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29일 터키의 최대도시 이스탄불(Istanbul)에서는 "영원한 삶, 한국의 고대왕국 고구려 고분벽화전"이라는 제목의 뜻 깊은 전시회가 열렸다. 아시아와 유럽대륙을 가르는 보스포러스해협의 남쪽에 위치한 이스탄불은 그리스시대에는 비잔티움, 동로마제국시대에는 콘스탄티노플로 불린 역사적인 도시이다. 이처럼 아시아와 유럽에 걸친 역사적인 도시에서 한때 동아시아의 대국이었던 고구려의 고분벽화를 전시하게 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동북아역사재단에서는 다양한 해외전시로 고구려 문화를 알리는 사업을 계속해 왔다. 지난해부터는 '몽골-투르크벨트 전시회'를 열었다. 이 전시회는 과거 고구려와 함께 동북아시아와 중앙아시아 대륙을 무대로 활동했던 여러 나라에 고구려의 문화를 알리고자하는 것으로 몽골, 카자흐스탄, 키르기즈스탄, 우즈베키스탄, 이란, 터키 등 6개국 순회전시로 기획되었다. 지난해에는 몽골국립박물관과 카자흐스탄대통령문화센터, 키르기즈스탄의 수도 비슈케크에서 전시회를 개최하였다. 금년에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이란과 우즈베키스탄 전시회는 취소되었지만 재단과 터키한인회 등의 노력으로 터키 이스탄불에서 전시회를 개최하게 된 것이다.
한국을 형제의 나라로 부르는 터키 사람들은 우리에게는 돌궐(突厥; türk의 한자식 표현)이라는 이름으로 익숙한 투르크족의 후예이다. 서기 6세기 중엽 중앙아시아 초원의 유목제국 유연(柔然)을 무너뜨리고 강자로 등장한 돌궐은 한때 고구려와 대립과 갈등을 겪기도 하였으나, 7세기부터는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통일된 중원왕조 수·당의 위협에 함께 대응하였다. 이후 돌궐은 동서로 분리되었으며, 나중에 서쪽으로 이동한 셀주크투르크는 1299년에 오늘날 터키의 전신인 오스만 투르크제국을 건설하여 대제국으로 성장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고려하여'몽골-투르크벨트 전시'의 마지막 장소를 터키의 이스탄불로 선정하였으며, 현지의 반응은 예상보다도 훨씬 뜨거웠다.
예상을 뛰어넘는 뜨거운 반응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이번 전시도 고구려 고분벽화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알다시피 고구려 고분벽화는 고구려 사람들의 생활과 문화, 과학기술, 정신세계 등이 고스란히 담긴 예술품이자 기록유산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을 견디지 못하고 조금씩 훼손되고 있으며, 일부 벽화는 맨눈으로는 원래 모습을 확인하기 어려울 정도다. 이에 동북아역사재단에서는 고구려 고분벽화를 디지털로 복원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으며, 덕흥리고분벽화와 강서대묘의 복원사업을 완료하였다.
이번 이스탄불전시에서는 바로 재단에서 디지털기술로 복원한 덕흥리고분벽화와 강서대묘 벽화를 1층에 전시하였다. 서기 408년에 만들어진 덕흥리고분벽화는 널길과 앞방, 이음길, 널방으로 이루어진 흙무지돌방무덤이다. 무덤에는 주인공 진(鎭)이 고구려 장군직과 태수직을 두루 지낸 인물로 77세에 죽었음을 알리는 묵서기록과 주인공의 생전모습을 묘사한 다양한 벽화가 그려져 있다. 벽화는 무덤 벽면에 회를 바르고 그 위에 그렸는데, 무덤의 구조와 벽화의 내용을 통해 5세기 초 고구려 귀족의 주택구조와 생활상, 신앙 등을 자세히 알 수 있어 주목을 받고 있다.
강서대묘는 널길과 널방으로 구성된 외방의 흙무지돌방무덤으로 진흙과 석회를 다져쌓은 흙무지의 직경은 51m, 높이는 9m에 달한다. 널길과 널방은 커다란 석재를 두세장 쌓아서 만들었으며, 벽화는 물갈이한 돌 벽면위에 직접 그렸다. 무덤의 네 벽에는 청룡, 백호, 주작, 현무의 사신을 따로 그리고 천정에는 황룡과 연꽃 등을 그렸는데, 필치가 유려하고 힘이 있어 고구려 사신도의 완성된 형태를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뱀과 거북이 한 몸으로 엉겨있는 현무도는 6~7세기 동아시아 회화의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1층 전시장 입구 전면에는 다섯 장의 이미지배너를 길게 설치하여 다소 좁은 전시장이 넓어 보이도록 하였는데,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추출한 강렬하고도 우아한 색채는 관람객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하였다. 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의 무용총벽화 무용수들의 복식 재현품을 전시하여 평면적인 패널전시를 보완하였으며, 1층 출구 쪽에는 고분벽화와 관련된 영상물을 상영하여 관람객들의 이해를 돕도록 하였다.
전시장 2층에는 전성기 고구려 사람들의 생활과 정신세계를 보여주는 실제 벽화사진을 전시하였다. 1층에서 디지털기술로 복원한 벽화를 경험한 관람객들이 실제 벽화 사진을 보면서 과거로 시간여행을 할 수 있도록 유도한 것이다. 특히, 수산리벽화고분의 주인공 내외가 나들이하는 장면과 덕화리2호분의 별자리 그림은 많은 관람객들의 눈길을 끌었으며, 1천5백년을 넘어 생생하게 전해 오는 고구려 화공의 필선과 색채는 관람객들로부터 신비롭다는 찬사를 받기도 하였다.
사진 중심의 전시가 남긴 아쉬움
11월 29일 개막식은 오후 6시로 예정되었으나 이미 오전부터 많은 관람객이 찾아왔다. 특히 한국전쟁 참전용사들은 개막식이 진행되는 내내 자리를 지키며 깊은 관심과 애정을 보여주어 전시를 준비한 우리에게 진한 감동을 주었다. 말마라대학교의 교수 몇 분도 전시를 관람하고 전문가적인 의견을 주었고, 역사학을 전공하는 한 대학생은 개막식 내내 필자에게 질문 공세를 하는 등 기대이상의 반응을 보여주었다.
현지반응은 뜨거웠지만 몇 가지 아쉬움은 남는다. 짧은 준비기간은 열악한 현지 사정과 더불어 전시를 힘들게 한 가장 큰 요인이 되었다. 여러 기법의 연출을 통해 보완하였지만 사진 위주의 평면적인 전시는 내용과 상관없이 전시를 단조롭게 하였다. 앞으로는 유물을 포함한 입체적인 전시를 구성할 수 있도록 시간과 예산이 뒷받침되기를 바란다.