걱정했던 것처럼 더 엄한 목소리도 나왔다.
일본 민주당에서는 뜻 있는 의원들이 전후보상을 생각하는 의원연맹을 결성했다. 일본 사회가 보수회귀로 표류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민주당 정부에게 바라는 것은 피해자의 입장을 배려한 구제책을 제시했으면 하는 점이다. 그것을 통하여 동아시아 공동체의 핵심인 '시민공동체'들을 잇는 '감동의 고리'를 만들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공동체의 고리에는 북한도 포함시켜야 한다. 그 곳에도 전후 반세기 이상 계속 어떤 보상도 받지 못한 많은 '병합' 피해자가 있다. 무엇보다 동아시아 공동체의 구축에는 북한과 그 민중이 반드시 참여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번 선언은 첫 발에 불과하다. 일본군'위안부'였던 할머니와 같은 식민지배 피해자의 아픔을 감싸는 협동과 상생의 체제를 만드는 노력을 거듭함으로써, 한일 지식인 선언을 '한일시민의 공공재'로 만들어 가는 것이 역사에 대한 한일 지식인의 책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